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제시카 아우 지음, 이예원 옮김, 김화진 독서후기 / 엘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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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보다 더 길고 막막한 질문을 알지 못한다. 더구나 멀리 떨어진 가족처럼 한없이 가까운 사이의 누군가로부터 이 질문을 받았을 때는 길고 막막함에 더해 애틋함마저 추가된다. 나의 지난 삶 중에서 질문의 당사자와 얽히지 않았던 어느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추려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만 나열한다고 해도 그것은 실로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막막함으로 인해 우리는 그저 "그럭저럭 살았지 뭐." 하는 말로 얼버무리고 만다. 누군가의 삶이란 그렇게 시간 속으로 묻히고 얼버무려진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연초에 나는 함께 일본 관광을 가지 않겠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이제 같은 도시에 살지도 않고 성인이 된 뒤로 같이 여행을 다녀온 적도 거의 없지만 왠지 그래야 하지 않을지, 그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아직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에서 들던 무렵이었다. 엄마는 처음엔 썩 내켜하지 않다가 내가 계속 밀어붙이자 결국 동의했는데, 딱히 그래 그러자고 말한 건 아니지만 항의를 조금 덜하는 식으로 또는 내가 물었을 때 수화기 저편에서 머뭇거리는 식으로 의사를 표했고, 그걸로 나는 엄마가 따라오겠다는 뜻을 드디어 넌지시 밝혔음을 알 수 있었다."  (p.11)


제시카 아우의 소설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를 읽는 독자라면 아마도 소설의 문체와 담담한 이어짐으로 인해 몇 쪽 일기도 전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꽤나 놀라운 경험이라고 하겠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엄마와 딸이 익숙하지도 않은 타국의 땅에서 만나 함께 여행을 이어가는 이 소설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얼핏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딸의 관심사와 엄마의 관심사가 교차하고, 엄마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각각의 삶과 그 간극이 여행 내내 약간의 어긋남으로 불거질 때 독자는 이미 울음이 터질 순간을 예감하게 된다. 작가는 비록 엄마와 딸의 어긋나는 순간을 세세히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엄마는 차를 마시지도 않고 딸의 이야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는다. 각자의 길을 걸었던 시간의 공백은 더는 넘을 수 없는 분명한 선을 그어 놓은 듯 그 한계를 절감하게 되고, 이를 인식하는 엄마와 딸 더 나아가서 책을 읽는 독자 모두는 쓸쓸함을 느끼게 된다.


"삶에 있어 최선은 욕망받는 것이라고, 내가 욕망하지 않더라도, 나를 욕망하는 사람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나만은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게 최선이라는 가르침을 어떤 경로로든 받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p.104)


도쿄에서 만나 여행을 시작하는 두 사람은 도쿄의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하고, 이어서 오사카와 교토로 이동한다. 두 사람은 운하를 따라 걷기도 하고, 국수를 먹거나 녹차를 마시기도 하고, 중고서점에서 예술서를 들춰보기도 한다. 딸은 동아시계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상처와 자신으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던 여러 타인에 대해, 그리스 고전과 인상파 그림 앞에서 경험했던 경이와 충만한 행복에 대해 말하며 한 사람의 존재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들려준다. 함께 일본을 여행하는 몇 주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가 다른 시선으로 걷고 있음을 확인한다.


"요즘 사람들은 모든 걸 알려 들고 실제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마치 모퉁이만 돌면 각성이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라고 엄마는 말했다. 하지만 도통함이란 사실 없으며 이해가 고통을 줄이지도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이 생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삶을 거쳐가는 것으로, 무無의 상태에 도달하거나 다른 곳에서 고통을 받는 것, 이 두 가지 지점 중 하나에 이를 때까지 연기가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듯 번민 속에 삶을 관통하는 것뿐이라고. 엄마는 선함과 베풂, 부의 보물 상자를 채우듯 축적해가는 친절 등 다른 교의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때는 나를 보고 이야기했고, 나는 엄마가 내가 공감하고 엄마를 따르길 바란다는 걸 알았지만 창피하게도 내가 그럴 수 없고 그보다 더 낯뜨겁게는 그런 시늉조차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p.93~p.94)


모든 것을 엄마와 함께 하며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려 했던 딸은 어느 순간 '모든 걸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고, 그저 보고 보듬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겠다(p.138)'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여행 전에 엄마는 뭘 봐도 기쁠 거라고 종종 대답했는데, 겨울에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물었던 게 엄마가 한 유일한 질문이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부모님의 그늘 아래 있었을 때의 친밀함을 어른이 된 후에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사실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식이 독립을 하고 다른 공간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친밀감은 서서히 희석되고, 추억이라는 별도의 공간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도 실감한다. 다만 여전히 남아 있는 친밀감의 온기가 멀어지려는 관계를 굳게 붙잡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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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30분의 등산로는 그야말로 어둠입니다.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 손전등은 어느새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산을 오르는데 기척도 없이 앉아 있던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기겁을 하고 놀랐습니다. 놀란 것은 고양이도 마찬가지인 듯했습니다. 등산로 한켠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잠을 청하던 고양이는 갑작스러운 손전등 불빛에 놀라 풀숲 어딘가로 냅다 달아났고 나는 예상치 못했던 동물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던 것입니다. 고양이의 몸동작이 어찌나 빠르던지 마음을 턱 놓은 채 걷고 있던 나는 고양이의 형체만 겨우 눈에 담을 수 있었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인 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엊그제 내린 비로 등산로는 적당히 젖어 있었고, 잎과 함께 떨어진 도토리로 어지러웠습니다. 나는 주섬주섬 도토리를 주워서 풀숲으로 던졌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등산로에 떨어진 얼마 되지도 않는 도토리마저 다람쥐나 청설모의 차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숲에 사는 작은 동물들의 먹이마저 그 대상이 된다는 건 꽤나 서글픈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와 도토리를 줍느라 걸음은 마냥 더디게 나아갔습니다. 가뜩이나 바쁜 아침에 나의 오지랖은 쓰레기를 줍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도토리와 밤을 주워 숲으로 던지는 데까지 미치는 바람에 까딱 잘못하면 아침도 거른 채 출근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가 아니라 '오지랖도 병인 양하여' 나는 이 가을에 아침도 거르게 생겼습니다.


영국 작가 로라 패쉬비가 쓴 산문집 <평범한 날들을 근사하게 기록하는 법>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합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지문만큼이나 고유하고 절대 지울 수 없어 당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보여 줍니다. 당신을 아는 사람이면 목소리만으로도 즉시 당신임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당신만의 목소리도 글이나 이미지 등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구별해 낼 수 있어요. 개인적 스타일뿐 아니라 성격과 인품까지 드러내는 당신만의 고유한 색깔이 갈수록 뚜렷해지기 때문이죠. 이렇게 고유하고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고 귀 기울이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p.149)


아니나 다를까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손전등을 비춰가며 등산로에서 도토리를 줍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바라보는 시선도 많고, 감시원의 단속에 걸릴 수도 있는 까닭에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도토리를 줍는 것입니다.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서둘러 산을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에 파랗게 질린 탓인지 아침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도토리가 떨어지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을 듯합니다. 나는 그때까지 등산로의 도토리를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산을 올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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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10-16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에서 도토리 줍는 분들은 도토리를 파는 분일까요? 아니면 직접 도토리묵을 만들려고 하시는 걸까요? 솔직히 몇알 판매한다고 엄청난 이익이 있을 것 같지 않고 실제 도토리를 주어서 도토릭 묵을 만드는 것을 옆에서 구경한 적이 있는데 만들기도 힘들거니와 솔직히 사먹는 것보다 맛도 없더군요.정말 왜 도토리를 주어가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질 않아요.

꼼쥐 2026-10-17 13:36   좋아요 0 | URL
가을 한철, 사람들이 주워오는 도토리를 모아 수수료를 받고 도토리 가루로 만들어 주는 방앗간이 있는 것 같아요. 방앗간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도토리도 있고 말이죠. 물론 어떤 사람들은 주운 도토리를 방앗간에 팔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돈은 크게 되지 않겠지만. 암튼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은 방앗간에서 도토리 분말을 만들거나 방앗간에 팔아넘길 목적으로 하는 것 같아요. 참으로 하찮은 목적이지만.
 
페루에서 온 신사
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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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유한하다는 건 우리에게 언제나 후회와 아쉬움을 남긴다. 그런 까닭에 사는 동안 우리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부인(또는 남편)을 배우자로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이따금 농담 삼아 받게 된다. 물론 그와 같은 질문 속에는 지금과 같은 삶이 몇 번이고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가정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가정은 종종 소설의 주요 테마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한껏 부풀려진 기대를 작가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마치 사실인 양 펼쳐 보인다. 전생의 부부였거나 연인이었던 사람들이 현생에서 다시 전생의 인연을 이어가는 것은 물론 전생에 미처 하지 못했던 일들을 현생에서 원 없이 펼쳐 보임으로써 독자들은 현실에서의 제약이 무한대로 봉인해제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도파민 뿜뿜이라고 해야 할까, 암튼 독자는 삶의 유한성에서 오는 슬픔과 아쉬움을 말끔히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바른 정렬이 일어나는 때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삶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요. 기약 없는 대기실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죽은 이들을 생각해보세요. 평생의 기다림을 지하 세계로까지 가지고 가서 다시 지상으로 나올 때까지, 다시 살면서 또 기다리게 될 때까지 계속 기다리는 이들을요. 그러니, 한 시간을 들여 후회할 일을 하는 편이, 하늘이 다시 우리 삶과 맞닿을 때까지 평생을 기다리는 쪽보다 낫지요."  (p.58~p.59)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 <페루에서 온 신사> 역시 전생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남부 이탈리아의 휴양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젊음과 나이듦, 휴양지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원주민만 아는 비밀 정원의 고요 등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삶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여러 욕망의 엇갈림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통상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현생에서의 어설픈 꿈이나 간절함은 몇 세대 후의 다음 생에서나 어쩌다 이루어질 수 있는 허튼 꿈이라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삶은 가장 완벽한 날을 망쳐버리기도 한다. 삶이 그렇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한다. 이제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버렸음을 라울은 알았다."  (p.135~p.136)


친구들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떠난 젊은이들이 보트 고장으로 인해 해안가의 한 고급 호텔에서 머물게 된다. 이탈리아 남부의 유명 휴양지인 아말피 해안. 젊은이들은 보트가 수리되는 동안 함께 몰려다니며 수영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떨거나 한다. 그러던 중 그들의 눈에 뜨인 한 남자가 있었다. 호텔 식당에 언제나 같은 시각에 홀로 나타나는 수수께끼의 신사 '라울'. 어느 날 우연히 말을 섞게 되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라울'의 신비한 능력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고질병처럼 여겼던 어깨 통증이 그의 손길 한 번에 말끔히 사라지는가 하면 아무도 모르는 개인의 비밀을 알아맞히기도 하고, 일정 때문에 함께 여행을 오지 못한 친구에게 투자의 팁을 알려줌으로써 큰돈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렇게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 라울과 젊은이들. 어느 날 라울은 그들 무리 중 한 사람인 마고와 점심을 함께 하고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의 장소를 알려주겠다며 그녀와 산책을 한다. 라울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마고는 묘한 기시감에 빠져들게 되고, 마침내 라울과 있었던 전생의 인연을 떠올리게 되는데...


"나는 여기까지 걸어와서, 저기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다가 다시 걸어서 돌아가길 좋아해요. 걷다가 모래가 샌들에 들어가면 어린 시절 샌들에 모래가 들어가는 게 싫어서 맨발로 걸어 다니던 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여기에 오면 내가 세상을 사랑하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심지어 나 자신도 조금은 좋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p.85)


라울이 젊은이들에게 펼쳐 보이는 마법과 같은 이야기로 인해 판타지 소설쯤으로 읽히기 시작했던 초반 분위기는 라울과 마고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금세 분위기는 바뀌어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가 소설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전생은 물론 다음 생도 알고 있는 라울이 마고에게 하는 당부는 독자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한다. '우리는 삶을 바로잡으려고 돌아옵니다. 모든 삶은 불완전하기 때문이죠.(p.39)'라고 말했던 라울. 과연 우리는 이번 생의 불완전함을 바로잡기 위해 다음 생에도 돌아올 수 있을까?


모처럼 내리던 가을비는 오후가 되자 금세 그쳤다. 구름 사이로 가을 햇살이 자맥질하듯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여름 늦더위가 끝난 후에 비다운 비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듯했다. 그마저도 물론 대지를 흠뻑 적실만큼 충분한 양은 아니었지만, 등산로를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풀썩풀썩 일던 모습은 당분간 볼 수 없을 듯하다. 그게 어딘가. 삶에서 순간순간 이어지는 우리의 아쉬움은 다음 생에서도 습관처럼 전해지는 것 같다. 아쉬움은 때때로 슬픔처럼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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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더위에 지친 많은 이들의 상상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가상의 세계를 떠돌던 가을은 아주 잠깐 현실에 착지하였다가 느긋하게 숨을 돌릴 만한 여유도 없이 스러져, 초겨울의 추위를 달가워하지 않는 많은 이들의 여운이나 회상 속에서 다시 유령처럼 떠다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1년의 하반기를 장악하다가 크리스마스나 송년 회식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가을은 우리의 기억에서 길게 머무르는 계절입니다. 왔나 싶으면 어느새 사라지는 봄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입니다. 겨울 추위가 길고 매섭게 닥쳐올라치면 가을의 잔상은 유성의 꼬리처럼 더욱 길게 이어지곤 합니다.


무르익는 계절과는 다르게 최근 들어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진보 진영 인사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차가운 현실이 결코 달갑지는 않겠지만 계절의 순환도, 민심의 변화도 때가 되면 바뀌게 마련인 듯합니다. 회자정리라고나 할까요. 달도 차면 기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이유는 각자가 다를 테고, 서로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그 속을 뜯어보면 천차만별일 텐데 정치평론가를 자처하는 호사가들은 제 나름의 분석을 내놓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민주당과 대통령의 지지율이 이렇게 바닥을 치고 있는 마당에 대통령은 국정 지지율을 끌어올릴 방안을 궁리하는 게 아니라 어찌하여 연일 같은 진영을 향해 고강도의 공격을 멈추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게 중론입니다. 물론 진보 진영의 여러 인사들이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내놓았던 건 사실이지만 이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무극파(무책임한 극단주의자)라는 둥 '능력도 안 되면서 큰 자리를 요구'한다는 둥 '혈세로 호사 누리면서도 서민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정치인'이라는 둥 연일 강한 어조로 비난한다는 건 대통령 자신이 속 좁은 좀생이 정치인이라는 걸 자인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니 대통령은 정당한 비판마저 참지 못하는 밴댕이 소갈딱지의 정치인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고 지지율은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요.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대통령도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 왜 그런 미련한 짓을 계속하는가에 대한 10인 10색의 분석이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일반적인 정치 평론가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물론 이것도 역시 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일 테지만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에는 평생을 비주류로 살아온 대통령의 열등의식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주류, 대체로 그들은 보수지향적이면서 대대로 권력과 부를 누려왔던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갈망으로 대통령 자신도 그들 집단에 속하고 싶은 욕구가 드러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그러자면 대통령은 자신의 비주류적 문화와 자신에게 내재한 열등의식을 말끔히 씻어내고 그 결과에 대해 주류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소위 기득권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진보 진영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은 물론 자신의 사상 역시 그들과 다르다는 걸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분세탁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동안 자신에게 덧씌워졌던 비주류적 신분을 걷어내고 주류 소망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진보 진영 인사들의 찌질함에 대해 한껏 비난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작금의 여러 말이나 행동들이 대통령 자신이 진보 진영의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기득권 집단에게 증명하고 있는 단계인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퇴임 후 당신들과 같은 집단에 속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겠지요.


대통령의 이와 같은 태도를 우리는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주류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주류 집단의 이너 서클에 속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의 성장 배경에서 습득한 그들만의 문화에 녹아들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을 통해 그 집단에 편입되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 그들과의 문화적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집단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걸 감안한다면 대통령 역시 지금보다 더 치열하고 비열한 짓을 서슴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대통령의 이러한 태도 이면에 있는 원초적인 욕망을 그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가상의 세계를 떠돌던 가을이 현실에 착지한 이 짧은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요즘입니다. 백조 무리에 속하고자 하는 미운오리새끼의 철없는 행위에 마음 상하지 말고 이 아름다운 계절을 맘껏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알차게 사용하는 일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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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의 여름
루시 스티즈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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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의 주장에 의하면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All Life is Problem Solving)'라고 귀결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생각할 때 도무지 삶을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속성이나 행동을 그 누구도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불행은 그곳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평생 동안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고 지낼 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 자신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모든 불행의 씨앗이다.


"삶은 한 치씩 꾸역꾸역 나아갔고, 그녀는 살아 있었다. 부당하게도, 미치고 팔짝 뛰게도 그녀는 살아 있었다. 어떤 날에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어떤 날에는 차라리 자신이 죽었더라면 좋았을걸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은 살금살금 흘러갔고, 매 순간 주위로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  (p.388)


영국 작가 루시 스티즈의 소설 <에티의 여름>을 읽었던 건 지난 추석 명절의 연휴 기간 동안이었다. 그닥 길지 않은 연휴였지만 오고 가는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꺼내 읽곤 했다. 학계에 몸담고 있던 평범한 연구원이었던 작가가 소설이 쓰고 싶어 1년 동안만 집필에 몰두하고자 직장을 그만둔 후 12개월 만에 나온 초고가 억대의 선인세와 두 권의 출간 계약이라는 이례적인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된 것도 놀랍지만 연구원에서 소설가로 전업한 지 단 1년 만에 한 편의 원고로 영국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 된 것 역시 경이적인 성과라고 하겠다. 나는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섬세한 묘사 그리고 잘 짜인 구성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책을 손에서 놓아야 하는 순간에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소설의 잔상을 말끔히 털어내지 못하곤 했다.


"왜 시간은 거꾸로 흐를 수 없을까? 왜 이미 일어난 일을 전부 되돌릴 수 없을까? 지난 3년의 실타래를 다시 감아 새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놓으리라. 형과 어머니를 집에 가둬두고 온갖 방법으로 둘을 해치려고 모의하는 세상에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인생은 교묘한 함정을 너무 많이 감추고 있다."  (p.112)


소설은 신생 잡지사의 기자인 조지프가 유명한 은둔 화가 타르튀프로부터 달랑 "오라(Venez)"는 한 단어만 적힌 편지 한 장을 들고 그가 사는 프로방스 지역의 외딴 농가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20년, 전설적인 화가 타르튀프는 세상과 단절한 채 그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를 돌보며 챙겨주는 유일한 사람은 조카인 에티뿐이었다. 에티는 조지프를 새 그림의 모델이라 둘러대며 집 안으로 들인다. 그렇게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오전에는 '오렌지를 든 청년'의 실제 모델이 되어 타르튀프의 화실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지만, 오후에는 기사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소일할 수 있는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이었다. 일곱 살에 엄마를 잃고 삼촌인 타르튀프의 삶을 보조하면서 외롭게 성장했던 에티와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전쟁을 겪지 않았던 조지프. 두 사람의 상처는 다른 듯 닮아 있다. 타르튀프로부터 도망쳐 사랑하는 사람과 미국행을 선택했던 에티의 엄마는 끝내 죽음이 되어 돌아왔고,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어린 에티는 스스로의 힘으로 글을 익히고, 요리를 배우고, 삼촌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왔다. 삼촌은 에티의 완벽한 보조 덕분에 오직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었고, 그의 그림은 비싼 가격에 팔렸다. 반면 매사에 유능했던 형 루퍼트가 자진하여 전쟁에 나갔던 반면 조지프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대에 들어가 그림을 배운다. 전쟁이 끝나고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안은 채 귀가한 형과 독감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엄마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은 조지프는 미대를 그만두고 작가가 된다. 비겁한 겁쟁이라는 질타는 그의 마음에 온전한 짐으로 남는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자랐던 에티는 성장하면서 조금씩 엄마의 외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에티는 결국 전쟁이 한참이던 시기에 삼촌을 속이고 간호사로 참전한다. 그곳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치료하던 중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와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시 삼촌 곁으로 되돌아온다.


"짓이겨진 몸뚱이를 보고도 몸서리를 치거나 숨을 헉 들이쉬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자부심의 징표였다. 그녀는 자신의 의연한 태도가 그들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절대 손이 떨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움찔하거나 눈앞의 광경에서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이었다. 삶과 죽음이 떼려야 뗄 수 없이 뒤엉킨 현장이었다."  (p.364)


"아미르와 함께 언덕에 서 있던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엄마가 느꼈던 충동을 이해했다. 도망치고 싶은 욕망.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욕망. 엄마가 미국에 묻혔더라면 좋았을 텐데. 죽어서까지 다시 생 오귀스트로 끌려왔다는 사실이 어딘가 서글펐다. 엄마는 끝내 생 오귀스트를 벗어나지 못했다."  (p.380)


타르튀프의 눈을 피해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이해하며 사랑을 키워가던 조지프와 에티. '오렌지를 든 청년'이 완성된 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던 조지프는 비로소 타르튀프의 비밀과 에티의 감추어진 재능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쩌면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타르튀프의 비겁한 폭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유했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삼촌을 보조하면서 허드렛일만 강요받았던 에티였지만 그녀는 끝내 자신의 힘으로 삼촌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삼촌의 눈을 피해 아슬아슬한 사랑을 일궈가는 두 사람. 에티가 타르튀프의 그림을 불태우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그 그림이 도매상에게 버젓이 인계되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조지프. 두 사람의 사랑과 불타버린 그림에 대한 비밀은 어떤 방식으로 밝혀질까?


가을이 깊어지면서 독서에 대한 열정도, 소소한 일상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욕심도 시나브로 옅어지는 느낌이다. 뜨거운 열기 탓에 바깥에서의 일상이 도통 궁금하지 않았던 지난여름과는 달리 숲의 변화도, 사람들의 다채로운 표정도, 저무는 햇살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어느 것 하나 궁금하지 않은 게 없다. 어제는 시골에 가서 떨어진 알밤을 한 되쯤 주워 왔다. 밤을 삶는 일도, 껍질을 벗겨 속살을 발라내는 일도 여간 귀찮은 게 아니지만 밤을 줍기 위해 피곤한 줄 모르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던 게 무엇보다 즐거웠다. 이렇게 밖으로만 나돌다 보면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길 일이 도무지 없겠다 싶었다. 읽었던 모든 책에 대해 리뷰를 남길 자신은 없지만 가슴에 남는 어떤 책은 책을 읽었다는 작은 표시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잘했어요'라는 칭찬 문구의 스탬프를 찍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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