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언제나 발치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시간. 새벽의 등산로에서 밟히는 흙의 감촉은 뒤꿈치에서 시작되어 가슴을 거쳐 정수리에 이른다. '오늘 아침 기온은 어제보다 조금 더 떨어졌나 보네. 흙이 꽁꽁 얼어 딱딱해진 걸 보니.'라거나 '오늘은 기온이 많이 올랐네. 흙이 부드러워졌어.', '비가 많이 왔나 보네. 여전히 길이 미끄러운 걸 보니.' 등 산을 오르는 내내 발밑에 밟히는 흙의 감촉을 매 발걸음마다 생생하게 느끼곤 한다. 그것은 곧 계절에 대한 감각이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이와 같은 탐색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즐기는 나만의 의식이기도 하다.


오늘 아침은 어제에 비해 기온이 낮았던 탓인지 등산로의 느낌은 딱딱하고 거칠었다. 서리가 내려앉은 낙엽도 꽤나 미끄러웠다. 새벽의 고요를 탁한 어둠이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제 낮에는 많은 등산객이 오고 갔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쓰레기가 눈에 띄었다. 코를 풀고 버린 화장지며, 일회용 마스크며, 단골손님처럼 보이는 사탕껍질이며, 심지어 스포츠 용품 홍보 팸플릿에 이르기까지 등산로에는 정말 온갖 종류의 쓰레기가 버려진다. 나는 누군가 버린 쓰레기를 주워 내려오느라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시간을 허비하곤 하지만 다음날 깨끗해진 등산로를 다시 걷고 있노라면 괜스레 뿌듯해지곤 하는 것이다.


정혜윤 PD의 에세이 <책을 덮고 삶을 열다>를 읽고 있다. 나는 유명 작가의 신작을 남들보다 늘 한 박자 늦게 읽는 편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할 때가 많아서 평소에 내가 선호하는 작가라 할지라도 세간의 평이 그닥 좋지 않으면 구매를 미루거나 숫제 읽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라면 구매를 서두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정혜윤 PD의 글을 즐겁게 읽어왔던 사람으로서 <책을 덮고 삶을 열다> 역시 바쁜 업무 틈틈이 아껴가며 읽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신비롭다는 생각이 어찌나 강력하게 가슴에 박혔던지 나는 이제 얼핏 본 낯선 사람의 피로에 절은 등판, 축 늘어진 어깨, 실망에 익숙해져가는 얼굴, 문 닫힌 가게, 언제나 약간씩 잘못되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슬픈 자매애를 느낀다. 나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삶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히 '누리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것만 바라는 것이 아니다. 위축되어 초라함에 떨지 않기를, 고개를 떨구고 혼자 어둠 속에 있지 않기를, 혐오에 빠져들지 않기를,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기를, 너무 고통받지 않기를, 힘을 잘못된 데 쓰지 않기를, 존엄성과 생명을 잃지 않기를, 자신의 능력과 기쁨을 찾기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기회를 가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p.56~p.57)


나는 이 대목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었다. 마치 어떤 종교의 탄트라와 같은 이 구절에 나는 깊이 공감했고, 생각할수록 경건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새벽의 등산로에서 키 큰 나무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정혜윤 PD는 독자들을 향해 가슴과 가슴으로 벅찬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나날이 혐오가 많아지는 세상, 전에는 없던 가상의 적도 새로이 만들어 혐오를 부추기고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서로를 향해 함성과 욕설을 내뱉는 세상, 주일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외치면서도 평일에는 온갖 욕설과 악담으로 종교인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세상을 향해 작가는 뭔가 하고픈 말이 있었나 보다. 바람이 차다. 내일 아침 등산로는 꽁꽁 얼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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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쓰기 위하여 - 글쓰기의 12가지 비법
천쉐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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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쓴다는 건 타인과의 교감이나 소통이 원활하다는 의미일 테다. 물론 여타의 다른 재능도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유명한 작가나 배우 중에는 의외로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작가가 살아가는 실제 생활과 그가 작품 속에서 펼치는 가상의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괴리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아마도 현실 공간과 가상공간 중 어느 곳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가상의 공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현실 공간에서의 나는 아마도 갓 전입한 이등병마냥 어리바리한 모습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익숙한 곳과 익숙하지 않은 곳의 차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오직 쓰기 위하여>를 쓴 천쉐 작가 역시 자신이 현실에서 사교성이 없다고 말한다. 1970년생인 작가가 연륜이 짧거나 경험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 터, 작가는 오직 글을 쓰는 일에 몰두하였거나 삶의 비중을 글쓰기에 두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중문학과 대학생이 된 스무 살에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다는 작가는 '가장 존경한 친구'로부터, 대학 문예 동아리 선생님으로부터 '창작의 소질 내지 소양이 없다'는 말을 들었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까 궁리했고, 경제적 어려움과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글쓰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시간을 훔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습관이 들고 나니까 쓰지 않으면 불편해졌다. 나중에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저녁 시장에서 노점을 벌일 때도 노트를 들고 한쪽에서 쓸 수 있게 됐다. '습관'은 어떤 선언으로 변했다.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겉보기에는 야시장 행상인이지만 글쓰기는 내 마음속에 심어져 있고 내 생활에서 표현되고 있다. 때가 되면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 돈을 충분히 모으지 못한다 해도 소설을 쓰겠다는 뜻을 나는 행동으로 여자친구에게 증명해 보였다."  (p.38)


출간은 '10년 뒤에나 생각하자'면서도 1년에 한두 편씩을 계속 썼던 작가는 친구가 자신의 작품을 신인상에 응모하는 바람에 출간의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 '악녀서'가 대만은 물론 홍콩에서까지 판매되는 중에도 작가는 타이중 야시장에서 옷을 팔았다. 혹여라도 독자가 알아보는 날이면 아니라면서 외면하곤 했다. 재능은 없고, 대학 졸업 뒤 빚더미 가족을 돕느라 시간은 더 없었던 작가는 서빙, 점원, 노래방 도우미, 대필 작가, 여행·모텔·인터뷰 기사 등 가리지 않고 처리하는 프리랜서 등을 하면서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겪었다.


"장편소설 집필은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는지, 긴 시간 한 글자 한 글자 두드릴 수 있는지, 그리고 구상해놓은 모든 생각이 진짜가 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갖가지 상황이 닥치지만, 모든 시련을 통과해야만 작품이 완성된다. 내 가장 큰 장점은 잘 버틴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그리 큰 기대가 없다. 그리하여 내 초고가 언제나 못 봐줄 만큼 끔찍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용감하게 쓰고, 고치고 또 고치며 나아간다."  (p.79)


우리는 종종 자신의 재능 없음만 탓하고 열정이나 노력의 부재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대하곤 한다. 예술 분야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러하다. 글을 쓰는 일이든, 그림을 그리는 일이든, 혹은 악기를 연주하는 일이든 그 분야의 타고난 천재보다는 긴 시간을 들여 끝없이 노력한 이가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때때로 잊어버리곤 한다. 꿈은 있지만 자신에게 타고난 재능이 없다고 풀이 죽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1부 '내가 걸어온 창작의 길', 2부 '창작자에게 건네는 열 가지 조언', 3부 '프리랜서 업무 지침서' 등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천쉐 자신의 회고록인 동시에 재능은 없고 열정만 가득한 모든 꿈쟁이들에게 건네는 희망가라고 할 수 있다.


"친구 말로는 내가 의지력이 강하다지만, 나는 의지력이 아니라 적응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수 있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이랄까. 나는 인내심이 대단하고 온갖 좌절을 딛고 일어서고자 온 힘을 쥐어짤 수 있다. 갖가지 질병과 함께해왔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도 글을 쓸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개발했다. 우리는 반드시 가장 강해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더 멀리 걸어가기를 기대할 수는 있다."  (p.147)


천쉐 작가와 같은 노력형 인간의 성공기를 읽고 나면 갑자기 없던 힘이 치솟고 주먹에도 불끈 힘이 들어가지만, 그것도 잠시 열정 생성의 유효기간은 생각처럼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나는 천쉐처럼 의지력이 강한 사람도 아니요, 어떤 분야에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아니기에 그저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때로는 누군가의 열정을 응원할 뿐 내가 직접 나서서 추진하지는 않는, 말하자면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가벼운 인간에 속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금세 지칠 듯한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분수에 맞지도 않는 큰 성공을 욕심내기도 한다. 그래도 하나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반성을 잘한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어떤 거창한 계획을 하나 세울까 고민 중에 있다. 멀지 않은 시점에 통렬한 반성이 이어질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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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의 바깥공기를 체크하는 일은 휴일 일정에서 언제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이다. 날아갈 듯 가벼운 꼬마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뽀송뽀송 마른 보도 위를 사뿟사뿟 걷는 모습만 보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가볍게 걷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하얗게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서둘러 아침 산책을 나가야 할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지곤 한다. 이와는 반대로 아스팔트가 온통 축축한 물기로 젖어 있고, 비가 쏟아질 듯 아침부터 하늘이 끄물끄물하는 날에는 뭉그적뭉그적 게으름을 피우게 마련이다. 세수도 한껏 미룬 채 뒹굴거리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난 사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런 날에는 이상하게도 쇼팽의 녹턴에 마음이 끌린다. 셰레시 레죄의 '글루미 선데이'를 듣지 않는 것만으로도 꽤나 대견하다 생각하면서.


오늘 아침은 어제 내린 비와 진눈깨비로 도로는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무거웠다. 영하의 날씨라고는 해도 추위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내 주위에 게으름의 더께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부터 대만 작가 천쉐가 쓴 <오직 쓰기 위하여>를 읽고 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천쉐'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다. 대만에서는 잘 알려진 작가라는데 말이다. 자신의 삶을 간략하게 써 내려간 듯한 이 산문집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잘 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계속 쓰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다가갈 수 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꾸무럭거리거나 펜을 놓지 말자. 오로지 글로 써낸 원고만이 나의 것이다. 끊임없이 써나가야만 글쓰기가 우리 삶의 핵심이 된다. 계속해서 쓸 능력이 있어야만 글쓰기가 우리의 전문이 된다. 쉬지 않고 써야만 우리는 비로소 결승점에 이를 수 있다."  (p.35)


50대 중반의 작가는 글쓰기에 진심인 듯했다. 그 열정과 치열함이 부러웠다. 내가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머리로 생각했던 글의 내용과 막상 글로 써서 완성했을 때의 글의 내용이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사실에 절망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의도했던 주제나 글의 내용은 전혀 이게 아닌데...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몰래 와서 나의 글을 대신 썼던 것도 아닌데 어쩜 이럴 수가...' 나의 생각과 글 사이에 존재하는 크나큰 차이를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탓일 테지만 열정과 노력이 부족한 게 근본 원인인 듯하다.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으니 노력할 이유도 찾기 어렵지만 말이다.


여린 겨울 햇살이 자맥질하듯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가 금세 사라지곤 한다. 내게 허용된 게으름은 이 정도인가 보다. 오후에 약속이 한 건 있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그마저도 취소해야 할지 모른다. 그건 예의가 아닐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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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빙산 - 김상미의 감성엽서
김상미 지음 / 나무발전소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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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 한켠에선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곤 한다. 시인이 시를 써야지 한가하게 산문을 쓰고 있는 현실이 슬프고, 그렇게 나온 산문집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선뜻 읽고 있는 내가 밉고 그렇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서정윤 시인의 시 '홀로서기'가 시중에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서정주 시인으로 잘못 안 채 시를 먼저 암송했었고, 낭랑한 음성의 성우나 어느 여배우가 읊었던 시낭송 테이프가 여느 대중가요 테이프만큼 인기가 있었던 시절, 약속이 있는 사람들의 손엔 으레 시집 한두 권쯤 모양새처럼 들리던 시절, 소설보다 시집이 더 잘 팔리던 그 시절을 살아보았던 나는 새로운 유행에 밀려 이제는 뒷방 노인네 신세가 된 어느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도 못내 미안하고, 부끄럽고, 끝내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한때 누군가의 시낭송 테이프를 닳도록 들었던 나는 '시라는 건 다만 음표가 없는 노래로구나' 생각했었고, 그런 노래를 의미도 모른 채 부르고 또 불렀었다. 그 소리는 어스름에 묻혀 유령처럼 마을을 떠돌고, 가슴에는 어둑어둑 어둠이 짙어지는데 발길을 되돌려 집으로 향하지 못했던 나는 오래도록 산길을 거닐었었다. 그러나 시와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시와 멀어지는 명분은 언제나 시의 무용성과 독해의 어려움이었다. 그렇게 나를 합리화하면서 꾸역꾸역 나이만 먹어 왔다. 나는 어쩌면 시를 잃었던 그 시점부터 젊음의 낭만을 영영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이 세상을 온전히 누리는 대신 그것을 모성이라는 햇빛 속에 집어넣어 우리가 필요로 할 때마다 비로, 눈으로, 따뜻한 햇살로 풀어놓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당연한 걸로만 알고 누려만 온 것이다. 어머니는 눈물로 그것을 경고하셨다. 나도 너와 똑같은 인간이며, 내 몸속에도 오성과 오감의 기차가 순환하고 있다고."  (p.38)


김상미 시인의 산문집 <달콤한 빙산>을 읽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어를 사랑했던 소녀는 31살의 늦은 나이에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였다. 익명의 도시에서 시를 시작한 시인은 이제 60살이 훌쩍 넘어 늙은 시인이 되고 말았다. 열렬한 독서가이자 그림 애호가이며 음악과 자연을 사랑하는 독신의 시인은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을 구성 순서로 삼아 자신의 생애를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 왠지 애잔하게 느껴져서 200여 쪽 남짓한 이 책을 다 읽는 데 꽤나 긴 시간을 들였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감정이 격해져서 책을 덮어야만 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니 내 몸이 기억하는 그대로 나는 자연스럽게, 이대로 계속 늙어가는 나를 정겹고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 그리스 옛 시인의 시구처럼 '몸이여, 기억하라'고 애태우지 않아도, 이 광활한 우주에서 한갓 모래알에 불과한 나, 그 몸속에 담긴 나의 흔적, 내 삶, 내가 온 힘을 기울여 살아온 그 흔적과 기억들이 이 우주보다 더 넓을지 우주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고, 작고, 작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 끝이 무엇이든 어디든 나는 지금까지 니체의 제자(?)답게 '아모르 파티(Amor farti)'로 일관되게 살아왔으니 내 몸이 나를 기억하는 그대로 내 노년 또한 소박하고 치열하게 평온하지 않을까."  (p.147)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우리는 미리 겨울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처럼 현대인에게 시간은 그저 가벼이 흘러가는 것. 시간이 만들어 낸 주름도 간단한 수술로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노년은 그저 가난한 누군가에게만 찾아가는 것일 뿐, 자신에게는 영원한 젊음 이후에 갑작스러운 죽음만 존재할 거라는 현대인의 허황된 꿈이 시로부터 우리를 멀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시는 자신의 삶과 운명을 사랑하는 천상의 목소리, 음표도 없이 부를 수 있는 그들 각자의 노래, 그리고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예언서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김상미 시인의 산문집으로부터 배운다. 우리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마무리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한동안 참 많이 아팠었다. 그때 쓴  어머니와 나」라는 시는 지금 읽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시는 6시집에 넣을 생각이다. 그동안은 어머니를 잃은 후유증이 너무 커 문예지엔 발표했지만, 시집엔 넣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젠 그 후유증에서도 가벼워졌고, 어머니가 내 시의 스승인 것을 깨닫고 나니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한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구처럼 어머니도 내게 공책 두 권을 주시면서 그곳에 단어들을 채우게 함으로써 일찌감치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을 터득하게 하신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p.211)


겨울비가 지나간 하늘은 멀끔하게 갠 모습으로 우리를 맞고 있다. 시린 하늘을 배경으로 몇 잎 남지 않은 낙엽이 가늘게 떨고 있다. 우리도 역시 가늘게 떨고 있는 저 나뭇잎처럼 바투 잡은 운명의 끈을 놓칠세라 연신 가늘게 떨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일 내내 가슴 졸이던 새파란 긴장에서 풀려난 탓인지 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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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국에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독서란 본디 그런 것이지요. 아무리 반복하여 읽고 또 읽어본들, 읽었던 것을 되짚어 생각하고 유추해 보아도 글을 쓰기 전에 당신이 의도했던 바에 정확히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서란 글쓴이의 생각에 이르고자 할 것이 아니라(어쩌면 글쓴이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글을 읽음으로써 독자가 생각하는 방식이 예전과 달라지는 것을 꾀하는 일련의 행위를 일컫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독서란 이전과 달라진 방식으로 도출된 자신의 생각을 읽는 행위일 테지요.


이와 같은 오류는 현실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리에서 '윤 어게인'을 외치는 사람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윤석열이 집권했던 지난 3년 동안 실제로 국정을 담당했던 사람이 어쩌면 그의 아내인 김건희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특검의 수사나 돌아가는 주변 정황으로 볼 때 점점 사실처럼 굳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윤석열을 추앙했던 세력들은 이제 '윤 어게인'을 외칠 것이 아니라 '김 어게인' 또는 '건희 어게인'을 외치는 게 옳을 듯싶은데, 그들은 여전히 '윤 어게인'을 외치고만 있습니다. 한심하고 미련한 행위이지요. 그와 같은 행위는 한마디로 자신들의 오류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술이나 먹고 사우나나 하던 윤석열은 지금처럼 감옥에 남겨 놓는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국정 운영자였던 김건희가 돌아오기를 열망하는 게 거리에 나온 지지자들의 현실적인 선택일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까닭이지요.


독서의 효용은 이렇듯 많은 이의 생각을 수용하거나 차용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글을 읽음으로써 내 생각의 틀을 바꾸고, 달라진 생각의 틀을 통하여 새롭게 도출된 나의 생각을 읽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나의 옛 생각을 버리고 새로워진 나의 생각을 읽는 게 진정한 독서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독서의 의미에 대한 대중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처럼 나는 '윤 어게인'을 주창하는 거리의 무법자들을 향해 그들의 오류를 정정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나의 의견을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현실에서 자신의 오류를 발견하기란 눈앞에 있는 사람의 생각을 표정만 보고 읽어내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아닌 타인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삶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김건희의 지시를 받았던 박성재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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