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빙산 - 김상미의 감성엽서
김상미 지음 / 나무발전소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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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 한켠에선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곤 한다. 시인이 시를 써야지 한가하게 산문을 쓰고 있는 현실이 슬프고, 그렇게 나온 산문집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선뜻 읽고 있는 내가 밉고 그렇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서정윤 시인의 시 '홀로서기'가 시중에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서정주 시인으로 잘못 안 채 시를 먼저 암송했었고, 낭랑한 음성의 성우나 어느 여배우가 읊었던 시낭송 테이프가 여느 대중가요 테이프만큼 인기가 있었던 시절, 약속이 있는 사람들의 손엔 으레 시집 한두 권쯤 모양새처럼 들리던 시절, 소설보다 시집이 더 잘 팔리던 그 시절을 살아보았던 나는 새로운 유행에 밀려 이제는 뒷방 노인네 신세가 된 어느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도 못내 미안하고, 부끄럽고, 끝내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한때 누군가의 시낭송 테이프를 닳도록 들었던 나는 '시라는 건 다만 음표가 없는 노래로구나' 생각했었고, 그런 노래를 의미도 모른 채 부르고 또 불렀었다. 그 소리는 어스름에 묻혀 유령처럼 마을을 떠돌고, 가슴에는 어둑어둑 어둠이 짙어지는데 발길을 되돌려 집으로 향하지 못했던 나는 오래도록 산길을 거닐었었다. 그러나 시와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시와 멀어지는 명분은 언제나 시의 무용성과 독해의 어려움이었다. 그렇게 나를 합리화하면서 꾸역꾸역 나이만 먹어 왔다. 나는 어쩌면 시를 잃었던 그 시점부터 젊음의 낭만을 영영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이 세상을 온전히 누리는 대신 그것을 모성이라는 햇빛 속에 집어넣어 우리가 필요로 할 때마다 비로, 눈으로, 따뜻한 햇살로 풀어놓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당연한 걸로만 알고 누려만 온 것이다. 어머니는 눈물로 그것을 경고하셨다. 나도 너와 똑같은 인간이며, 내 몸속에도 오성과 오감의 기차가 순환하고 있다고."  (p.38)


김상미 시인의 산문집 <달콤한 빙산>을 읽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어를 사랑했던 소녀는 31살의 늦은 나이에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였다. 익명의 도시에서 시를 시작한 시인은 이제 60살이 훌쩍 넘어 늙은 시인이 되고 말았다. 열렬한 독서가이자 그림 애호가이며 음악과 자연을 사랑하는 독신의 시인은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을 구성 순서로 삼아 자신의 생애를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 왠지 애잔하게 느껴져서 200여 쪽 남짓한 이 책을 다 읽는 데 꽤나 긴 시간을 들였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감정이 격해져서 책을 덮어야만 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니 내 몸이 기억하는 그대로 나는 자연스럽게, 이대로 계속 늙어가는 나를 정겹고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 그리스 옛 시인의 시구처럼 '몸이여, 기억하라'고 애태우지 않아도, 이 광활한 우주에서 한갓 모래알에 불과한 나, 그 몸속에 담긴 나의 흔적, 내 삶, 내가 온 힘을 기울여 살아온 그 흔적과 기억들이 이 우주보다 더 넓을지 우주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고, 작고, 작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 끝이 무엇이든 어디든 나는 지금까지 니체의 제자(?)답게 '아모르 파티(Amor farti)'로 일관되게 살아왔으니 내 몸이 나를 기억하는 그대로 내 노년 또한 소박하고 치열하게 평온하지 않을까."  (p.147)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우리는 미리 겨울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처럼 현대인에게 시간은 그저 가벼이 흘러가는 것. 시간이 만들어 낸 주름도 간단한 수술로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노년은 그저 가난한 누군가에게만 찾아가는 것일 뿐, 자신에게는 영원한 젊음 이후에 갑작스러운 죽음만 존재할 거라는 현대인의 허황된 꿈이 시로부터 우리를 멀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시는 자신의 삶과 운명을 사랑하는 천상의 목소리, 음표도 없이 부를 수 있는 그들 각자의 노래, 그리고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예언서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김상미 시인의 산문집으로부터 배운다. 우리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마무리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한동안 참 많이 아팠었다. 그때 쓴  어머니와 나」라는 시는 지금 읽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시는 6시집에 넣을 생각이다. 그동안은 어머니를 잃은 후유증이 너무 커 문예지엔 발표했지만, 시집엔 넣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젠 그 후유증에서도 가벼워졌고, 어머니가 내 시의 스승인 것을 깨닫고 나니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한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구처럼 어머니도 내게 공책 두 권을 주시면서 그곳에 단어들을 채우게 함으로써 일찌감치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을 터득하게 하신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p.211)


겨울비가 지나간 하늘은 멀끔하게 갠 모습으로 우리를 맞고 있다. 시린 하늘을 배경으로 몇 잎 남지 않은 낙엽이 가늘게 떨고 있다. 우리도 역시 가늘게 떨고 있는 저 나뭇잎처럼 바투 잡은 운명의 끈을 놓칠세라 연신 가늘게 떨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일 내내 가슴 졸이던 새파란 긴장에서 풀려난 탓인지 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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