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언제나 발치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시간. 새벽의 등산로에서 밟히는 흙의 감촉은 뒤꿈치에서 시작되어 가슴을 거쳐 정수리에 이른다. '오늘 아침 기온은 어제보다 조금 더 떨어졌나 보네. 흙이 꽁꽁 얼어 딱딱해진 걸 보니.'라거나 '오늘은 기온이 많이 올랐네. 흙이 부드러워졌어.', '비가 많이 왔나 보네. 여전히 길이 미끄러운 걸 보니.' 등 산을 오르는 내내 발밑에 밟히는 흙의 감촉을 매 발걸음마다 생생하게 느끼곤 한다. 그것은 곧 계절에 대한 감각이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이와 같은 탐색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즐기는 나만의 의식이기도 하다.
오늘 아침은 어제에 비해 기온이 낮았던 탓인지 등산로의 느낌은 딱딱하고 거칠었다. 서리가 내려앉은 낙엽도 꽤나 미끄러웠다. 새벽의 고요를 탁한 어둠이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제 낮에는 많은 등산객이 오고 갔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쓰레기가 눈에 띄었다. 코를 풀고 버린 화장지며, 일회용 마스크며, 단골손님처럼 보이는 사탕껍질이며, 심지어 스포츠 용품 홍보 팸플릿에 이르기까지 등산로에는 정말 온갖 종류의 쓰레기가 버려진다. 나는 누군가 버린 쓰레기를 주워 내려오느라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시간을 허비하곤 하지만 다음날 깨끗해진 등산로를 다시 걷고 있노라면 괜스레 뿌듯해지곤 하는 것이다.
정혜윤 PD의 에세이 <책을 덮고 삶을 열다>를 읽고 있다. 나는 유명 작가의 신작을 남들보다 늘 한 박자 늦게 읽는 편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할 때가 많아서 평소에 내가 선호하는 작가라 할지라도 세간의 평이 그닥 좋지 않으면 구매를 미루거나 숫제 읽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라면 구매를 서두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정혜윤 PD의 글을 즐겁게 읽어왔던 사람으로서 <책을 덮고 삶을 열다> 역시 바쁜 업무 틈틈이 아껴가며 읽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신비롭다는 생각이 어찌나 강력하게 가슴에 박혔던지 나는 이제 얼핏 본 낯선 사람의 피로에 절은 등판, 축 늘어진 어깨, 실망에 익숙해져가는 얼굴, 문 닫힌 가게, 언제나 약간씩 잘못되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슬픈 자매애를 느낀다. 나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삶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히 '누리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것만 바라는 것이 아니다. 위축되어 초라함에 떨지 않기를, 고개를 떨구고 혼자 어둠 속에 있지 않기를, 혐오에 빠져들지 않기를,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기를, 너무 고통받지 않기를, 힘을 잘못된 데 쓰지 않기를, 존엄성과 생명을 잃지 않기를, 자신의 능력과 기쁨을 찾기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기회를 가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p.56~p.57)
나는 이 대목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었다. 마치 어떤 종교의 탄트라와 같은 이 구절에 나는 깊이 공감했고, 생각할수록 경건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새벽의 등산로에서 키 큰 나무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정혜윤 PD는 독자들을 향해 가슴과 가슴으로 벅찬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나날이 혐오가 많아지는 세상, 전에는 없던 가상의 적도 새로이 만들어 혐오를 부추기고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서로를 향해 함성과 욕설을 내뱉는 세상, 주일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외치면서도 평일에는 온갖 욕설과 악담으로 종교인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세상을 향해 작가는 뭔가 하고픈 말이 있었나 보다. 바람이 차다. 내일 아침 등산로는 꽁꽁 얼어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