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 홍승은 폴리아모리 에세이
홍승은 지음 / 낮은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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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자신의 치부나 약점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것도 누군가의 강요나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인 행위라면 더더구나. 그럼에도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사례가 종종 있게 마련이고, 나는 그와 같은 것들을 접할 때마다 그들을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철이 없다고 해야 할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어떤 체념이나 무기력의 발로에서 나온 행위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동시에 여러 생각들이 두서도 없이 교차하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홍승은 작가의 산문집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역시 그런 부류의 책이었다. 저자의 용기에 감탄하면서도 마냥 박수를 치고 있을 수는 없었던...

 

"나는 우리를 폴리아모리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이상한(queer) 관계라고 말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폴리아모리'를 입력하면 무수한 분노를 마주할 수 있다. 난교, 바람, 악의 세력, 타락의 끝, 소돔과 고모라, 그런 단어들을 마주 보고 있으면 불현듯 나와 내 일상이 낯설게 느껴진다. 다정한 아침 인사와 밤 인사, 하루를 채우는 반짝이는 대화와 고만고만한 갈등,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낯설어지는 순간이다."  (p.10~p.11 '프롤로그' 중에서)

 

'비독점적 다자 사랑'을 뜻하는 '폴리아모리'는 용어 자체도 생경하지만 현실적 차원에서의 실현 불가능성에 더 주목하게 된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류 이성애자의 관점에서 그들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이상한(queer) 존재인 것이다. "두 애인과 산다는 게 말이 돼? 야동도 아니고..." 하면서 야릇한 상상을 하거나 색안경을 끼고 볼 게 틀림없다. 세상에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정작 가슴으로 그들을 품고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폴리아모리가 얼마나 납작하게 인식되는지 수시로 부딪히고 있다. 어떤 이는 당당하게 말한다. 자신은 폴리아모리를 안 좋게 생각하고, 그건 존중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라고. 그에게 굳이 존중받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손쉽게 관계를 재단하고 판단하는 태도가 불쾌하다."  (p.150)

 

얼마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후보로 나선 한 정치인이 TV토론에서 했던 말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는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할 의향이 있느냐'는 경쟁 후보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예로 들면서 "그곳은 시내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남부에서 열린다."며 "그런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나라의 퀴어 축제가 시내 한복판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며, '보통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외곽 지역에서 개최할 것과 '안 볼 권리'를 주장한 것이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개개인 누구나 품을 수 있는 문제이지만 자신의 관점을 타인에게 강요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를 구분하고 그들이 다수의 시선에서 멀어지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 책은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1. '의외로 평범합니다', 2. '내 사랑이 불편한가요', 3. '서로에게 무해한 방향으로'의 세 개 챕터로 구성된 이 책에서 작가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 검열 없이 자신의 과거나 현재 모습을 비교적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시민 의식이 높아진 데서 오는 바람직한 성장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자포자기의 심정일지도 모른다.

 

"헛짓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던 아빠가 이제는 폴리아모리를 이해하고, 세상에는 함부로 손가락질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자신은 원래 군인보다 책방 주인이 되고 싶었다면서, 지난 행동을 돌아보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빠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헤아려보는 한편, 그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려 부단히 애쓰고 있다."  (p.226)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는 각기 다른 위치에서 다양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세 사람(승은, 우주, 지민)이 폴리아모리 관계를 맺고 한집에 살게 되기까지의 과정, 그 과정에서의 분투와 좌충우돌을 생생하게 담아낸 책이지만 일반 독자들은 어떤 이유로 이 책을 읽게 된 걸까. 이 책에 쏟아진 관심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은 나와 다른 방식의 사랑에 대한 관음증적 호기심일 수도 있고, 다양한 삶의 유형에 대한 열린 사고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인식 체계는 각자가 습득한 경험치 내에서 작동하며, 그 영역 밖의 존재를 폭넓게 이해하고 포용하기에는 우리의 품이 너무 좁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내 품의 한계를 인식하며 이 책을 읽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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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경제원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는 보수 언론이나 일부 정치인, 그리고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전경련을 비롯한 이익단체, 예컨대 의사협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에 의해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에게도 친근한 경제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부각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는 시카고학파로 불리는 통화주의자들에 의해 '레이거노믹스'의 근간을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국제적으로도 자유 무역과 시장 개방을 강력하게 추구해왔다. 이론상으로는 자유방임에 가까운 고전적 자유주의 이론을 개선하기 위한 방책으로 무질서한 시장에 도덕성을 부여한다는 게 그 근간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강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채택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역시 '신자유주의' 물결에 빠르게 편승해왔다. 대한민국에서 신자유주의의 기원은 대체로 김영삼 정부의 후반기로 보고 있다. 작지만 강한 정부, 자유시장경제의 중시, 규제 완화, 자유무역협정(FTA)의 중시, 노동 시장의 유연화 등은 당시에 펼친 대표적인 경제 정책이었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로의 전환이 가속화되었던 계기는 역시 IMF 구제금융을 들지 않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에서의 신자유주의 확장은 보수정권이었던 MB정권과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가속화된 측면이 있다. 정치인들은 너도 나도 '신자유주의'를 외치기에 여념이 없었고, 이에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논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원리에 편승하여 가장 큰 혜택을 본 주체는 역시 기업가가 되겠지만 그 와중에 의사협회의 이권 챙기기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과감했던 게 사실이다. 범죄 유형에 관계없이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는 사람'이 대상이었던 의료인 결격사유가 2000년 다수의 의사 출신 국회의원이 주도해 '보건의료법령을 위반하여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사람'으로 의료법을 개정하면서 의사면허는 그야말로 '불사조 면허'로 탈바꿈했다.

 

2000년 의료법을 개정한 후 의사들은 살인을 해도, 성범죄를 저질러도, 수술실에서 온갖 탈법을 저질러도 의사면허는 유지되는 무소불위의 특권을 20년 넘게 누려왔던 셈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인 동시에 국민 위에 군림하는 선민 집단이 되었던 것인데, 그러한 특권 의식으로 인해 의사는 국가의 행정력도 어찌할 수 없는 괴물 집단으로 성장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공동체에서 특정 단체에게 부여한 특권은 다른 대다수의 구성원의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 급기야 이에 반발하는 국민 여론이 빗발쳤고, 의사 면허 취소를 2000년 이전으로 되돌리기 위한 '의사 면허 취소 확대법'이 복지위를 통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의사단체는 파업 운운하며 국민을 협박하고 있다. 그것이 코로나 정국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일 테니까 말이다.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인 로버트 실러는 "자본주의 경제는 규제가 없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며, 우리에게는 착한 행동을 강요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선의를 갖고 있는 게 아니며 모두가 관대하고 공익 정신을 갖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제한할 규칙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관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갖고 있지 않은, 공익 정신이라곤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의사 가운만 걸친 몇몇 괴물들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코로나 정국이 이어지는 2021년의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가 키운 몇몇 괴물들과 그들을 추방하고자 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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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말공부 - 말투 하나로 적을 만들지 않는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미숙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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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동의하겠지만 '폭력적인 생각은 폭력적인 언어로 발현되며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다면 급기야 폭력적인 행동으로 발전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생각의 자유는 물론 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보장하는 대한민국의 헌법체계에서 자신의 폭력적인 생각을 단순히 폭력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다고 해서 범죄자 취급을 받거나 법적 처벌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폭력적인 언어 사용을 강제적으로 불허하거나 교정을 강제할 만한 특별한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폭력적인 언어가 어느 한 사람에게 특정됨으로써 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을 주었다는 이유로 법적 처벌을 받는 예외적인 경우가 드물게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단순히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되지는 않는 게 현실이다. 개인의 자유권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적인 상황을 사회적으로 관대하게 허용하는 이와 같은 현실이 최근 불거진 배구계의 학폭 이슈의 발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음은 내가 하는 말로 드러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말하는 방식을 바꾸면 마음도 태도도 달라진다. 또한 말투가 달라지면 경직되었던 인간관계도 훨씬 유연해지고 안정된다."  (p.8 '머리말' 중에서)

 

온라인 상에서의 넘쳐나는 폭력적인 언어는 이미 그 한계선을 넘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의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위험성을 인지하고 처벌이나 교정을 강구하는 쪽으로의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일베나 워마드와 같은 극단적 사이트는 상시 폭력적 언어로 도배가 되곤 하지만 사이트의 폐쇄와 같은 처벌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더구나 유튜브의 조회수가 곧 돈으로 직결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전보다 더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어의 사용은 갈수록 증가할 수밖에 없다. 성장기의 아이들이 폭력적인 언어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는 이런 현실에서 '선플 달기' 운동이나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자는 운동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점점 대담하고 흉포화 하는 청소년의 폭력 범죄를 걱정하면서도 말의 중요성은 간과하는 게 사실이다.

 

"무언가를 사과하는 상황에서는 '미안하게 생각하느냐 아니냐'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반대로 말하면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느끼면 의외로 쉽게 용서한다. 큰 실수를 저지른 경우가 그렇다. 가령 피해자가 "이게 사과만으로 용서받을 일이야!" 하고 계속 화를 내더라도 주위에서 "상대방도 미안하다고 사과했으니 이쯤에서 받아주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잖아."라며 거들어주기도 한다."  (p.79)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이자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한 사이토 다카시의 신작 <어른의 말공부>는 사실 성인, 특히 비즈니스 관계에 있는 사람들 간의 말투와 언어 사용에 집중된 책이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일과 관계가 술술 풀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미움을 받고 오해를 사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차이는 바로 말투에서 비롯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말 습관을 바꿈으로써 갈등을 피하고 호감을 얻을 수 있는 대화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침착하게 이야기를 진행하려면 객관적인 언어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말에 주의하자. 예를 들면 ‘애당초’, ‘원래가 말이야’ 등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상대방은 ‘또 설교 모드에 돌입했군’ 하고 마음을 닫는다. 자신의 의견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을 것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답지 않다'는 것은 비난을 암시하는 말투다. '너답지 않다'는 말은 언뜻 상대를 인정하는 것 같지만 눈가림일 뿐이다. 내면에는 '네 주제를 잘 알아야지!'라는 감정이 담겨 있다. ‘○○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친절한 표현은 실상은 강요다. 마치 상대방을 위한 것처럼 꾸미지만 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강요하는 경우에 흔히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계속 말해봐야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옛날부터 위한답시고 하는 말은 경계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면 말에 말을 더하기보다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p.197~p.198)

 

오랜 시간 굳어진 한 사람의 언어 습관은 그 사람의 품격이나 인성으로 말해지곤 한다. 스포츠계의 학교 폭력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 발단의 근저에는 폭력적 언어의 사용을 막거나 순화시키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것이다. 폭력적 언어 사용을 뻔히 보면서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거나 웃어넘기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까닭은 어른들 역시 폭력적 언어 사용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지하는 정치인이 다르다는 단순한 이유로 상대방을 적으로 돌리고 폭력적 언어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깔아뭉개려 하는 행태가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와 같은 특별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몇몇 사람들을 희생양 삼아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내 탓이오!'라는 회한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질 때 학교 폭력은 조금쯤 설 자리를 잃고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폭력적 언어가 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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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장학생인 램지어에 의한 헛소리 한마디가 우리나라 전체를 들끓게 하는 걸 보면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제국주의 일본에 부역하였던 친일의 잔재를 제때에 처리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 역시 간과할 수는 없는 일, 과거 일제시대에도 그러하였지만 돈이라면 열 길 불 속이라도 뛰어들 듯한 불나방과도 같은 존재들의 난장을 아무런 단죄도 없이 그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마냥 답답할 뿐이다. 램지어의 헛소리에 동조하는 몇몇 미꾸라지들의 망언을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과연 보편적 인류의 양심에 비추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작자들인지 심히 의심이 들긴 하지만 적어도 한민족이라는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램지어의 헛소리에 분개해야 마땅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더욱더 기가 막히는 건 그런 망언을 쏟아내면서도 학문의 자유 운운한다는 것인데 그게 설득력이 있으려면 나치에 부역했던 자들을 옹호하는 논문을 발표하거나 그와 유사한 인터뷰를 언론에 실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나치를 지지할 용기는 없으면서 유독 일본 제국주의자들만 칭송하는 이유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악행에 견주어 히로히토의 추종자들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선량했던 자들이 아닌데 어떻게 하면 일제의 만행을 덮어줄 수 있을까 틈만 나면 궁리하는 까닭을 도무지 모르겠다.

 

그나마 우리 사회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기사는 과거 학교 폭력 피해자들의 폭로로 인한 유명 스포츠인들의 퇴장이 아닐까 싶다. 물론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이 스포츠계에만 존재할 리 없겠지만 성과지상주의에 매몰된 대한민국의 스포츠계에서 쉬쉬하고 넘어가던 학교 폭력의 관행이 많았던 것도 공공연한 비밀, 언젠가 터질 게 터진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면 스포츠계를 넘어 다른 분야에서도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지 않겠는가. 그런 관행이 정착되면 학교 폭력이 용서받기 힘든 중대 범죄로 인식될 테고 말이다.

 

코로나 시대를 살다 보니 타인과의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기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언론에 노출되는 기사를 전보다 더 꼼꼼히 살펴보는 게 습관화되었다. 타인과의 접촉 시간이 줄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작은 기사에도 일희일비하게 된다. 혼자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다가도 어느 순간 잠잠해지기도 하고, '그것 참 쌤통이다!' 하면서 무릎을 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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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 - 힘겨운 삶에 지친 이들을 위한 철학 처방전
오카다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책세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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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뭇거뭇한 죽음의 그림자를 막연히 동경하거나 다른 어느 때보다 가깝다고 느낄 때가 더러 있다. 삶이라는 게 언제나 꽃길일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sns에 올라오는 행복에 겨운 사람들의 과장된 몸짓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삶은 적당히 힘들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삶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어떤 위로나 합리적인 설득으로도 죽음 저쪽으로 기운 어떤 이에게 삶으로의 귀환을 종용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인 정신과 의사에게도 마냥 버겁고 힘든 일인 모양이다. 하기에 정신과 의사로서 유명한 오카다 다카시조차 인생의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을 만나 상담하면서 과학적 접근과 의학 지식만으로는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죽고자 하는 사람을 합리적 이유로 설득하기란 불가능한 까닭에 이미 힘겨운 시간들을 지나온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책을 내기에 이르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는 어쩌면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저자가 삶이 힘든 이들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이자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변명의 글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에서 삶의 고통을 짊어지고 고난과 불합리한 시련에 직면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더라도 끊임없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인간, 의미와 용기를 얻기 위해 고투하는 시행착오, 그리고 그것이 다다른 궁극의 지혜를 말하려 한다."  (p.10~p.11 '프롤로그' 중에서)

 

일본에서 인격장애 임상 분야의 제1인자로 손꼽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실용적 의미에서의 철학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어차피 죽을 존재인 우리가 고통을 받으면서도 살려고 하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환기하고 정신과 의사로서의 임상 경험과 역사 속 인물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답을 찾아나가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삶에서 고통을 받는 유형을 총 7개로 나누고 각각의 경우에 걸맞은 역사 속 인물들을 불러냄으로써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자신만의 철학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1장 '부모와 사이가 나쁜 사람에게'에서 저자는 몇 번이나 자 기도를 했던 지인의 사례와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서로에게 불행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이지만, 쇼펜하우어가 가장 창조적이었을 때는 어머니와의 불화가 심했을 때라는 걸 언급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욕구불만이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말한다. 2장 '자기부정과 죄악감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에서는 여러 번의 자살 예고로 부모와 그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등장한다.

 

"헤세는 청년 시절에 자살의 위기와 아슬아슬하게 동거하는 날들을 보냈다. 중년이 되어서도 헤세는 여전히 그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여러 번 강한 자살 충동을 느꼈다. 그의 인생은 삶의 고통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죽음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역사이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깨끗이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쉰 살 이후의 일이었다."  (p.56)

 

3장은 '자신답게 살 수 없는 사람에게'로, 자기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조언이 담겼다. 저자는 의무와 책임, 자유와 가능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일이며,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균형을 찾을 것을 권한다. 저자는 그에 대한 적합한 예로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를 들고 있다. 4장은 ''굴레'에 속박된 사람에게'로, <인간의 굴레>를 쓴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지나치게 사람을 바꾸면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고 필요 이상으로 몸과 마음을 소모시키게 된다. 휴식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을 때는 안정을 원하는 시기도 찾아온다. 많은 사람의 경우, 안정과 변화라는 양극 사이를 오가며 흔들린다. 그것은 계절이 돌고 돌듯 자연스러운 행위일지도 모른다."  (p.176)

 

5장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6장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철학', 7장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서'로 이어지는 후반부에서 저자는 장 자크 루소, 에릭 호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사례를 들려준다. 도쿄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저자는 탁상공론이 되어버리기 십상인 철학에 한계를 느껴 중퇴하고 교토 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수련을 쌓은 끝에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도구로서 철학을 선택학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자전적 경험과 의사로서의 임상 경험, 그리고 철학도였던 저자의 경험이 잘 어우러진 이 책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를 조금이나마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의 남은 삶을 살아갈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결코 여기지 않는다. 그런 어려움과 불쾌함조차 이렇게 주어지는 데는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하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초월하는 힘과 의미를 찾는 것이다."  (p.319)

 

저자는 책의 말미인 에필로그에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철학이란,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인생 속에만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쓰면서 다시 한번 강하게 확신했다.'고 밝혔다. 밖에는 지금 잦아들듯 잦아들듯 가는 눈발이 치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그리고 다시 겨울로 이어지는 무한반복의 순환이 이어질 것만 같은 바깥 풍경을 보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고통 속에서 삶과 죽음을 저울질하는 어떤 이의 한숨이 저 바람 속에 섞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눈이 그치고 더없이 맑은 하늘이 다시 찾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는 건 마음 깊은 곳에 삶의 의미를 담은 철학이 존재한다는 걸 뜻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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