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겁고 번잡한 날은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렇다.  딱히 신경을 곤두 세울 고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병에 걸려 골골대는 것도 아닌데, 마음은 하루 종일 한곳으로 모이지 않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뿔뿔이 흩어지기만 한다.  애먼 날씨 탓으로 돌리는 것도 참 부질없어 보이고, 길바닥에 떨어진 공처럼 제멋대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상념을 뒤좇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다.  어지러워 속이 메슥거린다.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지만, 오늘처럼 헛된 상념에 단단히 사로잡히는 날엔 사는 게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먹고 친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너무 편해서 그래요."하며 면박을 주는 게 아닌가.  '정말 그런가?'하는 의문이 얼마 간의 시간을 집어 먹고, 또 잠시 멍해지다가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읽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는 일 없이 맥쩍게 앉아 있는 것도 못할 짓이다.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댄 탓에 입 안이 텁텁하고, 소태나 먹은 것처럼 쓰다.  이런 날 저녁으로 찬밥덩이를 밀어넣는 것도 처량맞을 듯하여 집에 오는 길에 근처의 마트에 들렀다.  점심도 일찍 먹어 속은 허한데 마땅히 손이 가는 물건이 없다.  빈 카트를 끌고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몇 바퀴를 돌았다.

 

내 집을 무시로 드나들던 아이들도 오늘은 수업이 없다고 안심한 탓인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장본 물건들을 거듬거듬 정리하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괴괴한 어둠만이 남은 하루의 발치를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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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이응준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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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거나 방어할 잠시의 겨를도 없이 사방에서 휘감기는 것들은 모두 싫어한다.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싫음'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울 것이다.  내 몸을 향해 전방위적으로 몰아치는 것들.  그것이 설령 열락이나 더할 수 없는 행복일지라도 말이다.  이응준의 소설 속에는 그런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한동안 외면했거나 일부러 애써 피하려 했던 그런 것들.  형체도 없이 내 오감의 비상구로 슬며시 들어와서는 일순 전신에 소름이 확 돋게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우리가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은 이론적인 귀결일 뿐이지 결코 실제적인 체감은 아니다.  머리카락이 날리는 방향을 보거나 나뭇잎이 쏠리는 방향을 보고 바람은 그 반대편에서 불어오겠거니 편하게 유추하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바람 속에 있었을 뿐, 단 한 번도 내 몸의 일부만(또는 한쪽편만)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은 본 적이 없다.  이응준의 소설은 8월말의 습한 바람처럼 그렇게 읽힌다.  지면에서 튀어나온 낱글자는 어색하게 주변을 맴돌다가 어느 순간 물에 젖은 거즈처럼 모공 속으로 형체도 없이 스민다.  마치 높은 산을 오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우룩한 는개에 젖듯이.

 

이 소설집에는 표제작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을 비롯,일곱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각각의 소설은 주제와 소재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 색깔은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본원적인 고독과 죽음.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두 개의 키워드는 밀란 쿤데라식 철학적 사색과 신경숙의 슬픔이 교묘히 뒤섞이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마치 우물 내벽에 매달린 두레박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을 지향하면서도 팽팽한 동아줄에 의해 허공에서 위태롭게 대롱거리는 두레박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딱히 바쁜 일도 없으면서 습관적으로 울려대는 경적음처럼 삶은 시간이 멎기 전까지 헛된 몸짓일망정 쉼 없이 바동거려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향해 비틀거리며 걷는 인간 군상들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그들에게 '멈춤'은 '죽음'과 동일어가 된 지 오래이니까.

 

작가 이응준의 소설이 신경숙의 멜로나 축축함으로 빠지지 않는 까닭은 대화와 대화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에 교묘히 파고드는 철학적 사색 덕분이 아닐까 한다.  예컨대 위태롭게 매달린 두레박은 우물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지 않는다.  작가의 냉철함은 딱 그쯤에서 멈춘다.

 

"나는 가만히 턱을 괴고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비 오는 지구는 그렇지 않은 날과는 너무도 다르다.  그렇게 지겹던 방구석도 장마철만 되면, 꼭 내가 있어야만 할 자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눈을 감는다.  함박눈은 눈(目)으로 봐야 하지만, 비는 먼저 소리로 다가온다.  아침에 커튼을 걷어봐야만 비로소 폭설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빗소리에 잠이 깨어 새벽녘을 알 수 없는 감회로 서성인다.  만일 누군가 내게 어쩔 수 없이 눈 오는 세상과 비 오는 세상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난 잠결에도 계속 지붕이 젖고 강이 불어남을 짐작할 수 있는, 그런 비만 내리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P.142)

 

그럴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멈추어도, 삶의 자각을 바동거리는 몸짓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서사와 추이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인지되는 그 무엇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작가에게 각각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깨달음의 저편에 존재하지 않는, 오히려 자학과 같은 몸부림을 쳐서라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슬프다. 

 

최면시술사의 얘기를 다룬「Lemon Tree」에 이어 등장하는「이교도의 풍경」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동성애자로서 살다가 끝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문화비평가 구문모의 삶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뻔한 멜로 드라마가 될 법한 이 소재가 이응준의 작품에서는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고 느꼈다.  작가는 구문모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죽음의 귀결을 '낙타를 사랑한 고래의 무모함'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어쩔 수 없는 유전자를 담담히 지켜보고 있다.

 

"서른다섯 해를 자라고 늙어가는 도시에 도착하기 전, 거대하고 위태위태한 밤이 다시금 도래하겠지.  앞으로는 누구를 만나든,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리라.  내가 아까 그녀에게 했던 대답은 틀린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랑엔, 틀림없는 당사자들이 있다.  설혹, 그것이 고래와 낙타의 사랑일지라도 그러하다.  하얗게 빠른 속도로 풍경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사랑마저도 사각형의 쇠자물통을 하고 있는 거기로 되돌아가고 있다."    (P.61)

 

작가는 이 소설집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지금부터 딱 십 년쯤 지나면 고승의 염주알처럼 매끈하고 단아해진 자신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대?  혹은 지금과 별반 다를 것도 없이 고요하게 흐르는 허송세월?  밤마다 잘근잘근 씹다 버려진 쓸쓸함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비참한 아침풍경?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실체를 보이지 않는 삶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살고, 내일도 또 그렇게 집을 나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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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
윌 슈발브 지음, 전행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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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경험하는 일이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다 하더라도 결국 소설 속에서 내가 좋아하게 되는(또는 맘에 드는) 인물은 하나로 국한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그것이 꼭 소설 속의 주인공일 필요는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스토리의 정 중앙에 그 인물을 배치하고 나머지의 인물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쯤으로 치부하게 마련이다.  내가 임의로 결정한 주변인들은 그들의 말, 행동, 생각, 사상 등 우리가 독자로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너무도 무의미해지고 만다.  미련하게도 말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내가 살면서 중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를테면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말이나 행동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보다 더한 신뢰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백화점의 점원이 권하는 옷보다는 우연히 동행한 친구의 안목을 더 신뢰하는 경우, 자신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보통사람의 범주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실수, 예컨대 내가 기대했던 결과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로 혼란스러워하거나 약간의 후회를 곁들인 결말로 끝을 맺는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살면서 마땅히 치뤄야 할 대가라고 믿는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들이 내게 준 사랑에 비하면 번거롭고 헝클어진 결과에 대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시간과 경비는 얼마나 사소하고 하찮은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더구나 그들 중 누군가와 같이할 수 있는 시간이 몇 달, 혹은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더욱 그렇다.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독서는 온전히 나만의 기억이며, 나만의 경험이라는 나의 아집이 산산히 부숴지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수많은 책들, 때로는 '언젠가 다시 읽어야지'하면서도 끝내 다시 보지 않았던 책과 지금은 내용마저 아득한 마음 속의 명저들이 왜 내 삶과 끝내 동행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삶의 번잡함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던 책은 몇 권이나 될까? 하는 낙담은 결국 '독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 속에서 생명력을 갖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책은 저자의 어머니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병원을 찾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저자는 고통과 불안 속에서 점점 무기력해지는 어머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항암치료를 기다리는 시간에 서로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면 어떻겠냐고.  회원이 단 둘뿐인 북클럽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저명한 교육자였으며 하버드 대학교의 입학처장과 돌턴 스쿨의 대학 진학 전문 지도교사를 역임했으며 난민 구조 활동과 아프가니스탄의 도서관 건립 사업에 헌신했던 저자의 어머니는 그에게 더할 수 없이 훌륭한 독서 파트너였던 셈이다.

 

책에는 저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2년여의 시간 동안 그들이 함께 읽고 토론했던 28권의 책이 소개되고 있다.  저자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책들과 저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읽어주시던 책, 그리고 최근에 같이 읽었던 모든 책들에 대해 모자는 서로의 생각을 듣고 말한다.  저자는 엄마와 함께 한 이 '마지막 북클럽'을 통하여 자신과 자신의 형제자매,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과 조카들이 저자의 어머니를 추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 있다면 과거를 기념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동시에 미래도 애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가 사랑했던 책을 기억하게 될 테고, 아이들이 충분히 나이 먹으면 그들에게 그 책을 주고, 그것이 바로 할머니가 사랑했던 책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너무나도 어린 손주들은 결코 할머니의 눈을 통해 영국제도를 바라보지 못할 테지만, 할머니가 사랑해 마지않던 작가들의 눈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을 것이다."    (P.184)

 

저자의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어가고 이를 지켜보는 저자도 슬픔과 불안 속에서 살지만 읽을 책을 고르고, 읽었던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또 다시 문득 떠오른 책을 권하면서 말기암 환자라는 생각도, 그 곁을 지키는 안타까운 보호자라는 생각도 모두 잊는다.  언젠가 어머니가 죽고 많은 시간이 흐를지라도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낡은 책장을 넘기면 그 시절의 어머니 음성이 자장가처럼 들려오지 않겠는가.  그때 읽었던 책은 죽음을 예고하는 죽은 활자의 집합체가 아니요, 대를 이어 영원히 이어지며 추억과 함께 살아 있을 벗이요, 가족인 것이다.  관계 속에서의 책, 추억 속에서의 책은 단순한 사물로서의 의미 이상인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는데도, 나는 이따금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뭔가를, 보통은 당신이 분명히 좋아했을 듯한 책에 대해서 막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머니가 없음에도, 어쨌든 그 내용을 이야기한다.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의 도서관 건립에 300만 달러를 책임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들려드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책이 출간될 때쯤이면, 카불의 도서관도 건립돼 있을 터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P.434-435) 

나는 저자의 '마지막 북클럽'이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의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저자는 여전히 어머니의 음성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물을 것이다.  "당신이 읽었던 책은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안녕한가요?  그리고 내가 읽었던 책은 당신의 삶 속에서 잘 있나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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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각은 뭐니 뭐니 해도 일어나자마자 산에 오르는 짧은 순간이다.

특히 오늘처럼 밤새 눈이 내린 날은 산을 오르기도 전에 한껏 들뜨고 설레게 마련이다.  연인과의 데이트 약속에 나가는 청춘남녀의 심정이랄까?  옷을 챙겨 입는 손길이 바빠지고, 등산화의 신발끈을 바짝 조이고, 옆집이 깨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복도를 걷는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차가운 아침 바람이 내 볼을 스친다.

 

등산로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눈 덮힌 산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 행복했던 기억들이 어린애마냥 눈밭을 뒹구는 동안, 멀리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하나둘 불이 켜졌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저마다의 가슴에 불을 밝히는 일이 아닌가.  아침이 왔노라고 어둠을 향해 당당히 선언하는 일일 터인데...  마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계곡을 타고 올라와 키가 큰 상수리나무를 흔들고 지나갔다.  때마침 그 밑을 지나던 나는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지는 눈 세례에 흠칫 놀랐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은 어지간한 바람에도 떨어질 줄 몰랐다.

 

산길에는 먹이를 찾으러 나왔는지 작은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점점이 이어지다 숲으로 사라지고, 잠이 덜 깬 산은 옅은 어둠과 고요 속에 잠겨 있다.  잔가지와  나무둥치에 붙은 눈이 겨울의 정취를 자아낸다.  묏등에도 눈이 소복하다.  뽀드득 뽀드득 발밑에 눈 밟히는 소리가 재미있다.  거대한 정적에 둘러싸인 산과 그 고요 속을 걷는 나는 처음서부터 하나였음을 알겠다.

 

능선을 따라 걷노라면 심살내리던 마음도 멀리 달아나고 어깨는 한결 가벼워진다.  입춘도 지났으니 봄도 멀지 않을 터, 샛노란 가벼움이 온 산을 뒤덮을 때면 보고픈 사람들과 유람이라도 떠나야겠다.  걸음걸음마다 발 밑에 밟히는 눈덩이가 내 발걸음을 마냥 느리게 했다.  조금만 더 머무르라고 내 발을 잡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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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시인이 쓴 산문집은 단순하지 않다.  주제에서부터 문체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성긴 삶의 틈새를 메우는 시인의 섬세한 손길이 없었다면 삶은 그닥 아름답지 않은 그 무엇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딸', 동질적이면서도 반쪽의 다름으로 영원히 남을 둘의 관계애 대해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인생의 황혼기에 서있는 시인의 아련한 그리움이 책의 제목에서 묻어난다. 

 

 

 

 

 

 

 

 

우리가 살면서 배우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결국 두려움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지금도 궁금한 것이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많이 겪어야 나는 죽는 순간에도 담담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나는 매번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아직은 담담하게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죽음으로 귀결될 내 삶의 끝조차 담담히 바라볼 용기는 아직 내게 없다.

 

 

 

 

 

 

그저 머리로만 기억하던 어떤 것들이 어느 날, 어느 순간에 까닭도 없이 환한 빛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아무리 단순하고 명확한 지식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순서가 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계기가 주어진 것도 아닌데 기적처럼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 그렇게 제각각일 수가 있을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기적과 같은 순간을 기대하며 이 책을 고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기하학의 눈'이 아닌 '감성의 눈'을 통하여 바라보는 세상을 소설로 옮긴다.  그의 작품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작가의 친절한 배려로 생각되어진다.  다소 낯설게 받아들이는 독자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소설 쓰기를 해 온 작가가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는 소설은 조금 다를 듯하다.  나는 여전히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 열광하지만 그가 말하는 소설의 관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 책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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