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 - 지친 나에게 권하는 애니메이션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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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의미로 보면 '상실감' 혹은 '상실의 고통'을 겪는 것으로 인해 인간은 모두 서로에게 동병상련의 동지애를 느끼게 된다. 물론 상실의 대상이나 체감하는 강도는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인간은 상실로 인한 자신의 결핍이나 불만족 또는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상실을 복구하거나 다른 수단을 통해 대체하고자 하는 데 자신의 남은 삶을 모두 소진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예컨대 과거 어떤 시점에 많은 재산을 탕진했거나 한 번의 실수로 전 재산을 날려버렸던 사람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자신의 정상적인 삶 자체를 포기하기도 하고, 어느 시점에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방황했던 사람은 가슴이 뻥 뚫린 듯한 고립감과 허전함으로 인해 삶이 뿌리째 흔들리기도 한다. 때로는 가장 아름답고 화려해야 할 젊은 시기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는 상실감을 남들보다 몇 배는 더한 고통으로 체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 그것을 만회할 대체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다. 성형수술을 하거나 많은 돈을 들여 관리를 받는 등 유난스러울 정도로 젊음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자면 이와 같은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병적으로 돈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예를 들면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의 아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바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상실의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남은 삶을 소진하는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어른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내 안에 사라진 듯한 순수함을 다시 찾기도 하고,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야 어릴 때 보지 못한 숨겨진 의미가 보이기도 하지요."  (p.6 'Prologue' 중에서)


문화 콘텐츠 기획자이자 전문작가인 이서희의 저서 <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를 읽다 보면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나 그리움, 일종의 상실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과거 회귀를 경험하게 된다. 어릴 적 즐겨 보았던 애니메이션의 유명 대사와 지금 시점에서 저자가 깨닫게 된 어떤 삶의 지혜나 지점들. 책에는 우리가 한 번쯤 보았음직한 12편의 애니메이션 작품이 등장한다. '이웃집 토토로'를 비롯하여 '포켓몬스터', '도라에몽', '벼랑 위의 포뇨', '너의 이름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라따뚜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스즈메의 문단속', '겨울왕국', '슬램덩크'가 그것이다. 어쩌면 제목만 들어도 그 시절에 보았던 영상들이 슬라이드처럼 흘러갈지도 모르겠다.


"sentence 111

Here, here. You are lucky. The heart wasn't attacked. The heart is not so easily changed. But the head can be persuaded. I recommend erasing all magic-related memories. I'll make sure that the memories related to magic are safe. But don't worry. I'll leave the fun she willbe okay.

여기, 여기 눕히세요. 운이 좋았네요. 안나의 심장을 공격한 것은 아니에요. 심장은 쉽게 변하지 않아요. 하지만 머리는 변하기가 쉽죠. 저는 마법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우길 추천합니다. 마법과 관련된 추억들은 안전해지도록 할게요.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세요. 좋았던 순간들은 남겨둘 테니까요. 안나는 괜찮을 겁니다."  (p.168~p.169)


나 역시 과거에 내가 잃어버렸던 어떤 것들로 인해 깊은 상실감에 매몰될 때가 많은 까닭에 주변의 다른 누군가에게 상실감을 만회하기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쓸데없이 소진하지 말라는 충고는 감히 하지 못한다. 사실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효과적으로, 혹은 유익하게 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게 주어진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내는 방법이겠지만 우리는 시시때때로 과거라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그 시절에 자신이 잃었던 어떤 대상이나 경험을 보충하거나 만회하기 위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고집스럽게 추진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DNA 분석에 기초한 인간의 자연 수명이 약 38세라는 주장에 눈길이 쏠리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은 보너스처럼 주어진 38세 이후의 시간 동안 자신이 잃었던 어떤 것들을 만회하고자 노력하는 반쪽짜리 삶을 살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라는 주제가 담긴 『겨울왕국』에는 자매의 가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보통 부모와 자녀의 관계나 성애적 사랑을 다루는 다른 작품들과 차별되는 점이죠. 그리고 엘사는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하며 숨기려고 하지만, 결국 이를 받아들이고 자아를 수용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p.183)


장마가 잠시 쉬어가는 요 며칠, 날씨는 무덥고 불쾌지수는 끝 간데없이 치솟았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과거에 잃어버렸던 어떤 것에 끝없이 집착하면서 상실감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성숙하지 못한 까닭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철이 들지 않는 까닭에 인생의 많은 시간 동안 상실감을 부여잡은 채 헛된 시간을 흘려보내고 마는 가엾은 존재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 부인이 보이는 작금의 행태를 십분 이해한다. 그리고 그를 가엾게 여긴다. 나 역시 그런 부류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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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비로 인한 큰 피해만 없다면 비 내리는 풍경은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이런 날이면 평평한 듯 보였던 학교 운동장에도 낮은 골을 따라 흐르는 여러 갈래의 물길이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그려 놓은 듯 멋진 풍경을 연출하곤 합니다. 그렇게 각각 흩어져서 흐르던 물길도 수로를 만나 하나가 되어 흘러갑니다.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 이웃들의 마음도 비 내리는 날의 물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듯합니다. 각각의 방향으로 흐르던 '마음길'이 오늘처럼 깊은 우울이 내려앉는 날이면 비슷한 마음결로 모여 하나의 길을 내고 어느새 더 큰 '마음길'이 되어 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공감(共感)'이라 불렀습니다. 무너진 논두렁을 손보기 위해 집을 나섰던 사람도, 봇도랑으로 콸콸 넘치는 물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사람도 종래에는 결국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서로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마음길'은 예전처럼 길게 흐르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만나 더 큰 '마음길'이 되고, 종래에는 내를 이루고 도도하게 흐르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목도하기 힘든, 극히 드문 경우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이 낮은 골을 따라 흐르다가 어느 순간 멈추어버려 더이상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와 당신의 마음이 두물머리에서 만나 하나가 되어 흐르는 일은 더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흐르는 데도 인내력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의 힘줄, '인내력'에서 힘 력(力)자를 잃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체력이 약해진 현대인들은 어떤 일에 대해 파르르 분노하다가도 어느 순간 쉽게 풀어지곤 합니다. 나의 마음이 닿기도 전에 당신의 마음길이 닫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나와 당신은 '공감'이라는 마음의 광장에서 만나 내를 이루거나 강이 되어 흐를 수는 없겠습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나는 베란다 창문에 어린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냥 고르게만 보이는 유리창에도 우리가 모르는 높낮이가 존재하는지 창에 부딪히는 빗물은 일정한 길을 따라 꾸불꾸불 고집스럽게 흘러내립니다. 빗소리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우리에게 큰 피해만 없다면 비 내리는 풍경은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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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오징어 - 독서의 탄생부터 난독증까지, 책 읽는 뇌에 관한 모든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이희수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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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던 아들은 휴학을 하고 얼마 전에 군인이 되었다. 물론 아직은 훈련병 신분이지만 말이다. '까꿍' 놀이를 좋아하던 아들이 어느새 자라 군에 입대를 한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20여 년의 세월이 무성영화의 필름처럼 빠르게 감긴 느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들은 순하고 명랑한 아이였다. 그러나 심하지는 않았지만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았던 아들의 건강에 대해 예민할 정도로 신경을 썼던 아내는 가뜩이나 약했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아들의 먹거리와 위생에 온 힘을 쏟았다. 달리 도와줄 게 없었던 나는 하루 건너 한 번씩 아들을 데리고 잤다. 나와 함께 자는 날이면 아들은 늘 <사과가 쿵>이나 <마녀 위니>를 들고 와서 내게 읽어 달라곤 했다. 다 읽고 나면 다시 제일 첫 페이지를 펴서 다시, 금세 또 다 읽으면 다시 첫 페이지를... 나는 그렇게 책 읽기 개미지옥에 빠져 벗어나지 못했다.


"동화를 들으면서 감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동시에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기 시작할 무렵, 이번에는 보다 인지적인 차원의 통찰이 떠오른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책 속에는 마치 그림처럼 늘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길고 짧은 단어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진적인 지적 발견을 시작으로 아이는 책에는 고유한 언어가 있다는 보다 넓고 암묵적인 발견에 도달하게 된다."  (p.166)


지금도 나는 아들이 어떻게 읽고 쓰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언젠가 집에 놀러 오셨던 수녀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써보겠노라며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위해 바들바들 떨며 글자를 써 내려가던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들은 그렇게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익혔고, 차를 타고 가면서도 도로 주변의 도로 표지판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주차 금지'라는 말을 들었던 할아버지가 '금지'가 무슨 뜻이냐? 고 물었을 때, 아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작은 두 손을 X자로 겹쳐 주차하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말하였다. 어린 아들의 설명을 듣고 대견해하시던 할아버지는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인지신경학자이자 아동발달학자인 매리언 울프의 저서 <프루스트와 오징어>를 읽는 내내 나는 아들의 성장 과정을 떠올렸다. 1부 '뇌는 어떻게 글을 읽게 되었을까', 2부 '뇌가 독서를 배우는 방법', 3부 '뇌가 독서를 배우지 못할 때' 등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인류가 독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문화를 창조하며, 대를 이어 정보를 전달하는 등 인류의 독보적이면서 경이로운 독서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설명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독서의 과정이 먼저 글자를 시각적으로 인지하고, 뇌가 그 정보를 처리하고, 그것을 우리의 기억과 연결시키고, 그렇게 누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지혜를 얻게 된다. 독서는 이처럼 경이로운 과정이라는 사실을 저자인 매리언 울프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들의 성장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독서가 아들의 성장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주말마다 했던 대형서점으로의 나들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던 아들, 유학 한 번 다녀온 적 없고 과외 한 번 시킨 적 없는 아들이 스스로 공부하여 토익 만점을 받는 기적과도 같은 성취를 보여주었던 이면에는 어쩌면 '독서'라는 비밀 병기가 숨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난독증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세계적인 읽기 연구자인 저자가 난독증에 걸린 아들을 키우게 되었다는 건 하나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이유로 난독증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토머스 에디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창의적인 천재들에게도 자주 발견되는 것을 보면 독서는 타고난 능력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학의 관점에서 난독증 연구는 빠른 속도로 헤엄치지 못하는 새끼 오징어를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오징어가 가진 약간 별난 회로를 들여다보면 헤엄을 잘 치기 위해 필요한 것과 그 오징어가 다른 오징어들처럼 헤엄치지 않아도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독특한 재능에 대해 알 수 있다."  (p.57~p.58)


인류는 지금 디지털 대 전환기의 시기에 직면해 있다. 소크라테스가 독서에 대해 염려했던 것처럼 독서에 익숙한 우리들 역시 동영상 매체를 탐닉하는 다음 세대의 행동 양식을 비판한다. 그러나 문자 언어가 아닌 다른 형태의 언어를 통해서도 독서하는 뇌의 발달은 지속될 것이다.


"'초월적 사고를 하는 시간'이라는 이 신비한 무형적 산물이 바로 독서하는 뇌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다. 몇 밀리세컨드에 불과한 이 내재적 시간이 지식을 발전시키고 덕에 대해 사색하고 단 한 번도 표현되지 않았던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발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된 말은 다시 새로운 도약대를 만든다. 그러면 인간은 그것을 딛고 심연으로 돌진해 들어갈 수도, 창공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다."  (p.389)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요즘, 자리에 앉아 진득하게 책을 읽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러나 매리언 울프가 설명하는 인류가 독서 능력을 취득하게 되는 흥미진진한 과정을 책으로 읽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훌쩍 흘러가게 된다. 별도의 피서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책을 읽고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이 시간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얼마나 귀중하고 값진 기회인가. 매리언 울프는 우리에게 그런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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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자맥질을 하듯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던 비는 새벽이 되어서야 멈췄다. 하염없는 빗소리와 함께 까무룩 선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하던 나도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렇게 잠을 설친 다음날이면 오랫동안 방치한 낡은 기계를 돌리듯 이곳저곳이 끽끽 소리를 내며 성치 않은 티를 내는 것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빗발이 잦아든 휴일 오전의 대기는 텁텁하다.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을 어제 받았다. 작가의 소설을 두어 권쯤 읽어본 게 다인 나로서는 백수린 작가에 대한 이렇다 할 정보를 가진 게 없다. 책을 펼쳐서 한두 꼭지의 산문을 읽어보았다. 길지 않은 각각의 글들은 작가의 일상과 음식, 과거에 읽었던 한 권의 책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글에서 언뜻언듯 드러나는 다정함의 온기들. 글이란 어쩌면 자신의 생각을 문자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통해 자신의 체온 속으로 누군가의 느낌이 스며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눅눅했던 대기가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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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결. 나는 그 공기 알갱이 사이사이로 스며든 물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다 헤아릴 수 있을 듯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려니 흘려보냈을 일이지만 오늘 남쪽에서 불어와 볼을 스쳐가는 바람은 그 습습한 기운으로 인해 장맛비에 대한 걱정을 한껏 끌어올렸던 것입니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쓴 <해변의 묘지> 마지막 연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바람이 불고 장맛비가 세차게 내린다고 할지라도 '살아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시 세워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 올라온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 요청에 관한 청원'에 58만 명 이상의 국민이 동의한 듯합니다. 오죽하면 대기인원이 몰리는 바람에 접속지연 사태까지 벌어졌겠습니까.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지만 넋 놓고 앉아있기보다는 다시 한번 힘을 내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국민들이 적어도 58만 명 이상이나 된다는 의미일 테지요.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에 등장한 윤 대통령의 말이 언론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2022년 12월 5일 윤 대통령과의 국가조찬기도회 독대 상황에서 대통령이 10.29 참사가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정권은 무능함을 넘어 사악하기까지 한, 정말로 더이상 존재해서는 안 될 무도한 정권임을 증명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채 해병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에도 소극적이거나 앞장서서 방해하려는 행태를 보면 현 정권이 결코 국민 편에 있지 않다는 걸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현 정권의 조세정책만 보더라도 그 뻔뻔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부 계층에게만 해당이 되는 상속세율 인하를 말하기 전에 전 국민에게 혜택이 가는 소득세 조정을 먼저 말했을 듯합니다. 예컨대 소득세율을  이만큼 인하할 테니 상속세도 이 정도로 조정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묻는 게 순서 아닐까요? 금투세도 다르지 않습니다. 금투세 대상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세금입니다. 그렇다면 주식투자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 거래세를 없앨 테니 금투세도 없애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는 게 마땅한 순서이겠지요. 그러나 국민을 개, 돼지로 취급하는 현 정부는 그와 같은 말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정부 재정의 원천인 세금이 하나의 세목에서 줄어든다면 반드시 다른 세목에서 늘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속세가 줄어들면 소득세든 부가세든 조세 저항이 심하지 않은 세목에서 늘려야 하는 게 당연한 결과이겠지요. 부가세 인상을 들먹이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다 알다시피 부가세는 간접세인 까닭에 조세저항이 심하지 않으니까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나는 그 공기 알갱이들에 스며든 아주 작은 물방울들의 개수를 모두 헤아릴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장마와 맞서 싸우고, 뒤이어 다가오는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를 이겨내면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소슬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의 입구에 서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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