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볼라벤'이 언론이나 정부가 요란을 떤 것에 비하면

조용히(?) 물러갔다는 느낌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사는 이곳에도 오늘 낮에는 제법 강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소나무를 보며

'아, 솔잎에도 앞뒤가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껏 활엽수의 넓은 나뭇잎만 앞뒤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

침엽수인 소나무의 잎도 그 색깔이며 표면이 앞과 뒤가 다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솔잎은 바람의 기세에 눌려서인지

잔뜩 움츠린 모습이 안돼 보이고

쓰러질듯 위태위태한 모습에 가슴을 졸였었다.

내가 더욱 놀랐던 것은 바람이 잠시 잦아들었을 때의

소나무 모습이었다.

푸르고 정정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한나절의 바람에 시달린 소나무는

마치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처럼

솔잎마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 나무도 고난을 겪으면 늙는구나!'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그렇게 흔들리면서 뿌리와 흙 사이에 공간이 생기고

나무는 지금보다 더 잘 자라겠지만

그 짧은 순간의 고통은 우리네 인간처럼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음을 잘 알 듯하다.

 

우리는 말이나 언어가 아닌,

우리들의 생각이나 느낌 또는 체험을 통하여

신과 소통하고 있음을 조금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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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 미술비평은 어떻게 거장 화가들을 능욕했는가?
로저 킴볼 지음, 이일환 옮김 / 베가북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대학시절, 미대에 다니던 친구 세 명과 함께 서울 방배동에서 겨울방학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단독주택의 차고를 개조하여 월세로 놓은 곳이니 난방이 될 리 없었고, 도로 쪽으로는 홑겹 유리 미닫이문이 셔터문 안쪽에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이면 문 틈새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지만 우리는 하나뿐인 연탄난로 주변에 모여 기타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들이키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곳이 마치 로마시대의 지하묘지처럼 음산하다며 '카타콤'이라고 불렀었다.

 

술도 못 마시고 전공도 전혀 달랐던 나는 물과 기름처럼 좀체 섞이지 못하였다.  그들로부터 가끔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안주감으로 라면을 끓여주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캔버스에서 살아나는 갖가지 형상들과 붓을 잡은 손의 유연한 움직임이 그저 신기한 듯 쳐다보는 재미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밤이 늦도록 이젤 앞에 앉아 골똘한 생각에 잠기곤 하던 그들과 달리 나는 밤이 깊었다 싶으면 으레 냉기가 도는 침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추위에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어준 후, 간신히 고양이 세수를 마치면 서둘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곤 했다. 

 

그때 같이 지내던 친구 중 한 명은 미술대학으로 유명한 H 대를 다니다가 1학년말 작품 전시회에 걸렸던 자신의 작품에 문제가 있어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고 이듬해 D 대학 천안 캠퍼스에 재입학 했었다.  당시 그는 전시회 작품으로 정부미 포대를 똑 같이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만 그리면 뭔가 밋밋한 느낌이 들어서 '정부미'를 '전부미'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전두환 정권이었던 당시의 사정은 예술이든, 언론이든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공안정국의 삼엄한 분위기는 예술작품이라고 해서 검열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친구는 그 바람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고, 교수님과 학교 당국에 호소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고 했다.  그림에 재능이 많았던 친구는 D대학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미술 관련 모 사단법인의 이사장이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사의 평가는 언제나 평론가와 그 시대의 권력자의 몫이었다.  당사자인 작가의 목소리는 언제나 무시되기 일쑤였고, 의식 있는 평론가의 항변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21세기인 지금도 통치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작품은 법의 잣대로, 또는 평론가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처벌되거나 불이익을 받는다.

 

이 책은 예술사에서 평론가의 부당한 해석을 작품을 예로 들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쿠르베, 마크 로스코, 사전트,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고갱, 반 고흐 등의 작품이 당시의 평론가에 의해 어떻게 평가받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일반 독자에게도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부당한 평론가는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는 언어 폭력범이 될 수도 있음이다.김태호 교수는 추천사에 이렇게 적고 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혹은 다른 예술의 영역이든, 당신이 에술을 '살기로'작정했다면 이 책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결의를 굳건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혹은 당신이 미학이나 예술사 혹은 예술평론에 뜻을 두고 있다면, 이 책에서 그 학문이나 활동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예술의 메인 이벤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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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 편향이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흥미있게 읽었던 분야는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그 중 하나는 심리학과 관련된 책들인데, 나는 사실 심리학을 그닥 신뢰하는 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심리(의식 또는 무의식)를 유형의 어떤 것으로 치환하려는 심리학자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이런 치기어린(?) 행동이 과학을 빙자한 말장난이나 언어적 유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더구나 정신분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에게 내재한 다양한 심리 중 몇몇을 부각시켜 도드라지게 함으로써 나와 같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그렇구나'하고 인정하게 만드는 것, 이미 존재하던 대륙을 콜럼버스가 발견하였다는 사실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대륙을 새로 창조한 것인 양 환호하는 모습과 하등 다를 게 없다고 본다.  대체로 약간의 허구가 가미된 문장이나 말은 강한 중독성을 내포하게 마련이어서 한번 맛을 들이면 좀체 벗어아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심리학을 하나의 실증적 과학처럼 믿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심리학은 화학반응처럼 수십 번 또는 수백 번의 실험을 통하여 얻어진 학설이나 이론도 아니요, 우리 앞에서 꼼짝 못하게 증명할 수 있는 이론도 아니다.  그럼에도 심리학자들이 심리학의 과학적 측면을 특히 강조함으로써 대중들의 신뢰를 쉽사리 확보하는 것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아마도 그들이 나쁜 맘을 먹고 사기를 친다면 그들의 술수에 걸려 들지 않을 사람이 없을 듯싶다.

 

그렇다고 내가 심리학을 무시하거나 거들떠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에 가깝다.  이처럼 심리학을 그닥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심리학 서적을 탐닉하는 나의 이율배반적 행태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어쩌면 나의 이러한 반응 이면에는 유아기부터 형성되어 온 방어기제 '회피'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삶에서 오는 고통이나 부조리한 삶의 흔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공간, 심리적 갈등과 공포로부터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여겼던 마음의 휴식처, 또는 어떤 상상도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안전지대로 나는 독서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려서부터 소설과 철학에 악다구니를 쓰듯 매달렸었다.  자라면서 소설과 철학은 조금 시큰둥해졌지만 심리학과 물리학 등 다른 분야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을 뿐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전문용어로 '회피'는 위험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 상황,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라고 한다.  부정적 감정으로부터의 도피, 그로부터 비롯된  삶의 의미에 대한 가치 절하, 삶의 열정을 먼 거리에서 바라보며 한없이 서성거리던 나의 청춘.  내 의식은 끝없는 상상의 세계에 중독되듯 이끌렸고, 그럴수록 더욱 독서에 빠져들었다.

 

정신분석이나 심리학 용어를 모른다고 삶을 모르는 것도 아니요, 내 삶의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닌데, 지금도 나는 한동안 책에 빠져들 때면 '회피'에 대하여 생각하곤 한다.  삶은 가슴으로 부딪칠 일이지 독서와 사색으로 멀리서 바라볼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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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에 일어나 평소처럼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잔뜩 흐린 날씨였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비가 오면 조금 맞지,뭐.'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우산도 없이 산을 올랐다.  등산로는 어제 내린 비로 여전히 미끄러웠다.

 

산의 정상 근처에 이르렀을 때부터  바람이 심상찮았다.

키 큰 교목의 우듬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솨,솨'하고 거세지는가 싶더니 그야말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목덜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얼마나 크던지 아픈 느낌마저 드는 것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옷은 속옷까지 흠뻑 젖었고 등산화도 이내 축축해졌다.  어찌나 거센 빗줄기던지 물보라가 하얗게 일고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이 잦아지면 내려갈 요량으로 운동기구 밑에서 잠시 동안 비를 피하였다.

하늘을 보니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아니었다.  어차피 젖은 몸.  다시 빗길로 들어서 하산을 서둘렀다.  잠깐 휘몰아친 비에 등산로는 금세 누런 흙탕물로 변했다.  비에 젖은 옷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자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간신히 산을 다 내려왔을 때에야 빗방울이 가늘어졌다.

 

오전 내내 재채기를 하다 점심을 먹고나서야 좋아졌다.

지금도 여전히 비가 내린다.  인간은 자연 앞에 아주 작은 존재임을 까맣게 잊고 살았나 보다.  인간의 오만함은 이 엄정한 자연의 섭리를 순간순간 잊게 한다.  일각이 여삼추 같다가도, 지나고 보면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건너뛴 것처럼 까맣게 잊혀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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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한 학생이 자신이 쓴 글을

보고 수정 좀 부탁한다기에 독후감이나

방학숙제려니 생각하고 '그러마'고 선선히 대답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들고 온 것은

자신이 쓴 '교사 추천서'였다.

대입 수시 지원에 필요한 서류라고 했다.

자기 소개서와 함께 교사 추천서가 필수라면서

자신이 직접 썼기 때문에 선생님이 쓴 것처럼 만들려면 

어른들 어투로 바꿔야 하는데 자신으로서는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껏해야 그 학생을 야자가 끝난 늦은 시각에

1시간 남짓 만나 공부를 도와주는 게 고작인데

더구나 많이 만나야 일주일에 두세 번인데

그 학생의 장단점을 세세히 알 리도 만무이고,

올 초에 처음 만났으니 고등학교 1,2학년 시기는

더더욱 알 길이 없다.

 

나는 그 학생의 교사 추천서를 고쳐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학생의 장래가 걸린 문제니 어쩔 수 없이

학생의 부탁을 들어줄밖에.

 

동네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고는 있지만

교사 추천서를 부탁받기는 처음인지라

인터넷에 혹시 예시문 같은 게 있을까 싶어 찾아 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이런 불법적(혹은 탈법적) 행위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올해부터 수시 지원이 6회로 제한되었다고는 하나

지원할 때마다 교사 추천서를 써줘야 하는 선생님들의 고충을

이해 못 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불합리하고

처리 불가능이면 상급기관(교육부가 되겠지만)에

따질 일이지 순진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소임을 떠넘기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선생님이란 자리가 어떤 것인가?

아이들을 바르게 자라도록 지도하는 위치가 아닌가?

선생님 스스로 아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학생이 쓴 교사 추천서를 읽으며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

그저 한심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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