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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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무슨 대작이 있겠습니까마는 몇 년째 준비하면서도 끝내 쓰지 못했던 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몇 달도 아닌 몇 년째. 남들이 들으면 내가 마치 신춘문예에 출품할 작품이라도 구상하고 있으려니 생각하겠지요. 부끄럽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책을 읽고 느꼈던 그 충만한 감동을, 그 순간의 내 솔직한 감정을, 언어 밖의 풍경으로 그려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허섭스레기와 같은 글을 몇 줄 쓰다가 지우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생각나서 또 쓰고 하기를 몇 년째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짝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마냥 쭈볏거리기만 하는 숫총각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작품 속 하나하나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의미를 되새기고, 부풀어 오른 감상에 젖어 확대해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름의 생각을 끄적거려보기도 했지만 낙서는 낙서로만 존재할 뿐 그것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 하나의 완성된 문장, 마음에 흡족한 글로 재탄생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글로 옮긴다는 게 어찌나 어려운 일이던지요. 거칠고 미욱한 나 자신을 탓해본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답답하고 속만 뒤집히는 것을요.

 

아무튼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마냥 시간만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어떻게든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겠다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무척이나 각별했던 책, <그리스 인 조르바>는 그런 책입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시절, 대학 캠퍼스를 오가며 짬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던 대학 시절, 힘든 사회 생활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지쳐갈 때마다 문득문득 생각나서 이곳저곳을 펼쳐 보곤 했던 멀지 않은 과거, 책을 붙들고 씨름을 하듯 처음부터 다시 읽었던 근래의 날들을 생각하면 나는 왠지 눈물이 솟을 것만 같습니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p.159)

 

위의 인용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풀리지 않는 화두 하나를 받아든 느낌이었죠. 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던 그 시기에 '산다는 게 말썽'이라는 한마디 말은 왜 나를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했던 것일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의 얼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관념에 사로잡힌 서른다섯 살의 젊은이와 순간순간의 삶을 사랑했던 예순다섯 살의 노인이 크레타 섬에서 펼치는 한 판의 춤사위, 관념과 실재가 어우러진 한 편의 서사시 정도로 해두어야 겠군요.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들이오." (p.86)

 

"부드럽게 비가 내리는 시각에 그 비가 내부의 슬픔을 일깨운다는 것은 얼마나 관능적으로 즐거운 일인가! 그럴 때면 의식의 심연에 숨어 있던 쓰디쓴 추억, 친구와의 이별, 사라져 버린 여자의 미소, 날개를 잃고 다시 구더기가 되어 버린 나방의(구더기는 내 심장으로 기어오르며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덧없는 희망 같은 쓰디쓴 추억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p.141)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삶의 본질을 꿰뚫는 나 나름의 시각을 배웠던 셈입니다. 한때 철학에 매료되어 현실적인 이상이나 꿈보다는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 도덕적 관념이나 불변하는 진리를 추구했던 나에게 있는 그대로의 삶을 열정적으로 붙잡으려 했던 조르바의 태도는 충격적이다 못해 말을 잃게 할 정도였습니다. 단지 인식의 차원에서 머물렀던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심장 가까이로 '쿵'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 번뿐인 삶이기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게 상식적으로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정을 쫓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보라." (p.209)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p.209)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은 후회를 양산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실재하지도 않는관념과 도덕에 얽매어 자신의 삶을 출구가 없는 한 귀퉁이로 몰고, 종국에는 손과 발을 옥죄어 엉뚱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p.415)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超人)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p.463)

 

너무나 이질적인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시간의 궤도를 달려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한의 영역으로 말입니다. 그 어둠의 영역에서 우리가 태어났고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인지, 무한광대의 우주 속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생명체가 뚝 떨어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사람이 살다간 핏방울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뿐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사랑했던 어느 자유인의 절규를 오래도록 기억할 뿐입니다.

 

"꺼져가는 불 가에 홀로 앉아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 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들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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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이 된 지인과 우연히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연단에 선 강사와 한 명의 방청객으로, 조명을 받는 연주자와 어둠 속에 묻힌 관객으로, 또는 TV 화면에 존재하는 출연자와 존재하지 않는 시청자로서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은 낯선 이의 방문처럼 어색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아닌 각자의 개별적인 영역에서 살아왔던 시간의 장막으로 인해 한때 우리가 알고 지냈던 과거 기억의 출현은 느닷없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치 뜨거운 감자가 손에 쥐어진 것처럼 우리를 한동안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대게 합니다.

 

그때의 어색함이란 부러움이나 흔히 있을 수 있는 시기나 질투의 느낌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개별적인 삶은 어떤 층위를 구분하여 규정되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단절된 시간에서 오는 생경한 느낌, 그렇다고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모호한 관계, 시간의 양적 변화를 어쩔 수 없이 확인해야 한다는 부담 등으로 인해 과거의 기억을 현재라는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배치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 뿐입니다.

 

찰나에 그친 눈빛 교환과 그것만으로도 서로를 확인하는 데 부족하지 않았던 감지, 그리고 어찌할 바 모르는 시선의 흔들림. '어떻게 지내냐?' 는 물음과 '그저 그렇지 뭐' 하는 대답은 어색함을 경감시켜보려 했던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간의 암전마저 더해져 서로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동안 이어지지 않았던 시간의 간극을 애써 메워보려 하지만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색한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려는 발길을 애써 붙잡으며 우리는 말합니다.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자." 그 '언제'는 허공에서만 맴돌 뿐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인사였음을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됩니다.

 

모임이 잦은 요즘, 거리에는 눈송이처럼 빈말만 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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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4-12-09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거 진짜 마지막 인사인 줄 알고 가슴 철썩했네요.

마지막 인사 아니죠? ^^

꼼쥐 2014-12-14 13:46   좋아요 0 | URL
그럴 리가요. ㅎ
가끔 블로그를 접고 싶었던 적이 있기는 했어요.
 
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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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느끼는 고독감은 그 속의 옅은 감미로움으로 인해 자기 도취에 이르는 실핏줄처럼 가는 숨구멍이 돼주곤 한다. 며칠 전 내려 녹다 만 잔설과 알싸한 추위가 마치 잘 조합된 피아노 협주곡처럼 겨울의 풍미를 더하는 휴일 아침에 나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를 읽었다. 작가의 섬세한 필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먼 이국의 어느 바닷가로 나를 안내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어느것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게 없지만 나는 유독 <체실 비치에서>를 좋아한다. 그것은 마치 내 젊은 시절의 벌거벗은 열정을, 인내와 절제로 갈무리되지 않았던 무모함의 실체를, 부풀 대로 부풀었던 자존심의 상흔을 하나하나 훑어내는 것만 같다. 솜이불 속에 박제된 여름날의 더위를 반추하는 것처럼. 나는 칼에 베인 듯 아팠을 젊은 시절의 사랑을, 그리고 실체가 없이 사라진 그 시간의 그림자를 하릴없이 좇고 있다.

 

소설은 스물두 살 동갑내기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매듭 삼아 이들 삶의 앞과 뒤를 조명한다. 로큰롤을 좋아하는 런던대 역사학도 에드워드와 현악 사중주단을 열정적으로 이끄는 왕립음악대학 학생 플로렌스는 그들이 자라온 환경만큼이나 다르지만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에드워드는 뇌손상을 입어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와 쌍둥이 여동생, 그리고 집안일과 직장일에 지쳐 있던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네 살에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어머니가 보통의 어머니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에드워드는 대학에 진학하여 집을 떠날 결심을 굳히고 공부에만 매진한다. 언제나 손님처럼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반면에 플로렌스는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와 대학교수 어머니를 둔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체면과 격식을 중시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플로렌스.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섹스 자체를 혐오한다. 상반된 환경에서 자라난 두 남녀는 각자 다른 이유로 서로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결혼에 이르지만 막상 신혼 첫날밤에 대한 두려움은 둘 사이에 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칠월 중순의 어느 날 그들은 체실 비치의 외딴 호텔에 있다. 남편과 아내의 자격으로.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일 년여의 연애 기간 동안 깊은 관게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 불만이었던 에드워드는 결혼이 “교구 목사의 축복까지 받은 음탕하고 유쾌한 벌거벗은 자유”라고 생각했지만, 플로렌스에게는 하나를 허락하면 또 다른 욕망을 갈구하는, 지속적인 압박 속에 가해지는 “끝없는 갈취”로만 여겨졌다.

 

소설은 두 사람의 감정 선을 따라 진행된다. 마치 세심한 연주자의 깊고 정확한 연주처럼. 소설의 무게중심은 에드워드보다는 플로렌스에게 있는 듯한데 여성의 심리를 어찌나 잘 묘사했던지 작가가 혹 여성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세밀하다. 섹스를 혐오하면서도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려 했던 플로렌스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에드워드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반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첫날밤만을 기다려왔던 에드워드는 아내와의 결합을 서두르다 결국 삽입도 하지 못한 채 플로렌스의 배 위에 사정을 하고 만다. 그 기분 나쁜 경험을 끔찍하게 생각했던 플로렌스는 에드워드를 방에 남겨둔 채 뛰쳐 나간다. 그리고 플로렌스의 행동을 지켜본 에드워드는 오히려 자신이 모독을 당했다고 느낀다.

 

이러한 과정의 심리 변화를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플로렌스를 찾아 나선 에드워드와 그를 피해 달아났던 플로렌스의 재회 장면이었다. 플로렌스는 자신의 감정과는 반대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마치 우리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엄마의 전화를 받으면서 퉁명스런 말투로 응대하는 것처럼. 자신의 불안 심리를 낮추기 위해, 또는 자신의 동기를 숨기기 위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욕구나 감정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심리학의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을 작가는 아주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해변에서 등을 돌리고 떠나는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려면서 그녀는 에드워드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그녀는 가방을 싸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결국 파경을 맞는다.

 

"그의 분노가 그녀 자신의 분노를 일깨웠고, 그녀는 갑자기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 예의발랐고, 너무 경직됐고, 너무 소심했고, 까치발을 든 채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부탁하고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침묵에 가까운, 사교적인 배려라는 담요가 그들을 결속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리고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나저제나 의견 차이가 날까봐 두려워했고, 이제 그의 분노가 그녀를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있었다." (p.174~p.175)

 

플로렌스와 헤어진 에드워드는 백발의 통통한 노인네가 될 때까지 “반쯤 잠든 상태”에서 살다가, 그제서야 그들 사이에 필요했던 게 ‘사랑과 인내’였음을 깨닫는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성인이 된 에드워드와 어렸을 때의 나쁜 기억을 품은 채 체면과 격식을 따지는 엄격한 환경에서 자의식 강한 여성으로 성장한 플로렌스는 어쩌면 자신이 갖지 못한 모습을 서로에게서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의 결합은 로큰롤과 클래식의 결합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이었을 게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p.197)

 

나는 지난 여름의 달뜬 열기가 생각날 때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를 떠올리곤 한다. 인내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대지에 내리 쬐던 뜨거운 열기도 이 겨울의 추위 속에서는 한낱 한줌의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체실 비치의 자글거리는 몽돌 소리와 함께 환청처럼 되새기고 있다. 한겨울에 읽는 <체실 비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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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9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4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종종 '책잠'에 빠져들곤 했는데 이런 나를 두고 형이나 누나들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 말하자면 내가 힘든 일을 피하기 위해 짐짓 못 들은 체 한다는 거였다. 예컨대 아주 추운 날 연탄을 날라야 한다거나, 샘에서 물을 길어와야 한다거나,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야 한다거나 할 때면 나를 아무리 불러도 못 들은 체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책잠'에 빠져 있어서 듣지 못했노라고 해명하곤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정말 일단 책을 잡기만 하면 마치 가수면 상태로 진입한 것처럼 책에 빠져들곤 했었다. 나는 그것을 '책잠'이라 부르곤 했는데, 형이나 누나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일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핑곗거리 내지는 변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큰 소리로 불렀는데 듣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그러나 나는 정말 책에서 깜박 '깨어났'을 때 현실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잠시 동안 어리둥절하곤 했었다.

 

내 방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탓에 '책잠'에 한껏 빠져둘고 싶은 날이면 형과 누나의 눈을 피해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곤 했었다. 곰팡내 지독한 광이나 외양간으로. 나는 그곳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책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따금 진짜로 잠이 든 적도 없지 않았으므로 그럴 때마다 형과 누나는 나를 찾아 헤맨 적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이제 나는 '책잠'에 빠지지 않는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를 보며 짬짬이 읽는 독서가 그렇게 될 리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한동안 길들여져 온전히 책에 집중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쩌면 책이라는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단조롭고 안전한, 때로는 평화롭고 푸근한 느낌에 한껏 취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아들과 함께 서점에 들러 책을 읽을라치면 아들을 통해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책에 흠벅 취한 아들은 혼자 킬킬대기도 하고, 인상을 쓰기도 하고, 조용히 미소짓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아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책잠'에서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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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 피터 - 인생을 바꾸는 목적의 힘
호아킴 데 포사다.데이비드 S. 림 지음, 최승언 옮김 / 마시멜로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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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으면 넓을수록 풍요롭고 만족한 인생을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멀마 전 고등학생 때 만나 지금껏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스님으로서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죠. 속세와 동떨어진 작은 암자에 기거하며 단식과 좌선으로 일관하셨으니 이제는 적당히 사셔도 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아무튼 저는 어떤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곤 합니다. 한번 그렇게 휑하니 다녀오면 마음도 몸도 한결 가벼워지곤 합니다.

 

스님은 그런 저를 보고 이따금 농담삼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신부를 찾아갈 일이지 왜 애먼 중을 찾아 오느냐고 말이죠.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종교를 떠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한결 편한 걸요. 차를 타고 서너 시간을 가서 다시 산길을 두어 시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니 제가 사는 곳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저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죠.

 

이번에는 특별히 당부하실 말이 있었던지 스님이 먼저 청하셨습니다. 드문 일이죠.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는 게 도리이겠으나 세상에 매인 몸이 어디 그리 쉽게 떠날 수 있습니까. 이 핑계 저 핑계로 한참 뜸을 들이다가 간신히 시간을 내어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스님을 뵐 때면 으레 밀렸던 이야기가 늘어지는지라 보통은 하룻밤 신세를 질 각오를 하고 떠납니다. 스님과 하루 반나절 나누었던 대화를 이곳에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이번 산행에서 깊이 새기게 된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나와 죽음과의 거리에 있어. 죽음과의 거리란 시간상의 거리가 아니라 마음 속의 거리를 의미하지. 가령 내일 죽을 사람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과의 거리가 한없이 멀 테고, 죽을 날이 사오십 년 남은 사람도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고 맏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죽음이 지척으로 가까운 법이지. 어차피 죽음이란 순리이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명확히 인식하는 순간, 그 사람의 시야는 온 우주를 품을 듯이 넓어지는 게야. 생각해 봐. 어차피 죽는 마당에 욕심낼 게 뭐가 있겠어? 그제서야 나를 잊게 되고, 가족이 보이고, 이웃이 보이고, 우주가 보이는 법이지. 천지개벽이라고나 할까? 하여, 죽음 직전에라도 자신의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겠지. 대개는 내일도 오늘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지금 당장 죽어 나자빠지는 사람이 허다하니까."

 

결국 스님의 말씀은 '죽음과의 거리'를 좁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상으로가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서 말입니다. 나의 성공, 나의 가족, 나의 건강 등 오직 나에게만 집중되었던 시각을 이웃과 사회, 혹은 전 인류를 향해 시야를 넓히려면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더구나 젊은 나이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을 듯합니다.

 

저는 자기 계발서로 분류되는 책을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스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책으로 <난쟁이 피터>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저도 책을 읽는 내내 몇 번이나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려야 했으니까요. 책의 주인공인 피터는 얼굴도 못생기고 키도 작은 아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학교에서는 늘 놀림과 따돌림의 대상이었구요. 게다가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극적인 반전을 노린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말입니다. 피터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의 막노동꾼이었고, 폭력을 일삼기도 했었죠. 불쌍한 피터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머니가 유일했습니다.

 

그러나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피터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던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죽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와 둘만 남은 피터에게 불행은 또 다시 닥쳐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피터의 아버지를 이웃이 신고한 것이지요. 아버지마저 요양원으로 보내지자 피터는 가출을 합니다.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던 그는 어느 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길이 보이지 않는 외로운 사막에서도, 파도가 무섭게 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도 별빛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두려움을 이겨냈대. 그래서 별빛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꿈이 되고, 사랑이 되는 거야. 피터, 살다 보면 정말정말 힘들 때가 있을 거야. 이 엄마조차 도움을 줄 수 없는 때..., 그때는 별을 한번 쳐다봐. 나의 목적이 뭔가를 생각하고 방향을 확인하는 거지. 그런 다음에는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는 거야." (p.46)

 

집에서 갖고 나왔던 돈도 떨어지자 피터는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고, 신원도 불확실한 그로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 그는 택시 회사에 취직을 합니다. 알선료를 지불하면서 어렵게 만든 자리였죠. 택시기사를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피터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일등공신은 단연 크리스틴 선생님이었죠. 피터의 어머니가 죽은 후 가출한 피터를 찾기 위해 노숙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할 정도로 애정을 보이셨던 분이니까요. 크리스틴 선생님을 통하여 여자친구도 사귀게 됩니다.피터의 택시를 탔던 승객 중에는 무료진료 봉사를 하는 소아마비 의사도 있었습니다. 그는 피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사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누며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욕심부릴 때 세상은 한없이 불공평해 보이죠. 왜냐하면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분명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내 것을 먼저 나누고,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면 세상은 공평하게 보입니다. 어디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죠." (p.109)

 

피터의 인생에 멘토 역할을 한 사람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노숙자들을 돌보는 알렉스 경, 같은 택시기사이면서 형 동생으로 지냈던 가브리엘, 하버드 법학대학원 교수인 프랭크, 피터의 곁을 지키며 응원을 해주었던 여자친구 미셀 등이 대표적입니다. 불행한 환경이었지만 그의 곁을 지켜주던 많은 멘토가 있었기에 피터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워너 교수의 '회복 탄력성'이 생각나더군요. 피터는 야간 대학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물론 택시기사를 하면서 말이죠. 그후 프랭크 교수의 도움으로 하버드 법학대학원도 마치게 됩니다. 노숙자에서 변호사가 된 신화를 쓴 셈이죠. 그는 교수로 남는 게 어떠냐는 프랭크 교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겠다며 뉴욕의 거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비록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고등학교에서 연설도 하게 됩니다.

 

"저를 바꾼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목적의 힘'이었습니다. 그 힘은 나(ME)를 뒤집어 우리(WE)를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가난은 참 많은 면에서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인생을 좌우할 만한 결정적인 변수는 되지 못합니다. 신체적 결함 또는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시련 같은 불가항력적인 고난 역시 우리 삶을 멈추게 할 정도로 중요한 요인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목적이 없다면 삶은 확실하게 엉망이 됩니다." (p.245)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죽음과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지요? 혹시 영원처럼 먼 거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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