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엊그제 아침나절에는 언뜻언뜻 햇빛이 비추는데 생선 비늘 같이 마른 눈이 내렸다. 무게도 없이 떠다니는 가는 눈발을 보면 왠지 모를 처연한 느낌이 들곤 한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는 실체는 언제나 쓸쓸하다. 나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를 손에 쥐고 실체도 불분명한 마른 눈발을 하염없는 시선으로 좇고 있었다.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없는 인생의 한낮처럼 소설의 시작은 가벼웠다.

 

탈리스 가의 장녀인 세실리아에게는 병약한 어머니와 고위직 공무원인 아버지, 은행원인 오빠와 소설가를 꿈꾸는 열세 살의 어린 여동생이 있다. 그리고 가족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한 로비 터너가 있다. 그는 탈리스 가의 파출부인 그레이스 터너의 아들이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다시 의대 입학을 준비하고 있던 로비 터너에 대한 세실리아의 감정은 미묘하다. 가족처럼 함께 뒹굴며 성장했던 로비가 남자로 느껴지는 한편 그녀와 로비 사이의 계급적 거리감과 가족적인 친밀감을 끝내 떨쳐버릴 수도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오후, 세실리아는 정원 손질을 하던 로비와 정원의 분수대 앞에서 마주친다. 그 동안 쌓인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감정이 폭발한 세실리아는 로비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분수대로 뛰어들고, 건물 위층 창가에서는 상상력 풍부한 어린 브리오니가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세실리아의 오빠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은 로비는 세실리아에게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의 편지를 쓴다. 몇 번을 고치고 다시 썼으나 결국 봉투에 담긴 것은 그가 장난삼아 썼던 버려진 편지였다. 시간에 쫓겼기 때문이다. 로비는 길에서 만난 브리오니에게 그 편지를 언니인 세실리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브리오니는 언니의 편지를 허락도 없이 열어서는 먼저 읽는다. 그리고 로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순화되지 않은 표현에 적잖이 놀란다.

 

편지가 잘못 담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로비는 몹시 걱정한다. 그러나 로비의 걱정과는 달리 그 편지로 인해 세실리아는 오히려 자신과 로비의 진심을 확인하게 된다. 세실리아의 아버지 잭 탈리스의 서재에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의 모습이 브리오니에게 또 다시 목격된다. 탈리스 가에는 이혼한 이모의 아이들이 와 있다. 열다섯 살의 롤라와 쌍둥이 동생이. 철부지인 쌍둥이 형제가 편지를 써놓고 가출을 하는 바람에 저녁 식사 자리는 엉망이 된다. 다들 쌍둥이를 찾아 집을 나서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만 같았던 세실리아와 로비의 관계에도 불행이 찾아든다.

 

동생을 찾아나섰던 롤라가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자 그날 로비의 행동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던 브리오니는 로비를 강간범으로 지목한다. 그것은 순전히 브리오니의 상상에 의한 진술이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의대 진학을 꿈꾸던 로비는 강간범으로 수감되고 로비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세실리아의 운명도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소설의 1부와는 다르게 2부의 시작은 무겁다.

 

"공포에 떨 일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밀려와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공포는 예상치도 못했던 작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p.269)

 

강간 혐의로 복역하는 동안 로비의 유일한 여성 면회자는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 터너였다. 세실리아는 가족 모두와 의절하고 간호사가 된다. 간호사를 준비하던 세실리아는 감옥에 있는 로비에게 많은 편지를 보낸다. 로비와 세실리아를 지탱하는 힘은 추억이었다. 이후 로비는 군에 징집되어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전쟁터로 보내진다. 작가 자신이 뒤에서 쓰고 있지만 이언 매큐언은 1940년 당시의 여러 문서와 책을 참고하여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합군이 마지노 선에서 퇴각하여 됭케르크까지 철수하는 아비규환의 상황과 폭격의 공포, 본국으로 떠날 배가 없어서 절망에 처한 병사들이 저지르는 집단적 폭력이 그려진다.

 

3부에서는 수련 간호사가 된 브리오니의 일상으로 시작된다. 안락한 가정환경을 버리고 간호사로 자원한 브리오니는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돌보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려 애쓴다. 롤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강간하고 그 모든 비극을 몰고 왔던 장본인인 폴 마셜과 결혼식을 올리고, 브리오니는 자신의 잘못을 빌고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언니인 세실리아를 찾아간다. 그 여름밤의 사건 이후 집을 나가 브리오니보다 먼저 간호사로 일하고 있있던 언니의 하숙집에서 브리오니는 뜻밖에도 로비와 마주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질렀던 그 엄청난 잘못과 전쟁의 참화도 두 사람을 결코 갈라놓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한편으로 안도하며, 또 한편으로는 쓸쓸한 마음으로 런던에 돌아온다.

 

"참으로 평온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약간 슬프긴 했다. 실망해서일까?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느낌은 향수에 가까웠다. 그리워할 집도 없는데 그리움이 일었다. 언니를 떠나는 것이 슬펐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언니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비와 함께 있는 언니였다. 그들의 사랑이었다. 브리오니도 전쟁도 그들의 사랑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이 사실이 도시 아래로 더 깊숙이 가라앉고 있는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p.490~p.491)

 

 

소설의 반전은 마지막에 있었다. 소설 속의 브리오니는 더이상 브리오니가 아닌 '나'로 변한다. 사실은 로비가 1940년에 패혈증으로 죽고 같은 해에 세실리아는 폭격으로 죽었었다. 그리고 '나', 즉 소설 속 브리오니는 그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는 전쟁박물관 문서보관소에 있었다.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는 '나'는 속죄의 의미로 행복한 결말의 소설을 썼을 뿐이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p.521)

 

별것도 아닌 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오늘의 날씨처럼 말이다. 오전 내내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더니 오후가 되자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도 날씨려니와 오후의 갑작스러운 햇살이 나로 하여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토록 했다. 기대보다는 의무가 더 크게 느껴지는 시기가 되면, 혹은 느슨해진 손아귀에서 자신의 삶이 스르르 미끄러지고 있음을 느끼는 나이가 되면, 별것도 아닌 인생이라 여겼던 젊은 날의 오만이 슬몃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인생의 팔 할은 별것도 아닌 일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별것도 아닌 일들이 오해를 낳고, 점점 부풀려지고, 어느 날 펑하고 터져버리는 순간 우리는 겨자씨보다도 작았던 별것도 아닌 그 일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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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빚에 허덕이는 서민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려는 정부의 노력이 눈물겹도록 가상하다. 진심이다. 다사다난했던 2014년을 뒤돌아 볼 때 대한민국의 국민들 대부분은 웃을 일보다는 슬퍼하거나 화낼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인지 정부에서는 블록버스터급 코미디 두 편을 선보였다.

 

그 하나는 '정윤회 문건에 얽힌 비화(가제)'이다. 이미 검찰의 수사도 마무리 단계이고 저간의 의혹도 대부분 덮인 상황이지만 국민들도 대부분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었을 줄 안다. 정부와 검찰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압권이었던 것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비서실에서 근무했던 박모 경정이 정말, 아주 정말 할 일이 없고 무료해서 '찌라시'와 같은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근무하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표해야만 한다. 나도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 자리가 그렇게 무료하고 할 일이 없는 직책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다리가 배배 꼬일 정도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박모 경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보고서 형식을 빌어 소설 한 편을 완성했던 것이다. 다 함께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그의 상사와 청와대 관계자들도 박 경정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그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일부 관계자들만 즐긴다는 건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들로서 있을 수 없는 일, 언론을 통하여 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은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들(정윤회, 박지만 등)을 불러 검찰청에서 차도 한 잔씩 대접함이 마땅하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던 듯하다. 그나저나 박 경정은 이제 대한민국 작가협회 정식 회원으로 등록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의 코미디극은 '대통령 당선 2주년 선물(가제)'이다. 알다시피 오늘은 박근혜 대통령이 당성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노고를 치하하고, 당선 2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409일 동안 준비했다고 한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선물을 대통령께 드린 셈이다. 그동안 박 경정이 쓴 소설과 되는 일 하나 없는 국가 운영에 속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졌을 텐데 늦게나마 여론과 언론의 압박으로부터 대통령의 숨통을 틔워준 일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찬조출연한 어버이 연합 등 보수단체의 멋진(?) 퍼포먼스도 있었다.

 

정말 웃을 일 없는 시기에 조금이라도 국민을 웃게 만들려는 국가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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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유난히 글이 잘 써지는 날이 있다. 미리 구상한 것도 아닌데 술술 풀려나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남에게 내놓고 자랑할 만큼 멋진 글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날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곰곰 되짚어 보게 된다. 좋은 꿈을 꾸었다거나, 뜻하지 않은 횡재가 있었다거나, 난데없는 칭찬을 들었다거나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 할 공통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여느 날보다 기분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책을 더 열심히 읽었던 것도 아닌데 미리 준비된 원고처럼 글이 쉽게 쓰이는 걸 보면 도통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쓰인 글에는 여지없이 많은 댓글이 달린다. 물론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읽으면 초등학생 수준의 글로 비춰질 게 뻔하지만 말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정말 고심하여 리뷰를 쓰는 경우도 있다. 몇 번씩이나 글을 수정하고 반복하여 읽어본 후 괜찮다 싶어 올린 글임에도 불구하고 평가는 냉담할 때가 있다. 어떤 칭찬이나 대가를 바라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어깨가 처지고 풀이 죽는다.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도 해보지만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게 없다. 기껏해야 짧은 리뷰나 일상에서 벌어지는 잡담 수준의 글을 쓰면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수정이나 퇴고도 없이 단숨에 써내려간 글에 댓글이 달리는 걸 보면 나름 신기할 때가 더러 있다. 모르긴 몰라도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은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모임도 잦고 밀린 일도 많다 보니 요즘은 이웃 블로거의 글도 읽어볼 시간이 없다. 미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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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4-12-1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서 읽다가 소리내서 웃었네요~ :)

꼼쥐 2014-12-19 14:26   좋아요 0 | URL
다들 비슷하신가 봐요. ㅎㅎ

2014-12-19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9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조선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서경식이 만난

조국의 미술과 미술가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20년,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또 다른 미술 순례기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저자로서 기억하게 된 것은 1993년 번역 출간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 덕분일 것이다. 이 책은 이제는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 거의 하나의 분야로 자리 잡은 ‘미술 기행’의 거의 첫 출발에 해당하는 책이었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판매되는 몇 안 되는 미술 기행기이기도 하다.

많은 독자들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통해 그림 읽기의 새롭고도 친근한 방법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조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형들(서승, 서준식)의 옥바라지를 하는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유럽의 다양한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은 지하실에 난 창문으로 겨우 들어오는 희박한 공기였다고, 저자는 그 책에서 기록한 바 있다. 예술이 역사와 현실과 삶과 독특하게 뒤섞이며 서로를 해석하거나 확장하는 놀라운 장면들이 그 책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번에 출간되는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서 저자는 이제 60대가 되어 유럽의 미술관이 아닌 한국의 미술관들을 순례한다.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이 집착했던 주제들, 죽음, 섹슈얼리티, 가족, 민족…… 같은 것들이 여전히 60대 재일조선인 노교수의 눈과 귀와 온갖 감각들을 사로잡고 날카로운 통찰들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과 삶의 변화를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 지점들 역시 드러난다.

가령 저자는 이제 홀로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작품과 고독하게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F와 함께 때로는 제자들과 함께 ‘조국’의 미술관을 찾는다. 그리고 정말로 원한다면 그 작품을 만든 작가들과 직접 한국어로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조국은 더 이상 그가 70년대에 보았던 군사독재 치하의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또 이제 형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조국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와 활동을 위해 찾게 되었다. 이렇듯 달라진 상황에서 저자는 20년 전, 30년 전 그림들 앞에서 던졌던 것과 똑같은 물음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이번에는 이 물음들에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이전에는 단순히 목격자에 머물 수 있었던 독자들을 이번 순례에는 더 깊이 동참시킨다. 위의 답을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20~30년 전의 그 순례와 지금의 이 순례의 미묘한 차이들을 읽어내는 것은 작가 자신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나 자신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이 된다.

한편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나란히 놓고 보는 일은 마치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나란히 걸린, 렘브란트의 34세 때와 63세 때의 자화상을 보는 일 같기도 하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삶의 질문, 궁극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갈구하는 그 빛나는 눈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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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간 - 분석심리학자가 말하는 미래 인간의 모든 것
이나미 지음 / 시공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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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성당에 가면 미사 중에 신자들끼리 평화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미사를 주재하는 신부님이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면, 신자들이 한 목소리로 '또한 사제와 함께' 한다. 그리고 양 옆과 앞뒤 좌석에 있는 신자들을 향해 서로 가벼운 목례를 하며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인사를 하게 되는데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든, 처음 본 사람이든 모두 그렇게 한다.

 

다소 엉뚱하지만 나는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고독을 빕니다.'로 해석하곤 한다. 상대방의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내 귀가 어두워서 그렇게 듣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귀가 어두워도 '평화'를 '고독'으로 알아들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나는 다만 평화와 고독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우리는 '평화'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위험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연대(連帶)'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평화가 지속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속력은 약해지게 마련이다. 새로운 관계의 추구나 기존 관계의 유지도 느슨해질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책의 제목은 <다음 인간>. 신경정신과 전문의이자 분석심리학자인 이미나의 신작이다. 딱히 관심이 가는 책도 아니었고, 그닥 재미있는 책도 아닌 듯하여 며칠 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랬더니 웬걸, 나에게 책을 준 분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나보고 다 읽었느냐 묻는 게 아닌가. 뜨끔했었다. 내가 우물쭈물 답변을 흐리자 재미있는 책인데 뭐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 타박 아닌 타박을 하셨다.

 

그날 저녁에 나는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는 단순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우리 인간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미래의 인간상인 '다음 인간'은 어떤 모습일지 추측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활상의 변화 또는 소비패턴의 변화 등 실생활과 밀접한 외부 환경의 변화를 추측하는 책은 많았지만 인간 내면의 변화를 예측하는 책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우리의 관심도 뒤떨어졌던 게 사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래의 인간상에 대해 다소 비관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요즘 청소년들의 행태만 보아도 충분히 그렇게 예측할 수 있지만 말이다. 예컨대 무감동과 타성에 젖은 사람들, 사이코패스, 관계의 해체, 감정이 부족한 R 세대의 출현,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전염병의 세계화 등을 예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인간상을 예측해 보고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신자유주의가 세습자본주의로 정착되면서 젊은이들은 패기를 잃었고 노인들은 여유를 잃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기 힘들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물론 정치나 경제의 구조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 구성원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p.15)

 

그러나 나는 위 대목에서 저자와 의견을 달리 한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제도나 시스템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물질적 풍요와 평화의 지속에서 오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삶에 대한 애착이나 결속의 필요성은 결핍이나 생명의 위협이 증가할 때 나타나는 인간 심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전쟁이나 기아, 범죄와 질병 등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들이 많았다. 이러한 문제는 개개인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 관계의 중요성, 사회 공동체나 국가 공동체를 통한 결속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에 따른 위험 요소의 감소는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편리를 가져다 준 반면 적극적인 인간 관계의 도모,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 가족 구성원과 국가 구성원에 대한 애정과 감사는 상대적으로 약해지게 된다. 필연적으로 말이다. 먹고 살 걱정이 없는데 굳이 일을 할 필요도 없고, 전쟁의 위협이 없는데 굳이 내 나라를 고집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미디어의 발전은 최소한의 인간 관계를 유지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다. 애써 노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죽음과 종교에 대한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저자는 종교의 쇠퇴와 종교인의 파산을 예측하면서 통합 종교의 출현도 예고하고 있다. 자살클럽의 증가와 잉여 살해를 돕는 비밀 조직의 등장도 말한다. 이것이 과연 사회 시스템이나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오히려 물질적 풍요, 평화의 지속에서 오는 삶의 '권태'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생명에 대한 위험 요소가 많을 때에는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지만 그러한 요소가 사라졌을 때는 오히려 삶은 따분하고 권태롭기만 한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참치를 잡으면 냉동 상태로 반입되지만 냉동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참치를 살려서 들여와야만 했다. 원양어선에서 잡은 참치를 국내에 반입할 때까지 더 많이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참치 수조에 상어 새끼 한 마리를 넣어 두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참치만 담아 왔을 때는 폐사율이 높았지만 천적을 한 마리 넣어 둠으로 해서 폐사율이 현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칠 수밖에 없었으므로.

 

"미래에 대한 비전은 안팎으로 곤경에 빠졌을 때 포기하려는 나를 격려해주고, 때로는 건강하게 타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시도해볼 수 있게 도와준다. 청사진을 갖고 씩씩하게 무언가를 시작했지만 도중에 크고 작은 실패에 좌절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싶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은 다시 한 번 자신을 추스리게 만든다. 이것이 이 책에서 미래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펼친 가장 중요한 이유다." (p.238)

 

요즘 아이들에게 결핍이나 생명의 위협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따금 지구의 어느 곳에서 내전이나 자연재해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사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개별적이고도 직접적인 죽음은 아니다. '살아야겠다' 또는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풍요와 평화가 인간의 내면을 심하게 부패시킨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평화를 빕니다'는 인사는 '고독을 빕니다'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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