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엊그제 아침나절에는 언뜻언뜻 햇빛이 비추는데 생선 비늘 같이 마른 눈이 내렸다. 무게도 없이 떠다니는 가는 눈발을 보면 왠지 모를 처연한 느낌이 들곤 한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는 실체는 언제나 쓸쓸하다. 나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를 손에 쥐고 실체도 불분명한 마른 눈발을 하염없는 시선으로 좇고 있었다.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없는 인생의 한낮처럼 소설의 시작은 가벼웠다.

 

탈리스 가의 장녀인 세실리아에게는 병약한 어머니와 고위직 공무원인 아버지, 은행원인 오빠와 소설가를 꿈꾸는 열세 살의 어린 여동생이 있다. 그리고 가족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한 로비 터너가 있다. 그는 탈리스 가의 파출부인 그레이스 터너의 아들이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다시 의대 입학을 준비하고 있던 로비 터너에 대한 세실리아의 감정은 미묘하다. 가족처럼 함께 뒹굴며 성장했던 로비가 남자로 느껴지는 한편 그녀와 로비 사이의 계급적 거리감과 가족적인 친밀감을 끝내 떨쳐버릴 수도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오후, 세실리아는 정원 손질을 하던 로비와 정원의 분수대 앞에서 마주친다. 그 동안 쌓인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감정이 폭발한 세실리아는 로비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분수대로 뛰어들고, 건물 위층 창가에서는 상상력 풍부한 어린 브리오니가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세실리아의 오빠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은 로비는 세실리아에게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의 편지를 쓴다. 몇 번을 고치고 다시 썼으나 결국 봉투에 담긴 것은 그가 장난삼아 썼던 버려진 편지였다. 시간에 쫓겼기 때문이다. 로비는 길에서 만난 브리오니에게 그 편지를 언니인 세실리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브리오니는 언니의 편지를 허락도 없이 열어서는 먼저 읽는다. 그리고 로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순화되지 않은 표현에 적잖이 놀란다.

 

편지가 잘못 담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로비는 몹시 걱정한다. 그러나 로비의 걱정과는 달리 그 편지로 인해 세실리아는 오히려 자신과 로비의 진심을 확인하게 된다. 세실리아의 아버지 잭 탈리스의 서재에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의 모습이 브리오니에게 또 다시 목격된다. 탈리스 가에는 이혼한 이모의 아이들이 와 있다. 열다섯 살의 롤라와 쌍둥이 동생이. 철부지인 쌍둥이 형제가 편지를 써놓고 가출을 하는 바람에 저녁 식사 자리는 엉망이 된다. 다들 쌍둥이를 찾아 집을 나서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만 같았던 세실리아와 로비의 관계에도 불행이 찾아든다.

 

동생을 찾아나섰던 롤라가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자 그날 로비의 행동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던 브리오니는 로비를 강간범으로 지목한다. 그것은 순전히 브리오니의 상상에 의한 진술이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의대 진학을 꿈꾸던 로비는 강간범으로 수감되고 로비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세실리아의 운명도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소설의 1부와는 다르게 2부의 시작은 무겁다.

 

"공포에 떨 일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밀려와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공포는 예상치도 못했던 작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p.269)

 

강간 혐의로 복역하는 동안 로비의 유일한 여성 면회자는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 터너였다. 세실리아는 가족 모두와 의절하고 간호사가 된다. 간호사를 준비하던 세실리아는 감옥에 있는 로비에게 많은 편지를 보낸다. 로비와 세실리아를 지탱하는 힘은 추억이었다. 이후 로비는 군에 징집되어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전쟁터로 보내진다. 작가 자신이 뒤에서 쓰고 있지만 이언 매큐언은 1940년 당시의 여러 문서와 책을 참고하여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합군이 마지노 선에서 퇴각하여 됭케르크까지 철수하는 아비규환의 상황과 폭격의 공포, 본국으로 떠날 배가 없어서 절망에 처한 병사들이 저지르는 집단적 폭력이 그려진다.

 

3부에서는 수련 간호사가 된 브리오니의 일상으로 시작된다. 안락한 가정환경을 버리고 간호사로 자원한 브리오니는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돌보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려 애쓴다. 롤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강간하고 그 모든 비극을 몰고 왔던 장본인인 폴 마셜과 결혼식을 올리고, 브리오니는 자신의 잘못을 빌고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언니인 세실리아를 찾아간다. 그 여름밤의 사건 이후 집을 나가 브리오니보다 먼저 간호사로 일하고 있있던 언니의 하숙집에서 브리오니는 뜻밖에도 로비와 마주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질렀던 그 엄청난 잘못과 전쟁의 참화도 두 사람을 결코 갈라놓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한편으로 안도하며, 또 한편으로는 쓸쓸한 마음으로 런던에 돌아온다.

 

"참으로 평온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약간 슬프긴 했다. 실망해서일까?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느낌은 향수에 가까웠다. 그리워할 집도 없는데 그리움이 일었다. 언니를 떠나는 것이 슬펐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언니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비와 함께 있는 언니였다. 그들의 사랑이었다. 브리오니도 전쟁도 그들의 사랑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이 사실이 도시 아래로 더 깊숙이 가라앉고 있는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p.490~p.491)

 

 

소설의 반전은 마지막에 있었다. 소설 속의 브리오니는 더이상 브리오니가 아닌 '나'로 변한다. 사실은 로비가 1940년에 패혈증으로 죽고 같은 해에 세실리아는 폭격으로 죽었었다. 그리고 '나', 즉 소설 속 브리오니는 그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는 전쟁박물관 문서보관소에 있었다.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는 '나'는 속죄의 의미로 행복한 결말의 소설을 썼을 뿐이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p.521)

 

별것도 아닌 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오늘의 날씨처럼 말이다. 오전 내내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더니 오후가 되자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도 날씨려니와 오후의 갑작스러운 햇살이 나로 하여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토록 했다. 기대보다는 의무가 더 크게 느껴지는 시기가 되면, 혹은 느슨해진 손아귀에서 자신의 삶이 스르르 미끄러지고 있음을 느끼는 나이가 되면, 별것도 아닌 인생이라 여겼던 젊은 날의 오만이 슬몃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인생의 팔 할은 별것도 아닌 일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별것도 아닌 일들이 오해를 낳고, 점점 부풀려지고, 어느 날 펑하고 터져버리는 순간 우리는 겨자씨보다도 작았던 별것도 아닌 그 일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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