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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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방금 읽은 책의 줄거리는커녕 주인공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머릿속은 성긴 부분이 점점 늘어만 가고 급기야는아무것도 없이 텅 빈 듯한 느낌, 무엇인가 떠올리기 위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가는 경험은 매번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책에서 받는 이러한 느낌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자 개개인의 개별적인 독서 경험 내지는 개개인의 정서적 반영에 의한 것이겠지요. 이를테면 나는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고 어떤 알맹이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오롯이 따뜻한 느낌만 받았더랬습니다. 마치 내가 공들여 책을 읽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한 번 진하게 껴안았던 것처럼 말이죠. 아,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군요. 책이 살아 있는 생명체도 아닌데 체온을 가졌을 리 만무하니까요. 아무튼 나는 책에서 받은 느낌이 다른 무엇보다 소중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 느낌이 금세라도 사라질까봐 서둘러 리뷰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은교 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잇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일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P.144)

 

소설의 배경이나 이야기의 뼈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말이지요.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이야기, 일어선 제 자신의 그림자를 쫓아 한참이나 따라간다는 이야기, 나는 예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은교와 무재가 기척도 없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를 목전에 둔 낡은 전자상가에서 근무합니다. 별다른 설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도심 속의 섬주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설은 자세한 묘사보다는 오히려 간결한 설명과 대사 위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은교와 무재가 나누는 대화는 어휘의 반복을 통한 운율감과 상징적인 특정 단어를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주인공의 심리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길게 이어지는 산문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의 서사시 호메로스나 일리아스를 읽는 것처럼 문장 하나하나에서 정제된 아름다움과 여백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은교 씨, 뭘 그렇게 걱정하나요, 너무 어두워서요, 밤이니까 어둡죠, 그게 아니고요, 너무 어두워서, 정말로 밝은 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요, 말은 안 되는데요 무재 씨, 자꾸자꾸 드네요, 그런 생각이, 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전방이 나루터임을 알리는 팻말의 반사광을 보았다." (P.163)

 

이상하게도 은교와 무재의 일상에서는 도시인의 맹목적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언제쯤 결혼을 하고, 얼만큼의 돈을 모아 어떤 집을 사고, 몇 명의 아이를 낳아 어떻게 키우겠다는 식의 흔한 목적의식 말이지요. 그들의 하루하루는 그저 물 흐르듯 그렇게 흘러갈 뿐입니다. 노래 가사 속 '콩밭 매는 아낙'의 처지가 안쓰러워 '칠갑산'을 차마 부를 수 없다는 무재와 그만큼이나 순수한 심성을 지닌 은교의 연애담은 얼핏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 따뜻합니다. 그러나 스러져가는 전자상가에서 생계를 꾸리고 있는 은교와 무재를 둘러싼 환경은 비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주인공의 따뜻한 심성과 냉혹한 도시 생태계의 비정함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문턱에 코를 댄 채로 나뭇결이라고 진작되는 어두운 얼룩을 들여다보며 젖은 듯 마른 듯한 문턱 냄새를 맡고 있었다. 차라리, 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도록 어두워지자, 이참에, 라고 생각하며 눈을 뜨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P.90)

   

작가가 생각하는 도시 소시민의 삶은 절망과 무력감 속에 묶여 제 자신의 그림자, 자신이 만든 어둠에 하염없이 이끌려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겪는 실존적 위기는 익숙한 어둠과 자포자기의 생활방식, 희망이 없는 현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메르스 사태가 벌써 두 달째를 맞고 있습니다. 무능한 정부 때문에 빚어진 국민들의 극심한 불안과 공포, 곳곳에서 예견되는 암울한 미래, 내 이웃의 지금 모습은 소설 속 은교와 무재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다들 제 자신의 그림자를 쫓아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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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겠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시선을 피하여 어물쩍 자리를 뜨려고 일어설 때 그곳에 있던 누군가가 " 왜요, 가시게요?" 묻기라도 하는 날이면 무르춤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엉거주춤 자리에 다시 앉았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 싶다. 대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직책이 위인 사람들과 함께 했을 때 겪는 일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어제는 다음주에 입대를 하는 한 젊은 친구의 송별회 자리에 참석했었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의 군입대 송별회는 친구들끼리 학사주점과 같은 어둡고 퀴퀴한 장소에 모여 코가 삐뚤어 질 때까지 마시고는 집에 갈 사람은 적당히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 그 중 제일 만만한 친구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뒷풀이를 하곤 했었다. 집 근처의 슈퍼에서 사온 맥주로 가볍게 입가심을 하자는 게 친구집으로 자리를 옮긴 주된 이유지만 다음날이면 집주인도 그게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하나의 변명이었음을 알게 된다. 맥주로 시작된 술판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밤새도록 이어지고 입대를 앞둔 주인공은 인사불성이 되어 밤새 토하다가 입대하는 그날까지 숙취로 고생을 하는 게 다반사였다.

 

요즘은 우리 때처럼 그렇게 한 번에 끝내는 법이 없고 입대 전에 한번쯤 만나야 할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일정을 조율하여 모임의 성격에 맞게 장소를 정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젊은 친구들의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슬슬 다음날의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까 염려되는 바도 있어서 분위기를 깨지 않고 몰래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화장실에 가던 한 친구의 눈에 띄어 그만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시간은 늦고, 체력은 방전되고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술자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내가 어제 마신 술이라고는 맥주 한 잔과 소주 한 잔이 다인데 나는 오늘 마냥 늘어지는 피곤과 숙취로 하루 종일 고생을 하고 있다. 이 더위에 군대를 가는 사람이나 남아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나 불쌍하기는 매일반인 듯하다. 하늘도 땅도 다들 더위를 먹었는지 간신히 숨만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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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가장 완벽한 순간
애너 퀸들런 지음, 유혜경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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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과 동시에 들어갔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모 결혼정보회사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명예퇴직이나 문책성 해고를 당한 것도 아닌데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냅다 사표를 던지고는 두어 달 동안 배낭여행을 떠났었지요.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여간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와 안면이 있는 친구들은 다들 그를 부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개중에는 물론 미친 거 아니냐, 비웃는 친구도 더러 있었지만 말이지요. 그러던 친구가 어느 날 돌연 까맣게 탄 몸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취직했노라 연락을 했고, 모 결혼정보회사의 명함을 보란 듯이 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회사나 직책이 모두 그의 전공이나 경력과는 무관한 듯 보였었기에 그 자리에 참석했던 친구들은 다들 뜨악한 표정으로 그의 명함을 받아들었습니다.

 

그와의 만남이 있은 지 얼마 후  그의 성격을 잘 안다고 자신했던 우리들은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사표를 던질 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었고 다만 그 기간이 한 달, 두어 달, 길어야 일 년 등으로 분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지금까지도 그 회사에 출근하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에 없던 일이었지요. 이따금 그 친구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영 멋쩍어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도 농담삼아 "혹시 재혼 상대자가 필요하면 너한테 꼭 연락할게." 한마디 툭 내뱉곤 합니다. 그러나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요즘의 젊은이들은 결혼에 대한 생각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조건도 우리가 젊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초혼이든 재혼이든 일단 결혼정보회사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모두 소설 속에서나 나옴직한 어떤 순수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본인들이 요구하는 일정 조건에 맞지 않는다면 만나는 것 자체도 꺼려한다는 것이지요. 한번 선을 뵌다고 얼굴이 닳는 것도 아니지만 시간과 돈의 낭비라는 생각이 팽배하여 만나볼 상대방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묻기 일쑤이고 미안한 기색도 없이 번번이 퇴짜를 놓곤 한답니다. 하여, 있지도 않은 사실을 꾸며내거나 과장하여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었습니다.

 

나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문득 애너 퀸들런의 <내 생의 가장 완벽한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한 권의 책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브로셔나 리플렛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한 아주 얇은 책이지요. 그러나 그 책의 내용마저 단순하고 가볍기 이를 데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애너 퀸들런의 또다른 책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만큼 가볍지만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완벽해지기 위해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주로 당신이 살고 있는 시간과 장소의 시대적인 흐름을 읽고, 그 시대사조가 주문하거나 요구하는 것에서 최고가 되는데 필요한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이런 요구들은 물론 시시각각 변하지만, 당신의 머리 회전이 빠를 때는 그것들을 읽을 수도 있고 필요한 흉내를 낼 수도 있을 테지요."

 

어떻습니까. 책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내용이 대충 감이 오지요? 작가는 학창시절 매사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이었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어려서는 결코 대답할 수 없었던 이 질문에 대해 작가는 이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완벽해지기 위해서. 단순히 그것뿐입니다. 누군가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자신이 속한 사회나 조직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것이 나 자신인 양 착각하면서 부단히 노력했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깨닫습니다. 그것이 과연 작가 혼자만의 경험이었을까요?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순간순간 되묻게 됩니다.

 

"터무니없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일을 포기해 보세요. 그것은 삶의 너무 많은 부분에서 우리를 집요하게 쫓아다닙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우리의 변덕과 약점과 미지의 세계로의 영웅적인 도약을 의심하게 하고 헐뜯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런 완벽함에 대한 추구입니다. 쉰이나 예순 살이 되면 우리는 대부분 대여섯 살 때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끔찍한 일이지요"

 

나는 아직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까닭에 작가의 말처럼 지난 과거가 충분히 끔찍하다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지만 ,'무엇 때문에?' 나도 모르게 혼자 묻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는 게 사실입니다. 그것은 내 삶을 부정하고 언젠가 본전 생각이 나게 되는 순간이 도래할 것이라는 슬픈 예감, 또는 그 전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영혼을 생각하며 사느니 이력서에 자랑스럽게 쓸 일을 하는 게 쉽겠지요. 하지만 추운 겨울날, 이력서는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나는 오직 마지막 한 문장에 눈길이 머물렀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추운 겨울날, 이력서는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그 말이 나를 한동안 붙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녀들에게 삶의 여정 내내 자신을 보호하는 등딱지로 몸에 익힌 습관과 매너리즘의 혼합물, 기대감과 두려움의 혼합물과는 전혀 다른 당신의 참된 자아를 보여줄 수 있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편협하고 인색한 이 세상이 기대하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말라고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어느 때부턴가 내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습니다. 그러나 겁 많고 용기가 부족했던 나는 '기대감과 두려움의 혼합물'을 내 참된 자아인 양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나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살고 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내 삶에 한없이 비겁했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아들에게 '편협하고 인색한 이 세상이 기대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충고하지 못합니다. 애너 퀸들런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어쩌면 나의 비겁함이 아들에게 대를 이어 상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직 다가오지 않은 많은 후회가 언젠가 나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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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대한민국이 정치 후진국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를 목격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과거를 향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꼴이 된 것이지요. 사실 진보나 발전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전제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런 불편함을 용인하려 들지 않는다면 진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지요. 인간 개개인은 각자의 생각이 서로 다른 까닭에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으면 공존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맘에 들지는 않지만 타인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겠다는 자세와 그에 따른 불편을 참아내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역사는 언제나 정체와 퇴보만 거듭할 것입니다.

 

5공화국 시절 정권에 동조하거나 그들에게 아첨했던 정치인들을 충신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믿지 않는 것처럼, 한 시대의 권력자에게 기대어 눈치를 보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결코 애국자라고 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지금 공포정치를 하고 있다지요? 그래서 고위층의 탈북 러쉬가 이어지고 있다지요? 남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권력자가 도끼눈을 뜨고 '배신의 정치' 운운했다고 여당의 원내대표가 물러나는 꼴이라니...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의 참모습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의견을 조율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런 불편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개나 고양이에게 내각의 장관이나 원내대표를 맡겨야지요. 누구라고 이름을 거명할 필요도 없지만 이번 사태에 동조했던 정치인들은 개나 고양이와 무에 다르겠습니까. 지금 여당 내의 모습은 동물의 왕국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운 센 암사자에 의해 통솔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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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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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1/10도 채 읽지 않았을 때,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들춰내지 않았던, 일부러 피하고 외면했던 단어, 나는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마냥 피하고만 싶었던 그 단어를 책에서 확인했던 순간, 나는 갑자기 목이 턱 막혀와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의 말다툼에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금세 혈압이 높아지곤 한다. 어려서 겪었던 가정 폭력의 트라우마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시시때때로 나를 옥죄는 것이다.

 

"나오미는 이혼을 권할 생각이었다. 가정 폭력이 당사자들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님을 봐서 알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광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당사자들에게만 맡겨놓는다는 것은 방치나 다름없는 일이다." (p.45)

 

조금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악다구니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적어도 도시로 전학을 하여 형과 함께 자취를 시작했던 중학교 2학년 전까지는. 그 시절 사흘돌이로 반복되었던 아버지의 폭력은 누구도 막지 못했다. 심지어 한 집에 같이 살았던 할머니도 어찌하지 못했다. 식구 중 형과 누나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 있었고 집에 남아 있던 나와 여동생, 할머니와 엄마는 모두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아버지의 폭력이 시작되면 나와 여동생은 어떻게든 엄마를 보호하려 애쓰다가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어디로든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달아났다가 잠잠해졌다 싶으면 집으로 몰래 숨어들곤 했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나오미와 가나코>는 나도 모르게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잔뜩 긴장한 채 손에 땀을 쥐고 읽어야만 했다. 500쪽에 가까운 제법 두꺼운 책이었지만 소설의 내용은 단 몇 줄로 요약이 가능할 듯한 명료한 줄거리의 이야기였다. 소설 속 주인공인 '오다 나오미'와 '시라이 가나코'는 둘도 없이 친한 친구 사이이다. 정의감이 넘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의 나오미와는 달리 가나코는 순종적이고 우유부단하다. 큐레이터를 꿈꿨지만 백화점 외판부 사원으로 들어가 VIP 고객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보내던 어느 날 결혼 후 전업주부로 있는 나오코의 집에 우연히 들렀던 나오미는 가나코의 몸에 난 멍자국을 보고서 남편으로부터 폭력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오미에게 가나코가 당한 폭력이 자신이 당한 것인 양 아프게 다가왔던 까닭은 가나코가 둘도 없이 친한 친구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엄마가 아버지로부터 겪었던 폭력의 기억과 평생 고쳐지지 않는 폭력의 습관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컸다. 나오미는 가나코에게 이혼이 최선이라며 이혼을 권하였지만 가나코는 남편 다쓰로가 혹시 자신의 친정에까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나오미의 권유를 거절한 채 남편의 폭력을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한다. 결국 나오미와 가나코는 남편의 폭력에 대항해 '클리어런스 플랜(남편 제거 계획)'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이를 실천해간다.

 

'죽인다'는 말을 피하고 싶어서 '제거'라는 말로 바꾸기로 했다. 표현의 문제는 중요하다. 특별히 다쓰로를 죽이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본인이 병사하거나 자살이라도 해주는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니까 차선책으로 이 쪽을 제거하는 것이다." (p.125)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운반하여 암매장하고, 남편이 마치 실종된 것처럼 조작하기까지 모든 상황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유리하게 진행되어가자 나오미는 이 계획이 마치 운명 같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가나코도 자신이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남편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데 동의하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남편 다쓰로를 살해하고 암매장해 단순 실종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남편과 닮은 중국인을 매수하여 돈을 인출하게 하고 다쓰로의 여권을 들고 출국하도록 한다. 그러나 완전범죄라고 믿었던 그들의 계획은 가나코의 시누이인 요코가 오빠의 실종 사건을 흥신소에 의뢰하면서부터 그 허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게 된다. 나오미와 가나코의 위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가나코는 자신들의 안이한 생각을 후회했다. 실행하기 전에는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실행에 옮기자 허술한 부분이 계속 나타났다.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이건가. 아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자신에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죄를 인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점이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가나코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p.423)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은 그 당사자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던 아버지는 지난해 당신의 그 길고 지난했던 생을 마감하셨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끔찍했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인 가나코의 살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고백하건대 어려서의 나도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살의로 변질되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무엇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실은 범인인, 피해자인 이웃이 태연한 얼굴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별 문제 없었던 것 같은데요' 하고 대답하는 장면도 많은 걸 보면 인간이란 원래 이렇게 의뭉을 잘 떠는 생물인지도 모른다." (p.270)

 

오쿠다 히데오도 이 작품을 쓰면서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생각했다. 폭력의 당사자인 다쓰로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부인에 의해서 살해되도록 한다는 것은 폭력의 부당함을 넘어서 또 다른 범죄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이기에 작가도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가정 폭력의 피해를 경험했던 한 사람으로서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물려받은 모든 것을 내 대에서 단절시킬 수 있는 부모가 가장 좋은 부모'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셨을까 싶다. 나는 아내에 대한 폭력은커녕 아버지 살아 생전 그렇게 좋아하셨던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거두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지만 작가의 생각은 단호했다. 현실이 아닌 소설 속의 이야기였기에 나는 작가의 결단에 더 깊은 고마움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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