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시간을 향해 터덜터덜 내려가는 내리막길이자 자신의 의지나 열정이 포함되지 않은 기계적인 서사일 뿐이다. 반면에 가을은 짧고 가파른 언덕인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내포된 자발적 서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먼 훗날 자신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는 것은 길고 길었던 여름의 기억이 아니라 짧았던 가을의 추억일 확률이 높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확률일 뿐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찌 보내고 있는지 이따금 생각해 볼 필요는 분명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시간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소비 패턴을 찬찬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무임승차의 에스컬레이터에 무심코 올라 탄 채 흐르는 시간을 무작정 지켜보는 방법과 각각의 시간 속에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거나 생각 속에 시간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면서 보내는 방법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 오후에는 이상하리만치 졸려서 잠을 떨쳐버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가을철에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한 시간 남짓 아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가을의 시간은 조각에 알맞은 장미무늬목과 같다.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시간 속에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 있다는 얘기다.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이 뭐 없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또 몇십 분이 흘렀다. 아까워라. 결국 내가 선택한 책은 이상한 조합이 되고 말았다.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에쿠니 가오리의 <울지 않는 아이>,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정말지 수녀의 <바보 마음>.

 

나도 왜 이런 조합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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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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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을 말하기에 앞서 선무당 같은 나의 예언 한마디를 먼저 말할까 합니다. 그렇다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에게 복채를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정도면 저로서는 과분한 선심을 쓰는 셈이지만 뭐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돌린다 생각하면 억울할 것도 없겠습니다. 그렇다고 저의 직업이 정말 무당이나 예언가라고 단정짓지는 말아주세요. 물론 제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자리 펴시지요' 하는 말을 종종 듣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단지 제가 말한 예언의 정확도에서 기인한 것일 뿐, 현재 제가 갖고 있는 직업을 버리고 그쪽으로 완전히 전업하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사설이 길다구요? 성질도 급하시긴... 암튼 제가 하는 예언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정치 및 경제 체제가 유지되는 한 주요 선진국 및 그를 추종하는 신흥 개발도상국 대부분의 국가에서 앞으로는 극좌파의 정치 지도자가 득세할 거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보수 우파로 지칭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완전히 실패했고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부의 쏠림 현상은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우편향의 진보 세력, 중도 좌파에게서는 희망이 없는가? 일반 대중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들의 모호한 정체성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이고, 그들에게서 대안을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영국이나 미국의 정치판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5월에 있었던 스페인 지방선거에서도 좌파 정당연합 포데모스 후보들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시장 자리를 차지한 바 있지만 이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던 듯합니다. '설마~'하는 마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영국 노동당에서 만년 비주류였던 제러미 코빈이 당권을 거머쥐고 미국에서는 좌파정치인 버니 샌더스가 내년 대선 판도를 뒤흔들 정도로 치고올라오자 사람들의 생각은 '설마'에서 '어쩌면'으로 빠르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빈부격차와 분배의 불공정성에 맞선 ‘99%’의 반란, 허울뿐인 진보에 대한 반란이 좌파 바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앞으론 반드시 고려하겠다. 나는 <불새>를 좀 더 오랫동안 흥얼거리게 될 것 같다. "내 안에 내 몸 안에" 있는 '붉은 공포'를 깊이 직면해야겠다." (p.197)

 

사실 이 책은 정치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음악, 역사, 철학 등 우리가 사유하는, 혹은 사유할 필요가 있는 인문학적 생각의 '거리'들을 작가가 읽었던 책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모아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변혁의 시점에서 과연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이며,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자신의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곧 닥칠 미래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설마 없겠지요. 작가는 책의 머리말에서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중립을 지키기만 하면 적어도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공부의 필요성은 거기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 이책에 실린 글들과 선택된 주제들은 2002년 대선 이후로, 한국 사회가 내게 불러일으킨 궁금증을 해소해 보고자 했던 작은 결과물이다." (p.6)

 

저는 이 책을 읽는 데 근 한 달이 걸렸던 듯합니다. 370여 쪽의 두껍지도 않은 책인데 말입니다. 제가 이 한 권의 책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잡아 먹은 까닭은 작가가 읽었던 다양한 책들을 도서관 서가에서 간간이 꺼내 읽느라 그리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많은 책을 모두 정독 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작가가 인용했던 일부분, 그곳을 중심으로 앞뒤쪽 어림하여 이십여 쪽 정도를 읽었을 뿐입니다.

 

"국가를 사유화한 지도자에겐 당연하게도 후광과도 같은 카리스마가 생기기 마련인데, 거기에는 동의 구조와는 다른, 메시아의 재림과 같은 종교성이 대중을 압도하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영적인 지도자와 대중만 남고 국가와 시민사회의 질서는 모조리 공동화(空洞化)되어 버린다." (p.370)

 

사회의 변혁에는 반드시 전조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전조를 눈치채는 사람도 적을 뿐더러 확실히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데서 우리의 불행은 시작됩니다. 자살자가 급증하고 묻지마 범죄가 만연했건만 그 시기에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견했던 경제학자는 아주 적었습니다. 그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욱 적었구요. 글로벌 금융위기 때 세계를 휩쓴 월가 점령과 ‘분노하라’ 같은 대중시위가 오늘날 기성 정치권의 변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반발일 뿐이라고 애써 자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행은 언제나 급작스러웠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계대전의 발발을 그 전날에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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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피폐하고 황량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똑같은 일상이 오래도록 지속되다 보면 기대감에 들떠 가슴 설레게 하는 일이 하나, 둘 사라지고, 가슴 한켠으로는 마른 먼지처럼 팍팍한 느낌만 쌓이게 된다. 그럴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여행의 권유도, 음악회나 영화 관람의 부추김도 졸음에 겨운 나른한 오후에 의해 밀려나고 '세상에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코웃음과 함께 익숙한 권태 속으로 빠져든다.

 

어제는 아내가 외박을 했다. 대학을 두 번이나 다녔던 아내는 두 번째 대학의 나이 어린 동기생들과의 오랜만의 만남에 몹시 들떠 있는 목소리였다. 대학 시절,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홀로 지냈던 아내는 그 시절에 사귄 동기생들과 매우 각별하게 지냈던 듯하다. 다들 결혼을 하고, 각자의 삶에 얽매어 전화와 문자로만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우연처럼 만났으니 오죽이나 반가웠으랴.

 

나는 어제, 윤기가 도는 아내의 전화 목소리에 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반복되는 일상에 아내도 많이 힘들었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짠했다. 좋다는 곳 어디를 가더라도, 맛있다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그 누구를 만나도 그저 덤덤할 뿐 이렇다 할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나로서는 아내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는 건 아니었으나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벗어날 수 없는 무게는 가슴에 와 닿았다.

 

봄부터 이어진 가뭄은 단풍이 물든 이 가을에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공기는 나날이 건조해지고 대기중에는 미세먼지의 농도만 높아지고 있다. 날씨도, 내 마음도 풀리지 않는 '건조주의보'는 여전히 계속되는 셈이다. 대지를 적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졌으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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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까칠하게 말할 것 - 착한사람들을 위한 처방전
후쿠다 가즈야 지음, 박현미 옮김 / MY(흐름출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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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 물어봅시다. 모르는 사람(혹은 얼굴만 아는 친하지 않은 사람)과 가장 빨리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저는 착한(?) 방법과 악한 방법 두 가지를 권해주곤 합니다. 그게 뭔고 하면 말이죠, 같은 취미를 가짐으로써 공통의 관심사를 만드는 것, 그리고 지금 여기에 없는 제3자에 대한 험담을 마음껏 하는 것 두 가지입니다.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면 공통의 관심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험담이나 뒷담화는 어떨까요? 은근히 스릴 있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게다가 험담에 동참한 사람들만의 끈끈한 우정(?)은 또 어떻구요?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구요? 불행하게도 저는 그렇게 착한 사람은 못 됩니다. 오히려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는 말을 신주처럼 믿는 편입니다. 뭐 어떻습니까, 그 당사자가 들으라고 하는 말도 아닌데요. 오히려 대화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같은 범죄(험담)를 저질렀다는 공범의식이 그들간의 결속력으로 이어져 소통을 훤할하게 해준다면 험담은 해볼 만한 일이지 않나요?

 

"험담은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갖습니다. 의사소통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험담하는 자리에 함께 함으로써 결속력을 다질 수 있습니다. 험담을 공유하면서 서로 마음을 터놓은 사이라는 동지애가 싹트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험담의 효능입니다." (p.51)

 

모처럼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좋은 책이라는 게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니 함부로 믿지는 마세요. 이를테면 저는 저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좋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책이 갖는 심오한 지식이나 뛰어난 문장 구사력이 판단기준이 되지 못했던 것은 저로서도 유감입니다만 저자도 딱히 그것을 염두에 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뜩이나 서로 대면하지도 않은 채 문자를 통한 대화에만 익숙해진, 직접적인 만남을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얼마 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계적인 예의나 귀에 거슬리는 경어의 남용을 여러 번 경험했을 듯합니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인간 관계의 불편함을 양산한 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짚어 봐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저자는 아부와 험담의 필요성이라던가, 기능화되지 않은 사람들과의 사교적인 만남과 그 자리에서 취해야 할 행동으로 건방져질 것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경어의 본질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이란 결코 평등하지 않으며 똑같은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니, 이 말을 듣고 놀라지는 않았나요? 물론 저 같은 사람을 비롯해서 인간은 누구나 법적.공적으로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평등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주관을 통해서 본다면 인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큰 편차를 갖고 있습니다. 아니, 인간은 평등하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분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마음씨가 아름답고, 자신은 착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이 책의 독자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p.118)

 

저자의 생각은 때로는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기도 하고 일견 도발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하면 '과연, 그렇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나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사람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모르긴 몰라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괜히 아무것도 없으면서 소싯적 얘기나 꺼내어 폼잡고 거들먹거리는 노친네의 쓸데없는 충고를 듣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이 책 한권을 읽는 게 백 배는 유익할 거라 생각합니다.

 

"높은 지위나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건방짐뿐입니다. 물론 건방진 젊은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젊은이의 에너지나 격식을 깨뜨리는 대범함이 거추장스러운, 다시 말해 정신력이 쇠퇴해 버린 사람입니다. 정신력이 쇠퇴한 사람은 상대해 봤자 별 도움이 안 됩니다. 머지않아 지금의 지위나 힘을 잃어버릴 것이며,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의견이나 제안을 들어 주는 유연성과 활력이 부족해질 것입니다. 특단의 배려를 해서 상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기백 넘치는 건방짐을 받아들일 만한 도량이 있는지 알아본다는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대하면 됩니다. 물론 예의는 갖추어야겠죠." (p.166)

 

당연한 현상이겠습니다만 우리 사회에서 직접적인 대화는 갈수록 뜸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족이나 친척과 같은 허물없는 관계에서조차 대화하는 게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명절만 해도 그렇지 않나요?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제 할 일만 할 뿐 여럿이 모여 대화를 하려는 모습은 찾기 어렵습니다. 적당히 나이가 든 사람들만 옹기종기 모여 술잔을 기울이면서 밀린 얘기에 열을 올리곤 하지요. 이제는 조금씩 귀도 들리지 않는지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가고 말입니다.

 

'대화'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저자의 생각은 가끔 대화와 관련된 삶 전체로 확대되기도 합니다. 죽을 때까지 특정한 사회에 몸담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은 '대화'가 곧 '삶'인 까닭에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속한 사회 분위기가 대화와 소통을 중시하는 분위기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컨대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할배들이 넘쳐나는 사회라면 그 사회의 젊은이들이 대화를 즐길 리 만무하겠지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듯이 과학 기술이 발전하는 것이나 교통 기관과 정보망이 정비되는 것과 사회나 인간이 진보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편리함이나 정비를 가치관이라고 본다면 분명히 발전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다채로움과 생활의 풍요로움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퇴보이고 상실일지 모릅니다. 현대인의 진보에 대한 맹신은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눈속임, 일시적인 위안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p.221)

 

어쩌다 보니 말이 주저리주저리 늘어졌습니다. 이러다가는 책의 전체를 인용하려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해도 뭔가 모자라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기대감도 없이 우연히 집어든 책이 의외로 맘에 쏙 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쁜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맘에도 들고 유익한 책을 어쩌다 우연처럼 만난다면 그것 또한 책을 읽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자 보상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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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인근에는 같은 이름의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다. 차량 통행이 많은 편도 일차선의 도로에 인접해 있는 까닭에 운동장을 둘러 싼 울타리가 꽤나 높은 편인데 아마도 아이들이 갖고 노는 공이 차도로 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가는 차들을 제외하면 인적이 드문 외진 곳이라 학생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그리 만들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무튼 나는 그 학교와 인접하여 산다는 것만으로 학교에서 적잖은 혜택을 누리고 사는지라 학교의 시설물이나 정원수 또는 학생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누리는 혜택이란 게 뭐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따금 한가로운 시간이 날 때면 가볍게 산책을 하는 장소로 이용한다거나 갑자기 몸을 움직여 땀을 내고 싶을 때 축구공이나 농구공 하나 들고 가서 시간을 보내는 정도이다. 그렇다고 학교에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도 아니니 나로서는 여간 고마운 게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 학교의 울타리 주변에는 암적색의 철 지난 넝쿨장미가 열을 맞춰 피어 있는데 나는 그 주변을 지날 때마다 시들어가는 꽃 옆에서 한나절 눈을 감고 누워 있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한나절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면 가을이 훌쩍 지나 있을 것만 같다. 바야흐로 조락의 계절, 시들어가는 붉은 꽃들이 아쉬운 시간을 붙들고 있는 모습은 애처롭다기보다는 오히려 처연하다. 내가 느끼는 처연하다는 감정인 즉 과거로 회귀하는 그리움을 껴안고 생겨난 것이기에 시들어가는 장미의 꽃송이나 그 위에 떨어지는 가을 햇살이 마냥 애틋하기만 하다. 그 곁을 스치듯 걷는 철부지 학생들의 왁자한 웃음이 때로는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져 발걸음을 붙잡기도 한다.

 

이렇듯, 과거의 추억은 대개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향수에 젖게 하거나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은 간절함을 낳는다. 가을에 유독 우리가 추억에 젖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생명이 스러지는 주변 풍경을 보면서 자신도 문득 그와 같이 쇠락의 길로 접어 들고 있음을 감지하는 순간, 과거의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정부 여당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 가을에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데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조락하는 계절에 자신의 신세 또한 처량해지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 계절에 떠오르는 추억은 모두 아름답게만 느껴져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은 욕구는 한층 강해지는 것이다. 나는 자신들의 쇠락을 조금이라도 늦춰보려 몸부림 치는 그들의 처절한 발악이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현재의 잘못이 역사를 잘못 배운 젊은이들 탓인 듯 덮어 씌우려는 생각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장 부러워 하는 것은 바로 젊음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지금까지 무엇 하나 고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고쳐질 가능성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단지 과거의 잘못만 문제 삼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얘기다. 공정한 경쟁이 보장된다면 낮은 취업률도 견딜 수 있고, 원칙만 지켜진다면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도 당당히 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부끄러운 이유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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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vdlEjfdjwlrh 2017-07-10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가옵니다.오랜만에.장미는 지난 뙤약볕에도 묵묵하게 자태를뽐내고 초라하지않게 고개를떨구고 또 내년을 기약할것입니다.빗방울에 잎들도 나뿌끼고.자연.비..비....장미.이계절데로 감사하며 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