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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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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이따금 TV를 볼라치면 연예인들도 자신의 컨셉을 유행에 맞게 잘 잡아야 성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와는 방송문화가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인기 있는 연예인의 모습도 크게 달라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성(性)의 구별이 확실했던 것인지, 이를테면 여성은 청순가련형의 얼굴에 행동거지도 매우 조심스러운 그런 여자가 인기를 끌었는가 하면 남자는 주로 외모보다는 오히려 기운이 넘치고 박력이 있는 남성다움이랄까, 수컷냄새랄까 뭐 그런 것들이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듯하다. 그러나 과거의 트렌드에 멈춰 있는 나의 사고방식과 요즘 인기가 있다는 연예인들의 모습이 너무도 달라서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과거에 비해 여성의 주장이나 발언권이 세진 탓인지 요즘 TV에서 보는 연예인들은 유니섹스를 한참이나 지나쳐 남성과 여성의 성적 특성이 완전히 뒤바뀐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이를테면 여성은 노출이 심한 의상에 조신한 모습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11자 복근의 탄력 있는 몸매와 털털한 성격이 대세를 이루는 듯하다. 물론 외모보다는 털털한 성격 하나로 인기를 끄는 연예인들도 많은 걸 보면 외모에 대한 비중이 과거에 비해 다소 낮아진 것도 사실인 것 같지만 말이다. 반면에 남성은 수컷의 냄새가 완전히 사라진, 예쁘장한 외모에 다소곳하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남성이, 남성이라기보다는 여성에 가까운 꽃미남 스타일의 남자 연예인들이 인기를 끄는 걸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사노 요코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읽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1938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작가는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건너와 무사시노 미술대학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글을 쓰는 직업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을 듯한 그녀의 삶은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와 두 번째 결혼을 함으로써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은 그와 결혼을 하기 전에 나온 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노 요코는 이미 2010년에 고인이 되었고 독자들은 이제 그녀의 독특하고 유쾌한 글을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지만 과거에 쓴 그녀의 글이 여전히 책으로 출판되는 걸 보면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란 것을 볼 수가 없다. 미의 기준 그 자체가 없어졌다고 해도 좋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것은 이 세상 사람 같아서는 안 된다. 범접할 수 없이 신성하고 그윽한 기품이 있고 환상 같아서, 리얼리티 같은 건 한 조각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땐 이미 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p.145)

 

작가인 동시에 일러스트레이터로도 유명했던 사노 요코는 자신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40대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들을 이 책에 솔직하게 씀으로 해서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독자들을 훈계라도 하려는 듯 처음부터 어렵고 이해하지 못할 말들만 늘어놓는 책에 비하면 사노 요코의 책은 우리의 눈높이에 최적화된 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뜬 아가씨들이 긴긴 겨울밤에 남의 집 사랑방에 모여 땟국이 줄줄 흐르는 담요 밑에 시린 발을 겨우 묻고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의미도 없는 수다를 밤새도록 늘어놓는 정경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고급한 철학 같은 건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신주쿠의 지하도에 뒹굴뒹굴 누워 있는 아저씨들이 부럽다. 나는 식당 테이블에 멍청히 앉아서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집앞의 참억새를 바라보곤 한다. 눈썹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다. 지진이 와도 도망치지 않을 거야 하고 생각한다. 장식장 안의 정리해야 할 물건들이 생각나지만 그것들을 직각으로 정리해 놓는다 한들 내 마음이 정리되는 것도 아닌데 하며 그냥 둔다." (p.71)

 

주인공에게 완전히 빙의된 채 드라마를 보고, 영화 속에서 멋진 주인공들이 연애를 하는 걸 보면서 자랐기에 연애는 그들만 하는 하는 걸로 알았다거나 여행이 가고 싶으면 먼저 몸이 아파지는 바람에 병원에서 며칠이고 누워있다 퇴원한다는 작가, 스키를 타러 다니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작가, 볼일이 급해서 차를 세운 채 도로 옆에서 볼일을 보는데 버스가 지나갔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쓰는 작가의 모습에서 나는 요즘 TV애 자주 나오는 연예인들을 생각했다. 시청자들의 인기만 얻을 수 있다면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망가지는 요즘의 연예인들을 말이다.

 

"내가 열네 살 때 좋아하던 남학생은 수재에 문학소년 타입이었고, 그래서 그가 창백하고 휘청거리면 거릴수록 더 섹시해 보였다. 공을 던져도 톡하고 1미터 50센티 되는 곳에 떨어져 버리는 수재를 보면 실신할 지경으로 멋있어 보여서 가슴이 두근두근했고, 나도 따라서 1미터 50센티 되는 곳에 톡하고 떨어뜨렸더니 체조 교사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제대로 해라아!" 하고 고함쳤던 일이 생각난다." (p.272)

 

내일은 제36주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이다. 올해도 정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요구를 거절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싶은 이유일 터였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식장에서 노래 한 곡조 함께 부르는 것조차 무서워 벌벌 떠는 행태가 참으로 우습고 한심스러워 보이지만 말이다.사노 요코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런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웃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는 그처럼 나에게 지성도 교양도 가져다주지 않지만 때때로 감동하거나 감탄하거나, 아름다운 마음씨가 되거나, 분노에 떨거나 하는 것을 몹시 싼 값으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만큼은 좋다. 나는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로, 눈만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마음속에서 꺄아 꺄아 기뻐하고 싶은 거다." (p.320)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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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온통 꽃길입니다. 봄을 배웅하는 아까시 나무의 꽃잎이 마치 첫눈이 내린 듯 등산로를 하얗게 뒤덮었습니다. 가는 봄이 아쉬워 산신령이 뿌려 놓은 아까시 나무의 하얀 꽃잎을 보고 있노라면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노래가 절로 흘러나옵니다. 저는 요즘 꽃향기 가득한 그 꽃길을 걷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자연이 주는 무한정의 베풂이 미안하여 하산길에는 항상 등산객이 버리고 간 각종 쓰레기를 주워 들고 내려옵니다. 어차피 노는 손이니 그거라도 하면 덜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쓰레기를 줍는 제게 '수고한다', '고맙다'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색안경을 끼고 저를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배에 나도 아롱이 다롱이라는데 생각이 다른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 사람들의 주장인 즉 그냥 둬도 되는데 까탈스럽게 구는 까닭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잘난 척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자연보호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먼 옛날에는 동네 곳곳에 개똥이며 쓰레기가 넘쳐났었지요. 그 시절에 살았던 어르신들이니 제 행동이 유난스럽게 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동네 쓰레기라야 대개는 썩어 거름이 되고 산과 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 다였지요. 그러나 요즘은 다르지요. 암요, 다르고 말구요. 썩어 거름이 될 만한 것도 없지만 썩지 않는 게 대부분이니 말입니다. 엊그제 뉴스에 보니 바닷속이 사막처럼 황폐해지는 갯녹음 현상이 우리나라 연안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더군요. 그 면적이 무려 여의도 넓이의 70배에 달한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오염된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도 문제지만 정화처리도 하지 않은 오수를 바다에 무차별적으로 버리고 있으니 바다인들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이지요.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제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저는 그 말이 곧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 세대에도 지금보다 더 나은, 아니 적어도 지금 정도의 자연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하자면 지금 우리가 자연을 아끼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연 파괴는 일종의 한 세대를 학살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인자보다도 더 미워하고 분노해야 할 대상은 그런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인자는 고작 한두 사람, 많아야 몇 명을 죽일 뿐이지만 한 세대를 전멸시키지는 못하지요. 그렇다고 제가 살인자를 옹호하자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가습기 살균제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또 어떠했나요. 일시적인 편리를 좇아 경제 논리로만 접근하거나 무시로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제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여러분이라면 그 말을 믿을 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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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 사랑에 관한 거의 모든 고민에 답하다
곽정은 지음 / 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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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훈련된 성직자나 심리치료사는 냉정하거나 냉정해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적당한 조언을 듣고자 찾아 왔을 때 그 사람의 말에 일일이 대응하거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한껏 위하는 척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상담에 있어서는 초보자이거나 전문가가 될 자질이 엿보이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그렇다. 정신적으로 나약해진 사람에게 하는 섣부른 조언이나 서푼어치의 동정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담을 요청해 온 사람이 절실히 원하는 바는 대개 전문가의 현명한 조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피폐해진 사람이라면 대개 지금 시점에서 어떤 조언이 적절하다거나 나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식의 가치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금 당장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줄 만한 값싼 위로나 동정을 구걸하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또는 지금의 정신적 고통을 잠시 잊게 하거나 영원히 잊을 수 있도록 돕는 약품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바랄지도 모른다. 어떤 상태가 되었든 현명한 조언이 그 사람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현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는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섣부른 조언은 '너는 나를 모른다'는 반감만 불러오게 된다.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인 곽정은의 신작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은 연애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그에 대한 작가의 조언을 담은 책이다. '연애 전문 에디터'로도 불리는 작가는 JTBC <마녀사냥>에 출연하면서 연애에 관한 많은 명언 및 어록으로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작가는 방송에서라면 차마 말로 하기 어려웠을 듯한 내용의 조언도 이 책에서는 거침없이 쓰고 있다. 짧지만 이미 겪어보았던 결혼 생활의 경험이 그녀를 더 원숙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그 남자를 향해 있던 마음속의 안테나를 온전히 자신에게로 돌려야 할 시점이에요. 그를 비난하거나 집착의 대상으로 삼는 건 지금 당신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해요. 내가 정말로 관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믿음인지, 외롭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해요. 그리고 답을 내야 해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다면,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당신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p.102)

 

누구나 한번쯤은 다른 사람의 상담을 받아본 적도 있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상담을 해준 적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 과정에서 내가 알게된 상담이란 누군가로부터 조언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이미 있었던 정답을 상대방으로부터 듣고 기뻐하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나조차도 알지 못햇던 정답을 상대방이 콕 찔러 지적해 줌으로써 내 마음이 함께 공명하게 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상담을 마치는 게 가장 이상적인 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만일 상대방이 아무리 유능한 상담가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일방적인 조언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거나 내가 생각했던 정답 언저리에서만 뱅뱅 맴을 돌 뿐 핵심을 찌르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면 그 상담은 이미 실패한 상담일 뿐이다.

 

이 책에 수록된 고민상담은 대개 연애를 시작하기 전의 만남에서부터 만남의 과정에서의 다툼이나 트러블, 이별을 결심하기 전의 고민이나 이별 후의 정신적 고통 등 다양하지만 결혼 후의 고민도 간혹 눈에 띈다. 연애나 결혼 등 사랑에 이르는 과정만큼 복잡한 게 또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70억 명의 지구인들이 70억 개의 개성을 가진 채 태어났기에 사랑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하게도 되고, 그렇다면 사랑에 대한 조언은 무의미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갈팡질팡 나도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아리송한 느낌이 들게 한다. 사랑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하면 지금까지 쓰인 소설의 주제가 대부분 사랑이고 우리가 하는 상담의 대부분을 사랑과 연애가 차지하고 있을까.

 

"제가 정의하는 사랑이란, 두 사람이 만든 세계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서로를 배려하는 일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일정하게 서로 공유하는 부분도 있어야 하고, 또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부분도 있어야 하죠. 공동의 목표도 있어야 하지만, 나만의 즐거움이란 것도 필요할 것이고요." (p.251)

 

사랑의 문제는 단순히 사랑 안에서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삶의 제반 문제와 연결되어 끝없이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삶이든 사랑이든 결국 누군가의 삶을 경청하거나 조언을 듣는 것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이 이미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정답도 이미 자신의 내면에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각자의 몫이다. 사랑에는 오직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가장 필요할지도 모른다. '잘생긴 사람은 누구나 인물값을 한다'는 말의 의미를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처럼 '겉모습보다는 마음이 먼저'라는 충고를 결혼 전에는 백날 얘기해줘도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사랑도 어쩌면 뒤늦게 알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아닌지... 그렇다면 일단 저질러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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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이후로 권력의 지형도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 대표적이었던 게 아마도 '어버이 연합'의 후원금과 청와대와 국정원의 관제데모 개입 의혹이겠지요. 전 정권서부터 '어버이 연합'에 대한 의혹의 눈길은 꾸준히 있어 왔던 것이기에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후원금의 실체와 일당 2만원을 받고 동원된 탈북자들의 면면을 뉴스에서 확인한다는 건 어쩌면 영원히 공공연한 비밀로 그쳤을 법한 사실이 권력의 향배가 어느 정도 바뀌는 바람에 사실로 굳어져가고 있다는 걸 의미하겠지요.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 수사를 담당했고 검사장을 역임했던 홍모 변호사의 법조비리 의혹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수사팀의 일원으로 당시 수사진을 사실상 지휘했던 그는 수사 진행 상황을 수시로 브리핑하는 등 수사의 핵심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돈을 받은 적도 없는 노 전 대통령 한 명의 포괄적 뇌물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갖은 짓을 다하는 바람에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인물입니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가 도박혐의로 물의를 빚고 있는 일개 기업체의 대표를 변호하면서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른다는 건 권력의 지형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겠지요.

 

가습기 살균제 수사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가 재난 상황이라고 할 만큼 막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이나 정부는 뒷짐만 진 채 나 몰라라 했던 게 사실입니다. 개인과 기업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죠. 5년이나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 수사를 진행시키는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권력의 지형도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권력의 지형도가 바뀌면서 이와 같은 권력형 비리가 하나둘 터져나오는 까닭은 그동안 권력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비밀로 덮을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쉽지 않다는 걸 의미할 뿐만 아니라 향후 우리가 몰랐던 더 많은 것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은 아닌 듯 보입니다. 필리핀 대선에서 승리한 두테르테를 보더라도 기존 정치에 실망한 필리핀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후보인 트럼프의 예도 아마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작금의 정치현상은 분노한 시민들의 정치혁명이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 흐름을 권력의 힘으로 막아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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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 개정판
베티 스미스 지음, 김옥수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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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유명하다는 성장소설 한두 권쯤 읽어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이따금 성장소설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사춘기와는 한참이나 멀어진 지금, 성장소설을 읽는다고 그닥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청소년기는 뭐랄까, 인생에 있어 어떤 특별한 시기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아련한 향수 같은 게 몰려오는 것이다. 감정의 기복도 심하고 육체와 정신의 부조화가 정점에 달하던 그 시기를 나는 어떻게 헤쳐왔을까 조금쯤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지금 나이에 성장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나의 청소년기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함께 그 시기를 큰 사건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온 것에 대한 자축의 의미일런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읽었던 성장소설 중에는 지금도 이따금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과 더불어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나 미하엘 옌데의 <모모>,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등 나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소설의 목록들은 청소년기라는 특별했던 시기와 맞물려 그닥 특별할 것 없는 내 인생의 앨범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청소년기의 평범했던 나의 독서 취향과는 다르게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은 주로 신화와 관련된 판타지 소설을 쓰는 릭 라이어던(Rick Riordan)의 시리즈나 추리소설을 읽는다. 얼마 전에도 스튜어트 깁스(Stuart Gibbs)의 <Space Case>를 사주었더니 며칠 사이에 다 읽어치웠다. 아들이 커서 지금의 내 나이가 되면 아들은 어쩌면 판타지나 추리소설이 그리워질런지도 모르겠다.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읽었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겠지만 이 책 또한 성장소설이다. 1차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1900년대 초를 시간적 배경으로 뉴욕의 브루클린을 그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이민 2세대인 케이티와 아일랜드 이민 2세대인 조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 케이티가 이 책의 주인공인 '프랜시'를 낳는 동안 철없는 아빠 조니는 그들이 맡아 일하던 학교의 청소도 하지 않은 채 밤새 술을 마시고 귀가한다. 열여덟 살의 젊은 엄마 케이티 놀란은 자신의 출산을 돕기 위해 달려온 친정 엄마 메리 로멜리에게 묻는다. 이 아이가 자신들과 다른 인생을 살게 하려면 그녀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그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메리는 이렇게 말한다.

 

"비밀은 읽고 쓰는 데 있어. 너는 읽을 수 있어. 좋은 책을 구해서 매일 이 아이에게 한 쪽씩 읽어주어라. 아이가 스스로 읽을 수 있을 때까지 매일 읽어줘야 해. 그래서 아이가 읽는 법을 배우면 날마다 스스로 읽게 만들어라. 내가 알기에는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야." (p.78)

 

메리는 또한 아이들은 최소한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건 저 아이에게 상상력이라는 놀라운 힘을 길러줘야 하기 때문이야. 저 아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은밀한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해. 그러면 이 세상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악해도 저 아이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나 또한 지금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성자들의 놀라운 삶과 위대한 기적을 회상하며 살아가고 있단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그 이상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어." (p.79)

 

프랜시가 태어난 다음해에 동생 닐리가 태어나고 케이트는 그들이 세들어 사는 연립주택 청소일을, 조니는 파티장의 노래하는 웨이터를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케이티는 아이들에게 매일 성경과 셰익스피어를 읽도록 하고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저금통에 돈을 모으도록 했다. 프랜시와 닐리가 집 근처의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그 학교를 맘에 들어 하지 않던 프랜시는 집에서 먼 학교로 전학을 한다. 생활력이 강했던 케이티와는 달리 조니는 팁으로 받은 돈을 모두 술로 탕진한다.

 

"케이티 역시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조니 또한 몽상가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기 아이들에게 이런 특성을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물론 이들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풍요로운 상상력으로 가난에 찌든 고통스런 삶을 너무 쉽게 견디어낸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케이티는 만일 자신들에게 이런 특징이 없었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주 처절하게 바라보고 좀더 낫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p.143)

 

술주정뱅이로 낙인이 찍힌 조니는 조합에서도 쫓겨나고 아무도 그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조니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프랜시가 아직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아빠 조니는 그렇게 세상을 떴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랜시는 취직을 하고 닐리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프랜시는 학교에서 작문은 언제나 A를 받았는데 아빠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아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작문을 가르치던 가드너 선생은 그녀가 쓴 글이 형편없다고 말한다. 글에 안 좋은 내용이 들어 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언젠가 자신이 얘기한 것에 대해 프랜시가 고마워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어른들은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되는 것인가? 벌써 프랜시의 어깨에는 미래에 감사해야 될 짐이 잔뜩 얹혀져 있었다. 꽃다운 젊은 시절을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다니며 당신이 옳았으니 감사하다는 말을 하느라고 다 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p.248)

 

신문사에서 잡일을 하기로 하고 취직했던 프랜시는 그곳에서 리더(Reader)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여러 지역의 신문만 읽으면서 보낸다. 그러다 문득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대학의 썸머 스쿨을 수강한다. 그곳에서 프랜시는 벤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벤은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할 일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다. 신문사를 사직하고 오퍼레이터로 재취직을 한 어느 날 미국의 1차대전 참전 소식이 전해진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보내질 때 프랜시는 리 하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었고 프랜시는 실연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항상 행복이란 게 저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어떤 복잡하고 얻기 힘든 걸로. 하지만 얼마나 작은 일들이 행복을 만들어주는 걸까. 비가 내릴 때 피할 수 있는 곳, 우울할 때 아주 뜨겁고 진한 커피 한 잔, 남자라면 위안을 주는 담배 한 개피, 외로울 때 읽을 책 한 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이 행복을 만들어주는 거야." (p.318)

 

주인공 프랜시의 성장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책은 우리나라의 6,70년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끼니를 굶을 정도로 어려웠던 경제 사정이나 미혼모에 대해 차가운 시선으로 대했던 경직된 윤리관이나 그럼에도 동네의 인심이 살아 있었던 풍경은 6,70년대의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던 오늘, 생각에 잠긴 사람들 표정이 흐린 하늘만큼이나 어둡다. 그러나 나는 데이트를 나가는 프랜시의 들뜬 기분으로 또 한 권의 성장소설을 읽었고 찬란했던 5월의 꿈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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