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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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 가족소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는 작가가 어깨의 힘을 반쯤 뺀 상태로 쓴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글을 통하여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거나 우쭐해하고 싶은 욕심을 절반쯤 내려놓았다는 얘기다. 글을 쓰는 작가가 글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건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여타 작가들의 초창기 작품을 읽어보면 '잘 써야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채 글을 쓴 탓인지 책을 읽는 독자가 오히려 더 부담스러워져 어깨가 뭉치는 느낌이 든다. 가독력도 떨어지고 말이다.

 

그렇다고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건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욕심을 내려놓은 채 글을 쓰면 작가 스스로도 글을 쓰거나 퇴고를 거듭하는 과정을 지겹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때로는 즐기게도 된다. 노동이 아니라 유희가 된다고나 할까. 아무튼 글을 쓰는 일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쓴 글은 그것을 읽는 독자도 배시시 웃음을 머금을 수 있게 된다.

 

"아내는 계속 깔깔 웃어댔다. 아내의 그 웃음은 뭐랄까, 정말이지 나를 자꾸 내부 지향으로 만들어가는, 편안하고 적나라한 웃음이었다. 그냥 한번 웃고 마는 것. 아내의 장기주택저축을 지켜주는 것, 계속 방귀대장 뿡뿡이의 연인이 되어주는 것. 그것과 머리칼을 바꾼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게 만드는 웃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클클 함께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나와 함께 웃고 있는 이 사람은 특이한 거 좋아하는 여자가 된 게 맞으니까. 그거면 다 된 거니까."    (p.26~p.27)

 

아무튼 이 책은 가족을 소재로 쓴 가족 소설이다. 작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슬쩍 덧칠하여 썼으니 소설이 맞긴 하지만 '가족 에세이'라고 해도 과하지는 않을 듯하다. 2011년부터 한 월간지에 '유쾌한 기호씨네'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했다. 원래는 삼십 년을 연재 시한으로 삼고 시작한 글이 채 사 년을 채우지 못했던 까닭은 세월호 사건 때문이었다고 했다. 둘째 아이의 생일이 4월 16일이란다. 나는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이 책에 실린 44꼭지의 글을 읽는 다른 독자들도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벚꽃이 지고 초록이 무성해지면, 다시 아이들은 그만큼 자라나 있겠지. 아이들의 땀 내음과 하얗게 자라나는 손톱과 낮잠 후의 칭얼거림과 작은 신발들. 그 시간들은 어떻게 기억될까? 기억하면 그 일상들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는 것일까?"    (p.246~p.247)

 

아내와 애 셋 딸린 가장은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누군가의 남편으로서, 또는 세 명의 아이들의 아빠로서, 때로는 다른 누군가의 아들이자 사위로서 실수도 많고 바라는 바도 많겠지만 그는 자신의 현재 모습에 만족한 듯 보인다.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낮에는 합기도 체육관에서 밤에는 동네 카페 2층의 '사자소학' 교실에서 문무(?)를 갈고 닦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그 언저리에서 맴돈다.

 

2016년의 꼭 이맘때쯤이었다. 나는 이기호 작가의 소설 <사관 잘해요>를 읽고 리뷰를 썼었다. 그리고 딱 1년 후에 나는 다시 그의 소설을 읽고 리뷰를 쓴다. '나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름 자체가 꼭 소설의 다른 말인 것만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어디 가족뿐이랴. 내가 사랑하는 모든 대상이 한 편의 소설이자 삶의 감동인 것을. 세월이 흘러 나나 당신의 사랑하는 대상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갈 때 우리의 소설은 어떤 추억으로 쓰일 것인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소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갈무리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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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들었을 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던 말도 혼자서 곰곰 되씹어 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확연히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아마도 한박자 느린 나의 둔한 운동신경과도 연관이 있지 싶은데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이긴 하지만 나와는 상당한 나이 차가 있는 인생 선배 세 분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그 자리에서의 대화를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았다.

 

나 : 한참이나 어린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외람되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는 게 점점 조심스러워집니다.

 

A : 자네도 충분히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지. 다만 자신의 인생을 연습만 하다가 보내지는 말게. 무슨 얘긴고 하니 지난 일을 하나하나 곱씹고 후회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음에 이런 상황이 오면 이러이러하게 해야지 계획하느라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는 말라는 얘기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늘은 누구에게나 처음이 아닌가. 인생은 매일매일이 새로운 도전의 장이지 어제의 경험으로 오늘을 다시 재현하는 연습의 장이 아니라는 말일세.

 

B : A의 말이 맞네. 다만 자신의 가슴에 오해의 싹은 틔우지 말게. 오해는 단순히 오해로 끝나는 게 아니네. 여름철 잡초처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법이지. 한 번 생긴 오해를 그대로 방치하면 무성해진 오해로 인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결국에는 비뚤어진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게 된다네. 그것만 조심하면 되네. A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늘 본게임처럼 생각하고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지는 말게. 그것처럼 허망한 일도 없을 걸세.

 

어제는 그저 별 뜻도 없이 나누던 대화였는데 오늘 다시 생각해 보니 이보다 더 귀한 조언이 다시 없을 듯싶다. 한마디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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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비앤비 스토리 - 어떻게 가난한 세 청년은 세계 최고의 기업들을 무너뜨렸나?
레이 갤러거 지음, 유정식 옮김 / 다산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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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거나 사회 생활 경험이 10년 이내로 그리 길지 않은 2,30대의 젊은이들을 보면 베이비붐 세대의 전통적인 가치관과는 확연히 다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경험한 이전 세대의 궁핍한 삶을 보고 자란 베이비붐 세대만 하더라도 맹목적인 근검 절약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구매 1순위는 단연 집이 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해외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고 국내여행이라고 해봐야 여름 휴가철의 바캉스나 명절에 찾는 귀성여행이 다였지 싶다. 그들 대부분이 큰 돈을 벌겠다는 욕심은 딱히 없었지만 제자식만큼은 어떻게든 고생을 면하게 하고 싶은 게 공통된 욕심이라면 욕심이었다. 그러자니 자신들의 삶은 그저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를 잇는 요즘 젊은이들의 가치관이나 철학은 상전벽해라고 해도 될 만큼 너무나 크게 달라져 있다. 삶의 우선순위가 가족이나 자식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 또한 달라진 가치관의 반영이며 근검절약을 통한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앞의 현재를 즐기는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정점에 선 것이 여행이 아닐까 싶다. 명절 연휴마다 북새통을 이루는 공항, 발 디딜 곳을 찾기 힘든 여름의 해수욕장 등은 단순히 자신의 삶을 대하는 가치관의 변화일 뿐 그것이 좋다 나쁘다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미국의 종합 경제지 <포춘>의 부편집장이기도 한 레이 갤러거의 최신작 <에어비앤비 스토리>는 우리나라 현실을 감안하며 읽는다면 꽤나 흥미로운 책이다. 세 명의 가난한 청년이 집세를 마련하기 위해 '에어비앤비'를 창업한 뒤 험난한 과정을 거쳐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세밀하게 그린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기업 드라마처럼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공동 창업자인 브라이언 체스키와 조 게비아가 디자인 스쿨 출신의 디자이너라는 점이다. 물론 그들 곁에는 블레차르지크와 같은 유능한 엔지니어가 있었지만 말이다.

 

"에어비앤비의 형성과 성장 과정은 마치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기업가를 소재로 쓴 대하소설과도 같다. 세 창업자들이 회사를 일으키기 위해 맞서야 했던 도전들, 그들이 구축한 제품과 문화, 그리고 세계 최고의 숙박 기업으로 신속하게 변모해간 일련의 과정들은 에어비앤비의 놀라운 민첩성과 적응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p.117)

 

에어비앤비의 성공 이면에는 시대적 여건이 잘 맞았다는 것도 있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노력을 통하여 그들 앞에 펼쳐진 행운을 부여잡지 못했더라면 행운은 그저 그들 곁을 바람처럼 스쳐갔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를 강타한 세계적 불황으로 여행객들은 이전보다 더 저렴한 비용의 숙소를 원하게 되었고, 도전과 모험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은 에어비앤비의 가치를 드높이는 데 행운처럼 작용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에어비앤비는 불황기에 소득이 늘지 않아 고민하는 호스트들에게 소득 증가의 기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게스트들에게는 저렴한 비용에 더하여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에어비앤비는 호스트와 게스트 쌍방을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수수료를 받는 구조이지만 '어디에서나 우리 집처럼 느낄 수 잇는 변화의 여정'을 완성함으로써 숨겨져 있던 수요를 창출한 셈이다.

 

"전통적인 사업은 창업자들에게 다른 강점을 요구합니다. 또 네트워크 회사나 게임 회사라면 담대한 마음가짐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켓플레이스 창업자가 가져야 할 강점들 중 최우선은 독창적으로 사고하고, 기꺼이 논쟁에 발을 담그려는 당돌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에어비앤비의 창업 스토리에 모두 녹아 있습니다." (p.99 투자자 리드 호프만(Reid hoffman)의 말)

                     (캘리포니아 앱토스에 있는 인기 숙소 - 머쉬룸 돔)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게스트들의 인기 숙소인 위의 사진이나 애틀란타의 트리 하우스를 보면 쌍방향 소통을 통한 새로운 수요의 창출을 여실히 실감하게 된다. 여행객의 피로를 풀어주는 단순한 숙박개념에서 벗어나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신기한 숙소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것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대표적인 비즈니스 모델인 '공유경제' 카테고리에서 에어비앤비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정말 평범하고 가난한 세 명의 학생들이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직감과 그것을 만들어낼 만한 무모한 용기가 있었습니다." (p.259 브라이언 체스키의 말)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습관처럼 부침개 생각이 난다. 우리와 문화가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또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계는 언젠가 국경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통합되는 날이 결국 오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비록 보호무역으로의 회귀와 같은 일시적인 퇴행을 보이기는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에어비앤비의 사례는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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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속담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궂은 일, 험한 일 가리지 않고 벌어서 쓸 때는 귀한 곳, 정말 필요한 곳에 쓰라는 의미이겠지요. 말하자면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어려우니 돈을 쓸 때는 삼가고 조심하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뉴스를 보면 개는커녕 하이에나처럼 게걸스럽게 버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도 많고, 정승처럼 벌어서 개 같이 쓰는 인간들도 허다한 듯합니다.

 

언론의 보도를 보면 미스터피자의 회장인 정 모씨도 그렇고 BBQ나 파자에땅 등 프랜차이즈 업체의 갑질이 도를 넘은 것 같더군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대리점에 대한 남양유업의 밀어내기식 횡포나 주요 신문사의 지국에 대한 비슷한 행태 또한 여전하니 말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당하게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야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만 제 몫에 더하여 타인의 몫까지 탐내는 하이에나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번져가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런지요. 게다가 부모 잘 둔 덕에 땀 한 번 흘리지 않고 정승처럼 번 돈으로 말년에는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여자들을 성매수 했던 모 기업 회장이나 정승처럼 번 돈을 영어의 몸이 된 자신을 구명하느라 변호사들에게 펑펑 쓰고 있는 그의 아들은 또 어떻습니까. 정승처럼 벌어 개처럼 쓰고 있는 꼴이 참으로 우습기만 합니다.

 

주말부부로 살고 있는 나는 평일에 머무는 지방의 아파트에서 같은 단지내의 여러 학생들과 꽤나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내가 갖고 있는 책을 빌려주기도 하고 그냥 줄 때도 더러 있기 때문이지요. 이따금 학습에 도움을 줄 때도 있긴 합니다만 그런 표면적인 이유보다도 아이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어주었던 게 그들과 가까워진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땅은 좁고 경쟁은 치열한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게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짠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아이들도 그러더군요. 경쟁을 하더라도 공정한 룰에 의해서 하고, 힘들게 밥벌이를 하더라도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지요. 밥벌이, 하니까 성선경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오늘은 더위가 시작된다는 소서이자 금요일. 시름을 잊고 편안한 주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밥 罰

         성선경

 

밥벌이는 밥의 罰이다.

내 저 향기로운 냄새를 탐닉한 죄

내 저 풍요로운 포만감을 누린 죄

 

내 새끼에게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이겠다고

내 밥상에 한 접시의 찬이라도 더 올려놓겠다고

눈알을 부릅뜨고 새벽같이 일어나

사랑과 평화보다도 꿈과 이상보다도

몸뚱아리를 위해 더 종종거린 죄

 

몸뚱아리를 위해 더 싹싹 꼬리 친 죄

내 밥에 대한 저 엄중한 추궁

밥벌이는 내 밥의 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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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제155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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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소설을 자주 읽게 되었다. 예전에는 철학이나 에세이 등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만 주구장창 읽었었는데 요즘에는 나도 모르게 소설 쪽으로만 손이 가는 걸 보면 사람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주변 상황이 변한 것인지 그 원인을 알기 어렵다. 그렇다고 역사 소설이나 추리 소설, 혹은 SF 소설 등과 같은 특정 장르의 소설만 탐닉하는 건 또 아니다. 그렇다고 몇몇 작가를 정해 놓고 그들의 작품만 읽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읽는다. 소설 마니아라고 하기에는 소설을 보는 안목도, 소양도 깊지 못한 탓일 게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소설을 읽다 보니 나처럼 둔한 사람의 눈에도 일본 소설과 우리나라 소설의 분명한 차이점이 더러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순수 아마추어의 눈에 비친, 말하자면 일반 독자로서의 시각에서 말이다. 일본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스토리 전개에서 작가의 개입이 전혀 없거나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소설은 작가의 잦은 개입으로 인해 스토리가 중간에서 뚝뚝 끊기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의 심리묘사 형식으로 서술되는 부분이 과도하게 길거나 주제와 연관된 철학적 배경을 한참 설명하거나 삶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주인공을 통해 전달한다. 일본 소설은 이런 식으로 작가가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는 편이다. 오직 스토리에만 집중할 뿐이다.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작가의 개입이 최소한으로 이루어진다.

 

일본 소설의 이런 모습에 대해 비판적인 일부 독자는 가볍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설은 스토리가 주이다. 어떤 스토리를 읽고 독자가 어떠한 철학적 관점에 서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지 작가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일본 소설가의 대부분이 지독히 냉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 작가라고 해서 왜 하고픈 말이 없겠는가마는 철저히 함구한다는 점에서 냉정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소설가는 한 번 필을 받았다 하면 자신의 철학이나 주인공의 주제의식에 대해 구구절절 써내려가기 일쑤이다. 그러다 보니 작가의 견해를 독자에게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우리나라 소설가가 일본 작가에 비해 더 열정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비단 소설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에세이에서도 대체로 그렇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툭 던져놓고는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바 아니라는 듯한 자세를 보인다. 소설 곳곳에 작가의 철학이 드러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은 오히려 스토리는 부가 되고 작가의 철학이 주가 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소설이 재미없다거나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작가의 견해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관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깊이가 있다는 얘기다.

 

아, 이런!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집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게 그만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제 155회 나오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6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를 비롯하여 '성인식, '언젠가 왔던 길', '멀리서 온 편지', '하늘은 오늘도 스카이', '때가 없는 시계'가 그것이다.

 

"엄마가 내 팔을 잡는다.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요시다라는 요양사에게 늘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리라. 홀로 남아 나이를 먹고, 병에 걸려서야 겨우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상대를 찾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의 고슴도치처럼 줄곧 주위를 경계했던 인생에는 끝내 그런 상대가 없었다." (p.94 '언젠가 왔던 길' 중에서)

 

6편의 단편 모두가 일본 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린 딸을 교통사고로 잃고 상실감에 젖어 살던 부부가 죽은 딸을 대신하여 성인식에 참석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성인식'과 자존심 강한 엄마 때문에 늘 힘들어 하던 딸이 취업과 동시에 독립하여 무려 16년을 등지고 살다가 이제는 치매에 걸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진 엄마를 어렵게 만난다는 내용의 '언젠가 왔던 길', 일밖에 모르는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반발해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갔던 주인공이 매일 밤 이상한 문자를 받게 되면서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조부모의 삶과 남편을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다룬 '멀리서 온 편지', 아버지가 급사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이발소를 물려받은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고 승승장구 하다가 욕심에 눈이 멀어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고 출소 후 바닷가 한적한 곳에 작은 이발소를 차려 남은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이발사는 늘 커다란 거울 앞에서 일하는 직업이죠. 손님에게 언제나 모습을 보여야 하는 장사입니다. 그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발하는 동안 바다를 보고 있으면 제 얼굴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 얼굴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당신 살인자지, 하고 손가락질할까 봐 두려워서." (p.139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중에서)

 

집을 나와 바다를 찾아 떠나는 소녀가 비닐봉투를 쓴 소년을 만나 동행하는 과정을 아이의 시각에서 그린 독특한 문체의 이야기인 '하늘은 오늘도 스카이', 아버지의 유품으로 손목시계를 물려받은 주인공이 한 시계방에 시계 수리를 맡긴 채 시계방의 주인과 나누는 대화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회상하는 내용의 '때가 없는 시계'.

 

"어른이 되면 자기 부모라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법이다. 절대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다. 어느 면에서나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억 속의 아버지 나이를 넘긴 지금은." (p.246 '때가 없는 시계' 중에서)

 

작가는 6편의 단편 모두에서 가족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가족도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이별을 경험하게 되고, 이별 후에 떠오르는 자신의 기억을 통해 비로소 한 사람의 객체로서 가족을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일정한 거리가 유지될 때에만 유지되는 불완전한 구조임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일정한 거리가 주어지지 않는 가족이라는 관계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서로의 거리가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어서 약간의 상처로도 아주 쉽게 무너질질 수 있는 게 가족이라는 관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족이라는 살얼음판을 가장 단단하다고 믿으면서 산다. 그게 삶이다.

 

(오탈자)"스즈네를 위해서기보다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스즈네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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