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감정
일자 샌드 지음, 김유미 옮김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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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예능 프로에 나와서 했던 유시민 작가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정치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후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는 포털에 올라온 자신의 이미지 10년 치를 모두 검색해 보았다고 밝히면서 "내가 이 얼굴로 10년을 살았나 싶더라"고 말했다. 자신의 얼굴이 날카로워 보였을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워 보여서 더는 이렇게 인생을 살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 경험을 들려주던 작가는 이야기의 말미에 덧붙여서 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 생활하는 사람들끼리 일주일 동안 많은 사진을 찍어 서로 교환해 보라고도 권했다. 사람들은 평상시에 자신의 얼굴을 잘 못 보기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란다. 만약 타인이 찍은 사진 속의 자기 얼굴이 다 안 좋다면 직장을 바꿔야 한다고도 했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얼굴이 주는 느낌, 그것이 좋을 때 그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라면서.

 

맞는 말이다. 이미 결정된 자신의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꿀 방법은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면 불행하지 않을까 고민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방법론 중 하나로 '감정수업'을 꼽고 싶다. 더구나 자신의 감정 표현에 있어서는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서툰 우리나라 국민이기에 '감정수업'은 행복한 삶을 위한 필수적 전제 조건이 아닐까 싶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수용하는 것보다 실패한 관계에 분노를 쏟아붓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이전에 받은 상처를 지닌 채 그 상처와 연관된 상실감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때, 당신의 분노는 슬픔으로 바뀌게 된다. 슬픔은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p.90)

 

덴마크의 심리치료사 일자 샌드가 쓴 <서툰 감정 The Emotional Compass>은 우리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대책이 없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책이다. 더구나 되도록이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미덕인 양 교육을 받아왔던 우리로서는 감정에 서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자신의 감정을 억제만 하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임계점에 이른 감정은 결국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폭발하고야 말 것이고 우리를 둘러싼 관계를 일시에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로 문제의 핵심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해결 방안을 피력한다. 총1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장 우리는 감정에 속고 있다, 2장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3장 분노는 현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4장 분노는 전염성이 강한 감정이다, 5장 자존감,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습관, 6장 슬픔은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과정이다, 7장 질투는 수치스러운 게 아니다, 8장 불안한 게 당연하다, 9장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자, 10장 우리는 왜 끝없이 관계를 맺는가, 11장 설명하지 말고 느낌을 표현하라'의 순서로 인간의 감정 전반을 다루고 있다.

 

심리 치료사들은 대체로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행복, 슬픔, 불안/두려움, 분노의 네 가지로 규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대체로 혼합되고 변형되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감정의 강도가 약할 때에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사람은 갈등을 일으키는 게 싫어서 문제를 외면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겉으로 표출되는 행동이 우리가 예측하는 감정이 아닌 경우도 많다. 예컨대 울고 있는 여자가 단순히 슬퍼서가 아니라 겁을 먹거나 화가 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남자가 화를 내는 원인이 분노가 아닌 두렵거나 우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감정은 그 종류를 파악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원인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감정수업을 통해 감정의 종류와 원인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타인과의 관계도 좋아질 뿐만 아니라 삶의 질 또한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감정을 느끼는 이유나 어떤 것을 원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말고, 당신이 느끼고 감지하고 원하는 것을 표현하라. 상대방은 당신에게 훨씬 더 큰 공감과 친밀감을 느낄 것이다. 굳이 자신을 설명하고 옹호하고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느낀 것을 그대로 표현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p.201)

 

감정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이니까 이런 감정을 느껴야겠군, 하면서 물건을 고르듯 골라잡을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는 형체도 없고 선택할 수도 없는 감정이라고 해서 버리거나 그로부터 멀리 벗어날 수있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좋든 싫든 평생을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감정을 남들보다 더 크게 느끼며 사는 게 상책이다. 범사에 그저 무덤덤할 게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는 작은 행복일지언정 크고 강하게 느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행복은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듯 우연히 얻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발견되는 것임을 <서툰 감정>을 통하여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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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부와 지금의 제1야당인 자유당(새누리당)이 내놓았던 정책이나 법안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기는 건 별로 없었지만 단 하나 고마워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뭔고 하니 그것은 바로 담뱃세 인상입니다. 저는 헤비 스모커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오랜 시간 담배를 즐겨왔던 건 사실입니다. 하루에 대략 열다섯 개비 이상은 늘 피워왔으니까요. 애국자였던 셈이죠. 자신의 몸을 희생해가면서 세금을 충실히 낸 셈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2000원대였던 담뱃값을 4000원대로 올리겠다는 정부 발표에 강한 반감이 들었습니다. 애연가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꼬우면 담배를 끊으라는 얘기였죠. 자유당이나 그 당시의 정부 태도는 '담뱃값을 이렇게 올려도 너희같은 의지 박약아들은 담배를 절대 끊지 못할걸. 적이나 불만이면 한번 끊어보시든가.'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아, 이제는 나도 담배를 끊어야 할 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아침운동을 거르지 않고 한 덕분인지 그렇게 담배를 피우면서도 건강에는 딱히 문제가 없었던 까닭에 담뱃값만 크게 오르지 않았더라면 굳이 금연을 결심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그게 2014년 하반기의 일이었고, 저는 실제로 담뱃값이 올랐던 2015년 1월 1일부터 담배를 끊었습니다. 저에게는 크나큰 결심이었습니다. 금연을 실행에 옮긴 지 벌써 2년 반이 지났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에게도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다만 그 당시의 자유당과 정책 입안자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백해무익하다는 담배를 지금도 피우고 있었겠지요.

 

혹시 자유당 대표의 예전 꿈이 뭐였는지 아시나요? 어디선가 얼핏 듣기로는 코미디언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그는 자유당의 대표가 되자마자 당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던 듯합니다. 웃을 일 없는 국민들을 위해 국회의원 신분은 잠시 잊고 코미디를 선보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코미디 대본 1호가 담뱃세 인하입니다. 자신들이 했던 담뱃세 인상을 뒤집겠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한번 웃겨보려는 것이죠. 거기에는 당대표의 꿈을 뒤늦게나마 실현시켜 드리겠다는 당원들의 깊은 충정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산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다음에 내놓을 코미디 대본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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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 세계 8대 문학상에 대한 지적인 수다
도코 고지 외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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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의 습기가 말라가는 동안 인적이 끊긴 거리에는 말매미 소리만 가득했다. 때로는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를 잠재움으로써 새로운 침묵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말매미 소리만 요란한 고요. 열대야로 연일 잠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그 고요 속으로 자신의 밀렸던 잠을 슬몃 들이밀었는지도 모른다. 한껏 드높았던 인간의 힘이 이렇듯 힘없이 수그러드는 날에는 자연의 범주에서 인간만 소외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자연의 뜨락에서 멀리 밀려난 듯한 인간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추레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은 예술이다. 예술이라는 가교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쩌면 자연과의 친화를 영원히 포기했을런지도 모른다. 문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인간과 자연의 순리를 끝없이 되내일 뿐만 아니라 자연에 속한 인간 존재의 자각을 선명히 드러내곤 한다. 결국 우리가 기억하는 문학상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에 대한 우리 모두의 감사의 표시가 아닐까 싶다.

 

최근 도서출판 현암사에서 출간된 <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는 각종 문학상에 대한 여러 전문가의 대담을 책으로 엮은 대담집으로서 대담집 치고는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노밸문학상, 맨부커상, 콩쿠르상, 퓰리처상, 카프카상, 예루살렘상, 아쿠타가와상, 나오키상, 이렇게 여덟 개 문학상을 다루었는데, 일본 책인 만큼 일본의 문학 교수와 평론가, 작가, 번역가 등 14명의 대담자가 등장한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학상이 세계 최고의 문학상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와세다대 문학학술원 교수인 도코 고지는 각각의 문학상에 모두 참여하였고, 다른 두 명의 대담자는 문학상마다 다르게 편성되었다. 이를테면 노벨문학상에는 도코 고지와 나카무라 가즈에, 미야시타 료가 참여하였고, 아쿠타가와상에는 도코 고지, 다케다 마사키, 다키이 아사요가 참여하는 식이다. 대담에 참여하는 세 명의 대담자는 수상작 한 편씩을 집중적으로 논의함으로써 모두 24편의 소설을 다루게 된다. 대담자들은 수상작을 논의하기 전에 각각의 문학상에 대한 성향을 다루면서 독자의 예상과는 상당히 다른 작가가 수상자로 선정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상자 중 고령자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이 수상했을 때 "죽기 전에 줘야지 싶었겠지요"라는 코멘트를 한 것처럼 연령이 높을수록 받기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럽의 주요 언어밖에 못 읽는 사람이 선정 위원이기 때문에 그 언어로 쓰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또 북유럽 출신이라면 더욱 유리합니다." (p.20)

 

흥미로웠던 것은 맨부커상에 대한 대담자들의 평가였다. 선정 위원의 구성이 문학 관련자들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종사하는 이들로 구성된다는 점과 선정 위원들이 매년 교체된다는 점, 각각 100권이 넘는 후보작 전체를 읽고서 수상작을 선정함으로써 신뢰도를 높인다는 것이었다. 한 작가가 여러 번 수상할 수 있다는 점도 이채롭다. 살만 루슈디, 이언 매큐언, 줄리언 반스, 존 쿳시 등이 수상한 맨부커상의 수상작은 문학성에 재미까지 갖췄다는 평가다.

 

일본의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대표한다고 인식되는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에 대한 대담자들의 평가는 신선하다. 사실 아쿠타가와상은 일본 문학계의 신인상으로서 문학계에 데뷔하는 정석 코스의 마지막 단계가 아쿠타가와상 수상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 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라는 선언과도 같다. 반면 나오키상은 중견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으로서 어느 정도 예술성을 인정받고 인지도가 있는 작가의 대중적인 소설에 주어진다. 이쿠타가와상이 '유럽 문학처럼 쓴 일본 문학'이라면 나오키상은 '아시아에서 본 일본'이라는 관점이 반영된 작품이 많다는 평가와 함께 대담자들은 '아시아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유럽의 일부로 여기는' 일본인들의 망상을 꼬집기도 한다.

 

책은 이들 문학상에 더해 문학과 음악, 보도 부문을 아우르는 퓰리처상(미국),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작품 '해변의 카프카'로 수상한 바 있는 카프카상(체코), 2009년 하루키의 수상 연설을 통하여 널리 알려진 예루살렘상(이스라엘), 1903년에 제정된 콩쿠르상(프랑스)을 다루고 있다.

 

"퓰리처상이란 미국의 문학상으로, 아마 일본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는 상일 겁니다. 하지만 어떤 상인지 물어보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걸요(웃음). 왠지 모르게 유명하고 번역서의 띠지에 '퓰리처상 수상'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기도 하지만요." (p.202)

 

대담은 문학상에서 그치지 않고 문학상과 인연이 없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퓰리처상 최종 후보작에 다섯 번이나 이름이 올랐지만 매번 상을 놓쳤던 조이스 캐롤 오츠,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수상 실적이 없는 폴 오스터 등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해 우리나라 작가 한강은 <채식주의자>를 통하여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알렸다. 덕분에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들, 이를테면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 등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고, 여타의 다른 한국 소설들이 모처럼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순간에 그치는 관심은 한국 문학의 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하지 못한다.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는 사실 문학상과 연관된 다양한 주제의 소설에 대해 문학 전문가들이 펼치는 깊고 풍성한 이야기 한마당이다. 그럼에도 일반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정보의 비대칭성에 있지 않은가 싶다. 문학상 수상 작품과 여러 수상작가들에 대한 지식의 폭이 넓은 대담자들에 비해 나를 비롯한 일반 독자들의 지식은 일천하기 짝이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학상이 세계적인 문학상으로 격이 높아진다면 얘기는 또 달라질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 발전은 결국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의 수준이 높아지지 않으면 그것은 한낱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고은 시인의 노벨상 수상을 바라면서도 정작 고은 시인의 시는 읽지 않는 한국인의 이중적인 태도를 감안할 때 한강 작가의 수상은 '한국 문학의 쾌거'라고 확대 해석할 게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문학 볼모지에서 태어난 한 작가의 지난한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제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것도 결국 그 나라의 독서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문화는 사회 전반을 아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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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더웠던 어젯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에어컨 실외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끈한 열기가 몸 전체를 휘감는 듯했다. 거짓말 좀 보태자면 그 시각에 아파트의 전 가구가 에어컨을 틀어 놓은 것만 같았다. 자연의 열기와는 또 다르게 에어컨 실외기의 열기는 사람을 은근히 기분 나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피부의 땀구멍을 모두 막아버리는 듯한 느낌도 드는 것이다. 숨이 멎을 것 같은 후텁지근한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둠이 내려앉은 아파트 놀이터에선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나는 사실 에어컨 바람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차를 운전할 때도, 집에서 책을 읽을 때도 되도록이면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적이나 더우면 선풍기를 틀겠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하면 이따금 부채를 부칠 뿐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마치 돈밖에 모르는 자린고비인 양 생각하여 '지독하다'고 말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을 아끼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바람에 한 달 사용하는 전기료는 다른 집보다 턱없이 적게 나오기는 하지만 말이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을 튼다는 게 나는 마치 무형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느껴져 여간 불편하지 않다. 예컨대 나의 행위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는다면 내가 직접적으로 그 사람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건 엄연히 폭력이 아니겠는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에서 어느 한 집이 경제적인 이유든, 아니면 다른 피치 못할 이유로든 에어컨을 틀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집은 아마도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 놓은 채 선풍기 바람에 의지하여 더위를 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밖에서 들어오는 에어컨 실외기의 열기로 인해 어느 순간 자신의 집을 뛰쳐나오지 않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차량의 에어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에어컨을 작동한 차의 옆에만 다가가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기름값이 아까워서 에어컨을 틀지 않은 채 운전하거나 도보로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에어컨을 튼 차량의 열기는 폭력에 가깝다.

 

내 돈을 내 맘대로 쓰겠다는데 네가 뭔 상관이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과다한 화석연료의 사용은 제 자식을 앞에 두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과 진배없다. "아들, 내가 죽고 난 뒤에 너희들이 어떻게 살든 나는 신경 안 쓸거야. 나는 내가 사는 동안 만큼이라도 편하게 살고싶어. 너가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니까 화석연료 사용 좀 자제하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나는 듣지 않을 거야. 너의 죽음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없어." 나는 이런 비정한 부모로 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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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2017-07-22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뭐 에어컨 좀 켜고 살자는데 그렇게 거창한 이론까지 갖다부치며 상대방을 설파할것 까지야 있겠습니까? 그냥 세상 흐름대로 사는거지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있는 에어컨 까지 못켜고 살게 하는게 같이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야멸차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더위를 견디는 힘이 같은 정도면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미래를 너무 그렇게 절망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것 같아요. 꼭 화석연료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인류는 또 다른 에너지를 개발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며 살아 가지 않겠어요?

꼼쥐 2017-07-26 15:58   좋아요 1 | URL
경제 규모로 볼 때 세계 12위 정도의 국가라면 인류에 대해, 지구 전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감은 느끼면서 살아야겠지요. 트럼프처럼 막무가내의 또라이라면 모르지만 말이죠. 에어컨 사용을 절대적으로 금하자는 게 아니라 사용에 있어 절제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얘기였습니다.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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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 들어 말매미 울음소리를 처음 들었던 건 보름 전쯤으로 기억한다. 도시에 살면서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관심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공적인 것, 인공이 가미된 것에 더 눈길이 간다. 이를테면 새로운 기종의 휴대폰이 출시되었다거나 아파트 주변에 못 보던 상점이 들어섰다거나 하는 경우 나와는 그닥 상관도 없는 일임에도 쉽게 감지하곤 한다.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말이다.

 

인공이 가미된 것은 언제나 사람들의 욕심을 부추긴다. 언젠가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종교적'이라는 말은 '이기적'이라는 말과 동의어인가? 라는 주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대다수의 불행에서 자신만 예외로 해달라거나, 쉽게 타락하는 인간의 영혼이지만 자신이 믿는 전지전능한 신의 권능으로 자신을 지켜달라거나,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도 편안하게 해달라거나 하는 일체의 행위가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뭐냐는 나의 주장에 대해 지인은 만인을 위한 또는 자연계 전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과 그와 같은 순수 목적을 위해 종교는 태어난 것이라는 요지의 주장을 역설했다.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말이 과연 맞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도교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지인은 가볍게 웃었었다.

 

내가 세상을 조금 삐딱하게 보거나 부정적으로 판단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찮은 일이지만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 간혹 들 때도 있지만 이딴 걸 뭐하러 하느냐? 는 생각이 들 때가 더 많으니 말이다. 사람의 성향은 다 제각각인지라 어찌할 수 없는 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낙관적인 성향의 어느 작가를 추종하기보다는 우울하고 때로는 퇴폐적인 심지어 독선적이기까지 한, 그리고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는 이해하기에 다소 난해한 말도 서슴지 않고 했던 밀란 쿤데라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도 따지고보면 다 그런 성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를 읽은 지 벌써 일주일쯤 지났건만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특별한 의욕도 일지 않아서 무작정 시간만 보냈다. 뭉개고 갈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무의미한 세상에 무의미한 일 한두 개쯤 더 생긴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고, 무더위를 빙자한 나태함 또한 나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유혹에 적당히 이끌렸던 것도 사실이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면서 알랭이 아가씨들을 자세히 보니 아주 짧은 티셔츠 차림에 바지는 모두 아슬아슬하게 골반에 걸쳐져서 배꼽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아가씨들이 남자를 유혹하는 힘이 이제는 허벅지도 엉덩이도 가슴도 아닌, 몸 한가운데의 둥글고 작은 구멍에 총집중돼 있단 말인가.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고? 이 소설 첫머리에 쓴 것과 똑같은 단어들로 이번 장을 시작하고 있다고? 나도 안다." (p.47)

 

개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새로운 에로티시즘의 시대를 여는 배꼽, 아무런 이유도 없고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는 거짓말에 빠져드는 일과 스스로 기뻐하는 마음, 농담을 거짓말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오늘, 인간적 고통만을 주는 칼라닌의 방광 등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은 인간 존재의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현대인의 삶은 그저 '무의미의 축제'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그 당시에 나는 무엇보다 당신과 여자들의 관계를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카클리크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죠. 아주 친한 친구인데, 당신은 몰라요. 그래요. 넘어갑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p.147)

 

참고로 다르델로는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기교를 갖춘 인물이다. 반면 카를리크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인데 파티에 참석한 아름다운 여자는 다르델로가 아니라 카를리크를 선택한다.'탁월함은 상대방도 뛰어나야 할 것 같은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보잘것없다는 건 주변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무더위에 지친 오늘, 무뎌진 날씨 탓에 자신조차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꼈다면 한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보잘것없는 당신으로 인해 주변이 얼마나 편안하고 자유롭게 변했는지, 세상은 또 얼마나 달라졌는지. 이제야 비로소 그렇게 보인다면 삶은 곧 축제가 아닌가. 불금, 무의미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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