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빼기의 기술 - 카피라이터 김하나의 유연한 일상
김하나 지음 / 시공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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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거 교장 선생님 훈시가 30분씩 이어지던 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요즘 세상에 그렇게 했다가는 비난이나 야유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도 없겠지만 말이다. '나잇살이나 먹었으면 ...'으로 시작하는 낯뜨거운 비난의 말을 듣지 않는 첫째 비결은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의 몸에서 힘을 빼는 게 우선되어야 할 듯싶다. 위엄을 갖추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거나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어깨에 힘을 주다간 '꼰대'나 '조폭'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런 측면에서 '존경'과 '운동'에는 서로 통하는 점이 있는 게 아니가 싶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애먼 곳에 힘을 주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도 역시 쓸데없는 곳에 힘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게 많아질수록, 자리가 높아질수록 자신의 몸에서 힘을 빼는 방법을 잘 익혀야만 한다. 결국 좋은 삶이란 완벽한 '힘 빼기 기술'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연애도 잘하려고 용을 쓰면 될 일도 안 되는 것이다. 사랑과 매력이란, 전쟁과 권력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힘이다. 주삿바늘 앞에 초연한 엉덩이처럼, 벌레 못 만지는 장수풍뎅이연구회처럼, 힘을 좀 뺀 것들이 세상의 긴장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든다. 엉덩이 비유는 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 글도 힘을 좀 빼고 써보았다." (p.46)

 

카피라이터 김하나가 쓴 <힘 빼기의 기술>은 세상을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억지로 메우기 위해 괜히 근엄한 척 목에 힘을 주거나, 자신의 무지를 들키지 않기 위하여 어려운 한자어나 영어를 힘들여 찾아보거나,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거나 현재의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하여 무리한 다이어트나 헛된 체력단련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뭘 하려고?'의 의미를 가진 경상도 사투리 '만다꼬?'가 어렸을 적 작가 집안의 가훈으로 더 어울렸던 게 아닐까 하는 회고로 책은 시작된다. 아버지의 지시로 '화목'을 가훈으로 써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작가는 이에 덧붙여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거나 힘에 부칠 때면 '만다꼬?'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없는 힘을 쥐어짤 게 아니라 '내가 여기에 힘을 쓸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라는 것이다.

 

"배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뭔가를 가르치려 들 때, 꼰대가 탄생한다. 배움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자기가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려 할 때, 맨스플레인(mansplain)이 시작된다. 세상에는 하늘 같은 선배만큼이나 하늘 같은 후배도 많은 법이다. 진실로 배우려는 사람은 후배뿐 아니라 말 못하는 아기나 반려동물의 행동에서도 깨달음을 얻는다. 배움은 온갖 방향으로 흐른다. 언제 어디서나 귀 기울이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p.105)

 

총 2부로 구성된 이 책에는 작가의 가족과 친구 등 개인사를 담은 'Part 1 가까이에서'에 23꼭지의 글이, 남미를 돌아보며 느끼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Part 2 먼곳에서'에 28꼭지의 글이 실렸다. 짤막짤막한 글들이지만 읽다보면 어느 순간 배시시 웃음이 흐르기도 하고 무겁고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지기도 한다. '그래, 맞아. 뭘 위해서 그렇게 안달복달 속을 끓여야 해?'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삶인데 실수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더러 저지른 실수를 애써 부인하고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그게 내 삶에서 영원히 지워질 리도 없고 있는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바뀔 리도 없지 않은가.

 

"상대가 이러저러하리란 나의 기대로 열렬히 사랑에 빠졌다가 나중에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돌아섰다 치자. 그렇다고 그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건가? 그건 아닐 테다. 착각이였든 오해였든, 그 순간 설레어하고 짜릿했던 마음만은 진실이리라. 인생의 벅찼던 한 시절은, 사건의 결론과는 별개로 아름다운 것이다." (p.264)

 

어른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인생을 좀 더 진지하게 살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 건 저렇게 살 건 어차피 한 번뿐인 삶이다. 무책임하게 내팽개치는 듯한 삶이라면 곤란하겠지만 그렇지만 않다면 무슨 상관이랴 싶은 것이다. 북한의 6차 핵실험이 있었던 오늘, 사람들은 온통 뉴스 보도에 시선을 집중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생각해보면 달리 방법도 없지 않은가. 남은 휴일을 즐겁게 보내는 일 외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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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이성이 몇 대 몇으로 섞이는 게 아니라 격한 감정이 이성을 하나 남김 없이 사그라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무일도 없는 평범한 일상에서 한순간 무너지듯 하나의 감정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도대체 뭐하는 거야? 하실 분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타고난 천성이 그런 걸요.

 

사람이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아마도 아쉬움이라는 감정은 절대 느껴볼 수 없는 감정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망의 실체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모습이지만 희망을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리면 아쉬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희망의 또 다른 얼굴은 아쉬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이 있다는 건 언제나 아쉬움을 동반합니다.

기대가 있으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열정은 아쉬움을 부릅니다.

또는 '~다움'이 당신 곁으로 아쉬움을 불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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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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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순해진 햇살과 물기가 쏙 빠진 보송보송한 바람이 마치 가을을 알리는 전조처럼 다가왔다. 예년에 비하면 무척이나 이른 변화였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자연이 디데이를 기다리며 함구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짜잔 하고 깜짝 이벤트라도 펼치보이려고 했던 것처럼 갑작스럽고 놀라운 변화였다. 사람들은 그런 변화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길었던 여름으로부터 이제야 벗어나게 되었구나 싶었던 게다. 여름을 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지난 여름은 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누군가에게 여름은 단순한 고통의 시간이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여름은 치열한 삶의 흔적이었을 터,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고 했던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여름은 그렇게 각자의 언어로 기록된다.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읽었다. 작가가 토해내는 하나하나의 낱말 알갱이들이 가슴 언저리에 탄환처럼 깊이 박힌다. 흩어지지 않는다. 어느 여름날에 내렸던 우박 알갱이들처럼 고통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바람처럼 저리 쓸려갔다가 다시 또 이리 쓸려오곤 한다. 삶을 어렵게 하는 건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의 가난이나 배고픔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공포가 있고 현실이 힘들수록 동반하여 그 공포는 부풀어오른다. 우리는 그게 두려울 뿐이고, 삶을 힘들게 하는 것 또한 그와 같은 공포 때문이다. 닥친 현실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갈 뿐이다.

 

"시간이 나를 가라앉히거나 쓸어 보내지 못할 유속으로, 딱 그만큼의 힘으로 지나가게 놔뒀다. 나는 관광 명소를 찾지 않고, 신문을 보지 않고, 사진을찍지 않았다. 친구를 사귀지 않고, 티브이를 켜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연락이 오면 문자나 메일로 답했다. 그리고 어느 때는 그마저 하지 않았다." (p.234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에서)

 

<바깥은 여름>에는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입동',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가 그것이다. 소설은 대개 쓸쓸하거나 건조하다. 여름에서 한 뼘쯤 밀려난 듯한 지금의 날씨처럼 각각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뜨거운 삶의 현장에서 힘없이 밀려난 듯한 인상을 받는다. 자신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기인하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런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삶의 부조리'라고 간략하게 요약하기에는 울컥 치미는 뭔가를 자제하기 힘들다.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p.200 '가리는 손' 중에서)

 

'입동'에는 어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그 상실감에 어찌할 바 모르는 부부가 등장한다. 복분자의 붉은 물이 튄 벽에 새로 도배를 하는 부부. 찬바람이 부는 입동의 자정 무렵. 날씨에 더해 부부를 더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들의 흔적이다. 가구를 치우자 그 밑에서 드러난 아들의 삐뚤빼뚤한 낙서. 부부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벽지를 마저 붙이지 못한 채 오열한다.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던 부부가 힘들게 뿌리 내린 곳,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했던 곳이 허공이었다'고 부부는 한탄한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무고한 얼굴로 잤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 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도 마찬가지였다." (p.18 '입동' 중에서)

 

'풍경의 쓸모'는 또 어떤가. 가족이지만 끈끈함이 사라진 관계를 작가는 '프로'라는 말로 대체한다. 새장가를 든 아버지와 아들인 나.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선물을 보내왔고, 성인이 되어 더이상 축하할 일이 남지 않은 나에게 아버지는 돈을 요구한다. 엄마와 함께 사는 나는 나락으로 떨어진 아버지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스스로 관계를 끊었던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허울뿐인 '프로'아버지의 쓸쓸한 말년을 지켜보는 나. 우리도 언젠가 '프로' 아버지, '프로' 엄마, '프로' 아들로 헤어지는 건 아닐까.

 

"그러니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안부가 뜸해졌다면 그건 아버지가 무심해진 탓이 아니라 당신 아들이 웬만한 사회적 의례를 다 마칠 만큼 나이든 까닭이었다. 당신 인생에도 내 삶에도 더이상 박수 치며 축하할 일이 생기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최근 아버지로부터 몇 년 만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나는 그게 당연히 아내의 임신 소식 때문인 줄 알았다." (p.156 '풍경의 쓸모' 중에서)

 

김애란의 소설은 여백을 따라 흥건한 물이 고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더이상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 관계는 이미 생명이 다한 관계라는 걸 작가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눈물이든, 빗물이든 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선 생명이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시급한 건 어쩌면 슬픔의 복원인지도 모른다. 너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것,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를 엮는 관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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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변한 날씨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뚝 떨어진 기온과 물기를 쏙 뺀 바람, 사라진 매미 울음 소리에 사람들은 '이거 실화야? 아직 8월인데?'라는 질문을 누군가에게 묻고 확답이라도 받고 싶어 하는 듯했습니다. 8월 내내 비를 뿌리던 덥고 습한 날씨가 손바닥 뒤집 듯 한순간에 확 바뀌다 보니 얼떨떨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는 없지만 문제는 날씨에 맞춰 몸이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도 감기에 걸린 사람들이 두서너 명 보이고 말이죠.

 

오늘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선고가 내려진 날입니다. 무려 4년을 질질 끌던 재판이었죠. 물론 정권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무죄 취지의 벌금형이나 잘해야 집행유예 정도의 선고가 내려졌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권도 바뀌었고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조직적 선거개입이 확인된 만큼 그럴 수는 없었겠지요. 법원은 국가정보원법.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원 전 원장에게 징역 4년과 자격정지 4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습니다. 그의 범죄 사실에 비하면 턱없이 약한 처벌이 아니냐고 분개하실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흡족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나마 실형이 선고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자위하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서 우리나라 언론이 참으로 문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6학년 학생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선정적인 보도를 무차별적으로 반복해서 내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것이죠. 조금 과하고 절제되지 않은 표현들도 난무하고 말입니다. 뉴스인지 가십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왜 콕 집어 교사가 아닌 '여교사'라고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남자든 여자든 이상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교사 중에 이상한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에서 그칠 일이지 그걸 꼭 '여교사'와 6학년 남학생으로 보도했어야 하는지 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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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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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칠 때, 그 세대를 대표하는 출생연도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G(Global) 세대를 대표하는 건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에 출생한 사람들이라거나, X 세대를 대표하는 1971년생처럼 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회자되는 건 아마도 '58년 개띠'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단순히 1958년 출생자라는 생물학적 개념을 넘어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베이비 부머 세대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58년 개띠'는 미처 말도 떼기 전에 4. 19를 겪고, 이후 5.16, 10.26, 5. 18, 6. 10 등 격변하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다. 개인의 출생마저 자신이 직접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복도 지지리 없는 세대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이비 부머 세대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에코 세대'(1979 ~ 1992년 출생자를 일컫는 말)는 행복했을까?

 

소설가 조남주는 자신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통하여 '에코 세대'의 고충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소설이라기보다 르포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 소설은 베이비 부머 세대가 겪었던 가난(모두가 가난했던 시대에 절대적인 경험으로서의 가난)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가난, 이른바 비교우위에서 오는 상대적인 가난, 성장 과정에서의 갖가지 성 차별, 핵가족화 된 독립세대의 고립과 홀로서기를 주인공 김지영의 시선으로 가감없이, 그리고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김지영'이나 '지영이'가 아니고 '김지영 씨'가 되어야만 했다. '에코 세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이고 보편적인 인물, 그러면서도 여성으로서의 차별은 여전히 견뎌야만 했던 '김지영 씨'에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82년생 '김지영 씨'가 겪었던 경험들이 바로 책을 읽는 우리 자신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꾹 밟고 선 작지만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 어머니는 김지영 씨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p.37)

 

그렇다면 이 소설의 인기는 도대체 무엇에서 비롯되었던 것일까? 주인공의 화려한 성공담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인공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이야기도 아닌데 말이다. 위로는 공부 잘 하는 언니가 한 명 있고, 밑으로는 남동생이 한 명 있는 집안에 공무원으로 명예퇴직한 아버지와 배운 건 없지만 이재에 능한 어머니 밑에서 그럭저럭 공부하여 수도권의 대학에 입학하고, 빚지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고, 산악 동아리에서 만난 남자 친구를 군대에 보내기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김지영 씨. 말하자면 그 세대에 해볼 만한 경험은 다 해본 셈이다. 그렇다고 지방의 그렇고 그런 대학에 입학하여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 알바를 전전하지도 않는다.

 

"김지영 씨는 가슴속에 눈송이들이 설기게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충만한데 헛헛하고 포근한데 서늘하다. 남자 친구의 말처럼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어머니의 말처럼 막 나대면서 잘 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p.109)

 

김지영 씨는 대학을 졸업한 후 중견 홍보대행사에 입사한다. 회사에서 나름 인정도 받고 직장 동료들과의 사이도 무난하다. 모나지 않은 성격의 정대현 씨와 결혼도 한다.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둔다. 전업주부가 된 김지영 씨의 모든 이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게 다였다.

 

"첫 직장이었다. 첫발을 내딛은 세상이었다. 사회는 정글이고, 학교 졸업 후 만난 친구는 진짜 친구가 아니라고들 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합리보다 불합리가 많고, 한 일에 비하면 보상도 부족한 회사였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개인이 되고 보니 든든한 방패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p.145)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낱낱은 매우 사실적이고, 문장은 마치 범죄 사실을 기록하는 형사의 경찰 조서처럼 건조하게 이어진다. 때로는 각주를 달아 페이지의 하단에 참고도서를 명기하기도 한다. 김지영 씨는 이제 일주일에 두 번, 45분씩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김지영 씨를 맡은 의사는 김지영 씨가 산후 우울증에 육아 우울증이 더해진 결과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의사는 자신의 진단이 성급했음을 고백한다.

 

"내가 평범한 40대 남자였다면 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 동기이자 나보다 공부도 잘하고, 욕심도 많던 안과 전문의 아내가 교수를 포기하고, 페이닥터가 되었다가, 결국 일을 그만두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특히 아이가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실 출산과 육아의 주체가 아닌 남자들은 나 같은 특별한 경험이나 계기가 없는 한 모르는 게 당연하다." (p.170)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한순간에 덧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전체에서, 삶의 궤적 모두에서 수없이 부서지고 찢기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반짝 하고 조금쯤 치료되는 듯하다가 다시 또 아팠던 상처가 덧나면서 진행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김지영 씨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 세대나 이 시대의 남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작은 상처들, 예컨대 버스나 지하철에서 임산부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들의 불편만 호소하는 것이라든가, 무심코 내뱉는 성희롱성 농담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가슴에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을 터였다. 작가 조남주의 담담한 고백이 우레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게 나 아닌 다른 이의 삶이다. 어림짐작이 통하지 않는다. 작가가 르포나 다큐멘터리처럼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독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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