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마지막 절기라는 곡우가 지나자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이다. 봄을 훌쩍 건너뛰어 마치 한여름으로 직행한 듯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해는 매년 반복되던 봄 가뭄 걱정에서 말끔히 벗어났다는 것이다. 가뭄이 극심했던 지난해 봄을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한반도의 주변 정세는 긴 겨울을 끝내고 이제 막 해빙 무드에 돌입한 듯 반가운 소식이 연이어 전해진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지도자 한 명을 바꿈으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선거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오늘도 더위는 이어졌다. 미세먼지와 오존으로 대기의 질은 더욱 떨어졌고 말이다. 지방선거의 열기가 높아지는 탓인지 야당의 대여공세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한반도의 운명을 바꿀 남북 정상회담도 곧 개최될 예정이고 북미 정상회담도 이어질 텐데 협조는 못할망정 없는 비리까지 부풀려서 헐뜯으려고 하는 모양새가 국민들 보기에 영 탐탁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해를 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전국의 여론 판세를 보면 어느 곳 하나 야당이 앞선다는 데가 없으니 말이다. 그들 입장에선 다급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까지 잃어서야 되겠는가. 국민들도 이제는 정치인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질릴 대로 질려 어느 집 개가 짖었느냐는 식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말이다.

 

오늘 발표된 기사에서 북한이 핵실험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중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등을 공언하면서 비핵화 의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정상회담에 앞서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선거 때마다 '빨갱이', '종북' 등 말도 안 되는 딱지를 붙여 종북몰이를 했던 자격 없는 정치인들이 말끔히 사라질 듯하다. 대한민국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어떤 정치인은 미세먼지보다 더 해롭다는 걸 국민들이 비로소 깨닫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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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민 2018-04-22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반도 명운이 걸린 역사적 전환기에 사사건건 발목만 잡는 야당들과 기레기들의 행태에 기가 찹니다

꼼쥐 2018-04-22 21:37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지요?
그런다고 이승만 자유당 시절처럼 그들의 말에 놀아날 국민도 없지만 말이죠. 총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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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막을 내린 평창 동계 올림픽을 떠올릴 때마다 '영미'를 다급하게 외치던 '안경 선배'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컬링이라는 다소 낯설고 생경했던 종목에서, 게다가 의성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성장한 4명의 선수와 한 명의 외지인으로 구성된 '팀 킴'은 올림픽 경기가 중계되던 2월 한 달 동안 온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었다. 뿐만 아니라 올림픽이 끝나고서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한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던 걸로 안다. 조용하기만 한 의성이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내린 것도 그들의 영향이 컸을 듯하다. 어쩌면 의성과 같은 작은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지역을 알리고 타 지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을 유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특정 종목의 스포츠에 투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서지현 검사의 TV 인터뷰로 촉발된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전국을 강타했다. 유교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채 과거 자신에게 가해졌던 성추행 사실을 고백한다는 건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쉬쉬하며 숨겨져 왔던 고백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단단하기만 했던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폐습에 작은 균열이 가고, 공공연한 비밀이 세상에 알려져 사실로 확인되면서 우리는 그 추악한 실체로부터 조금씩 멀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베어타운>을 읽고 난 지금,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두 사건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올랐던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베라는 남자>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는 최근에 발표한 이 소설에서 침체되어가는 시골마을 '베어타운'을 중심으로 지역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인권이 부딪혔을 때 이것이 몰고 오는 파장을 적나라하게 파헤쳤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됐건 이 도시는 점점 가망이 없어지고 있다. 무엇에서건 희망을 느껴본 건 먼 옛날의 이야기다.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그와 더불어 인구도 줄고, 매 계절마다 숲이 폐가를 한두 채씩 집어삼킨다. 자랑거리가 있었던 시절에는 시의회에서 이곳으로 진입하는 도로 옆에 당시 유행어가 적힌 표지판을 설치했다. '베어타운 - 아무리 즐겨도 부족한 도시!' 몇 년 동안 누적된 바람과 눈 때문에 '아무리 즐겨도' 부분이 지워졌다. 가끔은 마을 전체가 어떤 철학 실험의 대상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p.14)

 

작가는 쇠락해가는 베어타운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번성했던 옛 시절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에 마을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전국대회 준결승에 진출한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이 우승만 하면 그들의 바람이 현실화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마을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하키팀의 유망주였던 케빈이 페테르 단장의 딸 마야를 성폭행했고 이 장면을 팀의 일원이었던 아맛이 목격하게 된 것이다.

 

베어타운이 배출한 프로 선수로서 귀향하여 청소년 아이스하키팀 단장을 맡고 있는 페테르와 유능한 변호사이지만 남편을 따라 베어타운에 정착한 미라는 큰아들을 잃은 죄책감을 안고 산다. 그런 까닭에 기타와 친구 아나 를 사랑하는 딸 마야와 아들 레오에게 더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마야에게 일어난 비극은 마야의 가족 모두에게도 크나큰 상처가 되었다.

 

"피해자가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고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나중에 누군가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느냐고 물으면 마야는 고개를 끄덕일 테고, 모든 감정 중에서 죄책감이 가장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녀를 가장 사랑한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잔인한 짓을 저질렀으니 말이다." (p.325)

 

그러나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개인의 비극은 공감과 위로를 받기는커녕 비난과 적대감을 갖게 하는 게 다반사이다. 베어타운의 주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마을의 미래로 인정받던 하키팀의 유망주 케빈이었기에 주민들의 반감은 더 컸는지도 모른다. 마야에게 벌어진 끔찍한 일은 하키팀을 와해시키기 위한 음모로 치부되고 피해자인 마야가 처신을 잘못한 탓이라고 비난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얼 때 피해자가 의지할 수 있는 건 가족과 이웃의 사랑뿐인데 말이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신기하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시작하게 된 기점이 있는데, 이 사랑만큼은 아니다. 항상 사랑했고 심지어 아이가 존재하기 전부터 그랬다. 아무리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도 엄마와 아빠들은 감정의 파도가 그들을 치고 지나가서 완전히 나가떨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평생 암실에서 지낸 사람에게 발가락 사이로 들어온 모래나 혀끝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은 영혼을 비행하게 만든다." (p.487)

 

때로는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불어닥친 역경으로 인해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하게도 되고 전에 없이 더욱 단단해진 결속력을 선보이게도 된다. 그러면서 가족들 모두는 한 단계 더 성장하기도 한다. 한 사회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사회 구성원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게 아닐까. 지금 우리는 비록 서로의 아픔을 듣고 공감하는 단계이지만 언젠가는 서로를 용서하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웃음기 쏙 뺀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이 낯설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등장인물의 성격과 성장 배경을 실감 나게 다룸으로써 소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다. 봄밤에 번지는 라일락 향기처럼 농염한 원숙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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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보던 풍경도 기분에 따라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풍경은 기억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일종의 창조물인 동시에 우리는 평생 동안 창조자로서 살아갈 운명을 타고난 셈이 된다. 좋든 싫든 말이다. 어제는 하늘도 맑고 기온도 제법 올라 봄을 만끽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지만 4년 전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 어둡고 답답하게만 보였다.

 

오늘은 다시 찾아온 미세먼지 때문인지 하늘이 뿌옇다. 한낮에는 덥다 싶다가도 해만 떨어지면 곤두박질 치는 기온 탓에 몸도 제대로 적응을 못 하는지 피곤하기만 하다. 충분히 잠을 잔 듯한데도 몸은 여전히 무겁고 오후만 되면 시도 때도 없이 식곤증이 몰려오곤 한다.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갑질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녹음된 파일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여자가 정말 제정신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으리라.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대뜸 든 생각은 '또라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단지 출신성분이 좋다는 이유로 고속승진으로도 모자라 다른 직원들에게 이와 같은 미친 짓거리를 일삼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우리나라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기업 프렌들리를 외치는 많은 권력자의 비호 아래 평생을 호의호식하는 것은 물론 직장 내에서는 제왕처럼 군림할 수 있으니 그들에게는 대한민국이 파라다이스가 아닐 수 없으리라.

 

20여 년 전 영어회화 열풍이 불었던 시기에 영어학원 강사로 와 있던 어느 외국인의 말이 생각난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그와 가까워지기를 원했던 많은 여대생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월급에서 생활비를 거의 지출하지 않음은 물론 술과 유흥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즐길 수 있다고 뻐기듯 말하면서 한국은 파라다이스라고도 했다. 조현민의 국적도 미국인이라고 하니 불현듯 그때의 일이 오버랩된다. 재벌가 자녀라는 이유로 온갖 천한 짓도 눈감아주는 그런 모습은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늘이 여전히 뿌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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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 넘어진 듯 보여도 천천히 걸어가는 중
송은정 지음 / 효형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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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담이든 실패담이든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일에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것은 비단 소심한 성격인 나와 같은 부류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닌 듯하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내보인다는 게 어쩜 그렇게 어려운지... 아무 일도 아닌 듯 그저 툭 하고 내던질 수도 있을 텐데 그게 어려운 것이다. 현대인은 태어나서 제일 먼저 자신을 감추는 방법부터 배우게 된다던 어느 지인의 말은 내게도 유효한가 보다.

 

"2016년 8월 31일 수요일.

여행책방 일단멈춤이 문을 닫았다.

안녕을 고하는 자리는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오후 1시에 출근해 미처 다 치우지 못한 쓰레기를 버리고 청소를 했다. 화분 몇 개는 이웃 가게인 식물성에 맡겨두었다. 책방에 인격이 있었다면 이 무심한 끝이 속상했을지도 모른다." (p.179)

 

송은정 작가의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는 분명 실패담이다. 작가는 그러나 마치 남의 얘기를 전하는 듯 그저 조용하고 무덤덤하다. 일부러 그런 척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자신이 하던 사업을 접을 때의 느낌이 이토록 담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얇고 아담한 이 책에 한동안 집중한다.

 

염리동 주택가에 자리했던 그녀의 책방은 고작 2년여를 버텼을 뿐이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고 평균 8시간 이상을 일했는데 월 순이익은 평균 60~80만 원 선. 부족한 수입을 메꾸기 위해 저녁마다 워크숍을 돌리면서부터 창업 초창기에 그녀가 가졌던 다짐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만다. '적게 벌고 적게 일하겠다'는 낭만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았던 그녀의 다짐은 무참히 깨졌다. 게다가 그녀의 기대나 바람과는 반대로 작은 책방들이 늘어나면서 그녀의 스트레스도 증가했다. '다른 삶'을 원해서 책방을 시작했건만 작가는 방콕에 있는 어느 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남자친구보다 자신이 더 흥분하기도 한다.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순간의 감정에 끊임없이 감응했다. 생기가 넘친다. 살아 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나를 꿈에 부풀게 한 이 모든 풍경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의 시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디에도 영원한 저곳은 없다. 지금의 이 흥분도 시간과 함께 퇴색할 예정이었다. 저곳은 다시 '이곳'이 되어 나를 낙담케 하겠지." (p.126)

 

일단멈춤이 문을 열고 닫기까지 2년의 시간을 이 책에 모두 담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게 어설프고 서툴기만 했던 작가도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내성적인 자신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서점을 찾는 어느 손님의 연애상담을 하기에도 이른다. 그러나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정제되고 다소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작가가 서점을 열었던 길다면 길었던 시간 동안의 극히 짧은 순간들을 스냅사진처럼 보여줄 뿐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의 길었던 시간들은 책에 없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기억 속에 화석처럼 굳어진 채 말라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만 생각하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언제나 그 기준을 떠올렸다. 결정을 통해 얻는 위로와 이득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맞닥뜨린 한계를 직시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사과할 일이 있다면 고개를 숙이고, 고마웠던 일엔 미소를 보내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나는 지난 시간을 성급히 봉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일단멈춤을 실패의 경험으로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나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p.167~p.168)

 

좋아하던 만화도 교과서에 실리면 읽기 싫어지는 것처럼 아무리 좋아하던 취미도 정작 일이 되면 지긋지긋해지는 법이다. 책방을 하면서 글도 쓰겠다던 작가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작은 실패를 경험 삼아 어느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큰 실패를 대비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우리 앞에 놓인 죽음을 완결이나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실패는 우리가 극구 피해가야 할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배우고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담담히 수용해야 할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이 가치 있는 이유도 작가의 실패담이 좌절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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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지어낸 고슬고슬한 쌀밥처럼 조팝나무의 흰 꽃들이 어찌나 탐스럽던지요. 어제는 새벽부터 비가 내렸지요. 바람도 불고 기온도 떨어져 사뭇 을씨년스러운 날씨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핑계로 아침 산행을 하루 거른 채 주말 아침의 느긋한 게으름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심하게 닦달할 것도 아닌데 산행을 하루만 걸러도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 올라오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에는 일찍부터 잠에서 깨었고 시간이 되기만 마냥 기다릴 것도 없이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의 새벽 등산로는 무척이나 조용했습니다. 비 온 뒤끝의 먹장구름 몇 장이 새벽 어스름을 한층 더 어둡게 하는 듯했고,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런 나를 반겨주었던 게 조팝나무 꽃이었습니다. 한 무더기의 환한 그 꽃이 주변의 어둠을 조금쯤 밀어내는 듯했었지요. '어찌나 희고 눈부신지 잠깐만 바라보고 있어도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고 했던 이외수 작가의 표현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멀찍이서 그저 바라보며 몽롱한 향기에 취해 있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다가갔습니다. 이리저리 매만지면서도 여린 꽃잎이 떨어질세라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습니다. 손이 긁힌 줄도 몰랐습니다. 산을 내려와 손을 씻을 때 엄지손가락의 손톱 밑 살이 쓰라렸습니다. '너는 살성이 좋아 덧나지 않고 잘 낫는다.'고 했던 어릴 적 어머니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중간고사가 열흘쯤 남았다는 아들을 따라 동네 도서관에 나왔습니다. 와카마쓰 에이스케가 쓴 '슬픔의 비의', 김별아 작가의 '도시를 걷는 시간',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를 빌렸습니다. 지금 나는 도서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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