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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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막을 내린 평창 동계 올림픽을 떠올릴 때마다 '영미'를 다급하게 외치던 '안경 선배'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컬링이라는 다소 낯설고 생경했던 종목에서, 게다가 의성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성장한 4명의 선수와 한 명의 외지인으로 구성된 '팀 킴'은 올림픽 경기가 중계되던 2월 한 달 동안 온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었다. 뿐만 아니라 올림픽이 끝나고서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한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던 걸로 안다. 조용하기만 한 의성이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내린 것도 그들의 영향이 컸을 듯하다. 어쩌면 의성과 같은 작은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지역을 알리고 타 지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을 유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특정 종목의 스포츠에 투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서지현 검사의 TV 인터뷰로 촉발된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전국을 강타했다. 유교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채 과거 자신에게 가해졌던 성추행 사실을 고백한다는 건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쉬쉬하며 숨겨져 왔던 고백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단단하기만 했던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폐습에 작은 균열이 가고, 공공연한 비밀이 세상에 알려져 사실로 확인되면서 우리는 그 추악한 실체로부터 조금씩 멀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베어타운>을 읽고 난 지금,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두 사건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올랐던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베라는 남자>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는 최근에 발표한 이 소설에서 침체되어가는 시골마을 '베어타운'을 중심으로 지역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인권이 부딪혔을 때 이것이 몰고 오는 파장을 적나라하게 파헤쳤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됐건 이 도시는 점점 가망이 없어지고 있다. 무엇에서건 희망을 느껴본 건 먼 옛날의 이야기다.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그와 더불어 인구도 줄고, 매 계절마다 숲이 폐가를 한두 채씩 집어삼킨다. 자랑거리가 있었던 시절에는 시의회에서 이곳으로 진입하는 도로 옆에 당시 유행어가 적힌 표지판을 설치했다. '베어타운 - 아무리 즐겨도 부족한 도시!' 몇 년 동안 누적된 바람과 눈 때문에 '아무리 즐겨도' 부분이 지워졌다. 가끔은 마을 전체가 어떤 철학 실험의 대상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p.14)

 

작가는 쇠락해가는 베어타운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번성했던 옛 시절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에 마을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전국대회 준결승에 진출한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이 우승만 하면 그들의 바람이 현실화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마을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하키팀의 유망주였던 케빈이 페테르 단장의 딸 마야를 성폭행했고 이 장면을 팀의 일원이었던 아맛이 목격하게 된 것이다.

 

베어타운이 배출한 프로 선수로서 귀향하여 청소년 아이스하키팀 단장을 맡고 있는 페테르와 유능한 변호사이지만 남편을 따라 베어타운에 정착한 미라는 큰아들을 잃은 죄책감을 안고 산다. 그런 까닭에 기타와 친구 아나 를 사랑하는 딸 마야와 아들 레오에게 더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마야에게 일어난 비극은 마야의 가족 모두에게도 크나큰 상처가 되었다.

 

"피해자가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고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나중에 누군가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느냐고 물으면 마야는 고개를 끄덕일 테고, 모든 감정 중에서 죄책감이 가장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녀를 가장 사랑한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잔인한 짓을 저질렀으니 말이다." (p.325)

 

그러나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개인의 비극은 공감과 위로를 받기는커녕 비난과 적대감을 갖게 하는 게 다반사이다. 베어타운의 주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마을의 미래로 인정받던 하키팀의 유망주 케빈이었기에 주민들의 반감은 더 컸는지도 모른다. 마야에게 벌어진 끔찍한 일은 하키팀을 와해시키기 위한 음모로 치부되고 피해자인 마야가 처신을 잘못한 탓이라고 비난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얼 때 피해자가 의지할 수 있는 건 가족과 이웃의 사랑뿐인데 말이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신기하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시작하게 된 기점이 있는데, 이 사랑만큼은 아니다. 항상 사랑했고 심지어 아이가 존재하기 전부터 그랬다. 아무리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도 엄마와 아빠들은 감정의 파도가 그들을 치고 지나가서 완전히 나가떨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평생 암실에서 지낸 사람에게 발가락 사이로 들어온 모래나 혀끝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은 영혼을 비행하게 만든다." (p.487)

 

때로는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불어닥친 역경으로 인해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하게도 되고 전에 없이 더욱 단단해진 결속력을 선보이게도 된다. 그러면서 가족들 모두는 한 단계 더 성장하기도 한다. 한 사회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사회 구성원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게 아닐까. 지금 우리는 비록 서로의 아픔을 듣고 공감하는 단계이지만 언젠가는 서로를 용서하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웃음기 쏙 뺀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이 낯설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등장인물의 성격과 성장 배경을 실감 나게 다룸으로써 소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다. 봄밤에 번지는 라일락 향기처럼 농염한 원숙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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