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라는데 비는 오지 않고 날씨는 그저 무덥기만 하다. 밤에도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바람도 없고 습도가 높은 탓인지 창문을 열어젖히고 선풍기를 틀어도 땀만 줄줄 흐를 뿐 조금이라도 시원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더위를 일컫는 말이 '불볕더위', '가마솥더위', '찜통더위' 등 많이도 생겼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그만큼 지구 기온이 급변했다는 뜻이리라.


더위로 인해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지다 보니 아침 운동을 나가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게다가 산에는 피에 굶주린 모기떼가 어찌나 극성인지 아무리 더워도 반팔 운동복을 입을 수가 없다. 그러자니 땀은 비 오듯 흘리게 되고 땀 냄새를 맡은 모기는 '옳다구나' 하면서 더욱 달려들어, 모기를 쫓으랴 더위를 식히랴 이중으로 고생을 하는 처지에 놓이곤 한다. 이런 처지이다 보니 '오늘은 운동을 나가지 말까?' 하는 유혹에 시달리는 건 당연지사, 두 눈을 질끈 감지 않으면 나는 너무도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갈 것 같은 위험을 감지하곤 한다. 더위가 마냥 나쁜 것은 아니어서 한밤중에 잠에서 깨면 딱히 할 일이 없는 나는 책을 읽곤 한다. 말하자면 책 읽는 시간이 전에 비해 조금 늘었다는 점은 더위가 내게 주는 혜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백온유의 소설 <경우 없는 세계>를 읽고 있다. 가출 청소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백온유 작가 특유의 섬세한 필체로 인해 독자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돌아가는 일은 좀체 발생하지 않는다. 장면 하나하나가 다 수긍이 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가출 경험이라는 게 책이나 언론을 통한 간접경험일 테지만 말이다.


"어머니 지갑에 있던 현금이 떨어져갈수록 마음은 초조해졌고 남은 돈으로는 하루나 이틀 정도 버틸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슬그머니 휴대폰을 켰다. 걱정이 가득한 연락이 얼마나 와 있을지, 이쯤하고 못 이기는 척 집으로 돌아가는 게 유일한 선택지가 아닐지 생각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어머니에게서는 내가 도망친 당일에만 몇차례 전화가 왔었고 다음 날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더이상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었고 그게 아버지의 뜻이라는 걸 나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p.37)


오늘도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오늘 밤에도 나는 몇 번을 깼다 다시 잠들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장마가 끝나고 시작되는 본격적인 무더위는 아직 맛도 보지 않았는데 2025년의 더위도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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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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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어느 시점의 나는 대하소설을 좋아했었다. 적어도 3권 이상의 대하소설만 좋아했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한 권으로 끝나는 단행본의 소설은 너무 빠르게 끝이 나는 바람에 읽다 보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나의 소설을 적어도 몇 날 며칠 동안 읽고, 생각하고, 음미하면서 하루의 일과를 마칠 때마다 소설의 남은 부분을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을 내며 귀가를 서두르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내게 단행본의 소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길이 면에서 그보다 훨씬 짧은 단편소설집이 눈에 띌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랬던 내게 단편소설이 주는 재미를 가르쳐 준 작가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쓴 앤드루 포터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쓴 테드 창이었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호흡과 인내력이 짧아진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가 없었더라면 폴 윤의 소설집 <벌집과 꿀>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폴 윤'은 내게 무척이나 생소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낯을 가리는 것처럼 나는 작품을 통한 작가와의 교분에 있어서도 무척이나 낯을 가리는 편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아는 몇몇 작가의 작품만 주구장창 읽어대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다. 편애하는 소수의 작가들 사이에 '폴 윤'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여러 작가군에 속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뉴욕에 사는 여동생으로부터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유명 작가의 책을 이따금 선물처럼 받아보고는 있지만 그곳에서도 '폴 윤'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바 없었다. '폴 윤이 그린 이미지 너머에는 너무 먼 곳과 너무 오래된 이야기가 낭떠러지 아래의 드넓은 해안처럼 펼쳐져 있다.'고 쓴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 한 구절이 나를 이해시켰듯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런 까닭인지 그의 소설집 <벌집과 꿀>에는 한국을 향한 디아스포라의 감성이 곳곳에 녹아 있었다.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보는 붕대를 목도리처럼 목에 걸친 다음 양쪽 끝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아들을 몬트리올 어딘가에 두고 자신의 두 번째 삶을 떠나 이곳으로 돌아오는 카로를 상상해 보았다. 그는 잭슨하이츠에서 빨래방을 하던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의 얼굴을 기억해내려고 한 번 더 애를 썼다. 그 할머니도 기지에 있던 미군들을 알고 있었다. 보가 세탁기 청소를 도와줄 때면 할머니는 보에게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묻곤 했다. 보가 대답을 해도 할머니는 기억하지 못했다."  (p.52)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고향이나 모국을 떠난 이방인이다.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든 간에 그들은 현재 낯설고 막연한 곳에 던져져 있다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과거 어느 시점의 공간을 그리워하고 현재의 장소에서 마주해야 할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와 같은 현실은 작가의 감성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한국전쟁 때 탈북 피난민이었던 조부가 미국에 이주하여 정착하고 작가 역시 퀸스에서 태어난 후 여러 곳을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살아왔던 이력으로 인해 자신 역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벌집과 꿀』은 그가 팬데믹을 거치며 쓴 단편소설들을 모은 책이다. 에도시대 일본, 19세기 연해주의 고려인 정착지, 한국전쟁 직후 남한의 외딴 산골을 거쳐 현대의 미국과 영국까지, 이 소설들 속 시공간의 폭이 이토록 광활한 건 가장 고립되고 단절된 시기를 거치는 동안 최대한 멀리까지 뻗어 나가 누군가와 연결되고팠던 작가의 열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p.294 '옮긴이의 말' 중에서)


장편소설에 비해 분량이 턱없이 짧은 단편소설의 경우 하나하나의 문장에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제대로 싣지 못하면 구성의 긴밀성을 아무리 잘 유지한다 해도 독자들에게 주제를 명확히 전달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이를테면 묘사를 통해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도 작가의 감정은 그 언저리에서 줄곧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폴 윤의 소설집 <벌집과 꿀>은 일견 성공한 듯 보인다. 공간적 배경이 어느 곳이든, 시대적 배경이 어느 시대이건 간에 작가가 구성하는 문장 하나하나에서 디아스포라의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럭에서 뛰어내린 개가 막심을 따라온다. 그들은 언덕에 위치한 도시로 함께 들어선 다음 곧장 해안으로 향해 간다. 차가운 오후 바람에는 모래가 섞여 있고, 육중한 소리가 가득 실려 있다. 막심은 그게 파도 소리라는 걸 아직 알지 못한다."  (p.217)


좋든 싫든 일정한 나이가 되면 우리는 모두 디아스포라가 된다. 어떤 공간으로부터 멀어진 게 아니라 떠나기 싫었던 어떤 시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한 나이가 되기 전에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와 같은 감정은 모국을 떠나 타국을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그것과 사뭇 닮아 있는 듯 보인다. 젊은 시절에 자주 듣던 노래가 어느 길모퉁이에서 들려올 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동안 울컥하는 향수에 젖을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내가 폴 윤의 소설집 <벌집과 꿀>을 내처 읽은 후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알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망연자실 넋을 놓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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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가 있다. '긁어 부스럼'이라고나 할까. 안 해도 될 일을 공연히 나서서 시작하는 바람에 없던 화를 자초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럴 때 일을 시작하기 전 상태로 되돌아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미 시작된 일이라 섣불리 발을 뺄 수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을까, 후회가 막심하지만 살다 보면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경우는 너무나 흔해서 나도 모르게 제 머리를 쥐어박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사람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확히 둘로 나누어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하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각박할 것이며, 또 얼마나 재미가 없을 것인가. 그랬더라면 아마도 예술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만 예를 들어보더라도 모든 소설의 출발은 주인공의 비이성적인 실수 혹은 우연으로 빚어진 실패에 의해 꾸려지는, 평범하지 않은 삶이 소재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랑이라는 결실도 비이성적인 행동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까닭에 예술의 흔한 소재인 사랑은 삶의 우연인 동시에 예술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시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공연히 저질러서 얻게 되는 실패담 혹은 그에 대한 후회나 아쉬운 감정을 읊는 것이 대부분이고, 자주 읽히는 산문 역시 우연으로 빚어진 여러 에피소드의 집합일 뿐이다. 인간의 삶이란 본디 8할의 '긁어 부스럼'인데 100%의 완벽함 혹은 100%의 이성적 행동을 요구하는 자기계발서를 따라 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이란 다분히 운에 의해 이루어진 바람직한 결과라고 이해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내가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에 연루되어 시간적으로 혹은 금전적으로 약간의 손해를 보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 일은 하지 말라는 말씀.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직접 경험을 점차 사라지게 한다. 실패든 성공이든 경험 자체가 소멸하는 것이다. 크리스틴 로젠이 쓴 <경험의 멸종(The Extinction of Experience)>은 이와 같은 세계에 대한 경고를 잊지 않는다.


"인간의 미덕을 되찾고 가장 뿌리 깊은 인간의 경험을 멸종의 위기에서 구하려면 기술 예찬론자들이 제안하는 극단적인 변혁 프로젝트에 기꺼이 한계를 두어야 한다. 혁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써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한계 말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육신이 있는, 기발하고 모순적이며 회복력 있고 창의적인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  (p330~p.331)


날씨가 무덥다. 이러한 '무덥다'는 느낌도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 어느 순간 인터넷의 가상공간에서 체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직접 체험이 가능한 현실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만남은 오직 SNS를 통한 간접적인 것에 그칠 뿐 얼굴을 맞대고 앉아 종일 수다를 떨거나 오늘처럼 무더운 날에 기꺼이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는 일은 우리의 경험 체계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 세상이 오면 예술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크게 달라질 것이다. 직접 경험이 없는 인간에게 어떤 쇼킹한 장면이나 사건도 별 감흥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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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자국들 - 한하리, 첫 번째 이야기 낮이밤적 글모음 2
한하리 지음 / 보민출판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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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결국 수줍은 언어라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제 마음을 쉽게 내보일 수 없는 내밀한 언어. 어림짐작은 허용되지만 단 하나의 정답으로 결코 정의되지 않는 폭 넓은 언어. 시를 읽는 어떤 이의 마음도 시인의 마음과 동화될 수 있는 만능의 언어. 많지 않은 낱말과 문장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헤집어놓을 수 있는 마법의 언어. 어쩌면 시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시를 읽는 내가 시인이 생각하는 그쪽으로 기꺼이 건너가지 않는다면 해독불가의 암호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과거 어느 시점의 나는 무척이나 시를 좋아했었다. 의미보다는 감정으로 먼저 전달되던 시어간의 밀접한 조합이 좋았고, 노랫말처럼 기억되던 시의 리듬이 좋았다. 그러므로 시를 읽기 전에는 언제나 준비가 필요했었다. 책상 위에는 시의 여백을 닮은 정갈함이 놓여야 하고, 마음에는 새벽녘의 고요가 깃들어야 했다.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날에는 시를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읽은 시어가 하나하나의 낱글자로 읽힐 뿐 그것들이 사다리가 되어 시의 가슴에 닿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게 갖추어진 날에는 첫행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시인이 손을 내미는 그쪽 어딘가로 펄쩍 건너뛸 수 있었다.


비 냄새


비가 온다.

젖은 슬리퍼의 안쪽에

마침내 스러져 가는 내가 있다.

새로 산 우산에 당신의 손때가

안개처럼 자욱하다.

물 밖의 헐떡이는 구피는

내던져졌는가? 스스로 튀어나왔는가?

젖은 바닥은 과연 자유로운가?

자비 없이 돌발하는 아련한 향기에

물 머금은 비통한 오르가즘이 잉크처럼 번진다.


'지나온 감정의 시간들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쓴 기록'이라는 한하리의 시집 <감정의 자국들>은 그래서 더 깊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1부 '사랑 이전의 불안', 제2부 '겁 많은 사랑은 끝내', 제3부 '다정의 학습'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혹은 수많은 이별을 통하여 다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면서 애쓰고 노력하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게 크게 잘못되었음을 시인은 자신의 지난 기록이자 자신이 쓴 시를 통하여 자분자분 이야기하고 있다.


추억, 변곡


당신이 젖은 입천장을 더듬어가며

애써 기억해 낸 그날의 그 온도는

어쩌면 당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환상 덕에 당신이

다시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을 통해 사랑의 온기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의 온기는 단순히 확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내 가슴을 덥히고 한 걸음 한 걸음 다정한 인간으로 나아가게 한다. 한 토막의 미움을 지우면 그에 비례하여 한 토막의 사랑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는 온통 다정함이 넘치는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 쓰는 위로의 말, "어쩔 수 없었어"를 상처를 주기 위한 면죄부로 쓰지 말 것'이라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나에 대한 면죄부로 쓰였던 말, "어쩔 수 없었어"


6월의 마지막 주말. 장마가 쉬어가는 하늘엔 언뜻언뜻 흰구름이 번지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그늘 속으로 스며들었다. 삶은 시간의 거미줄에 갇혀 끝없이 파닥거리는 작은 몸부림에 불과하지만 오늘처럼 누군가의 시를 읽다 보면 또 이렇게 한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사방이 막힌 사무실에서 나는 소리를 죽여 자유를 외친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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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시간에 침대에서 현관문까지의 거리는 마치 천리 길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침 운동을 아무리 오래 한 사람도 그 거리는 잘 좁혀지지 않는다. 불규칙적인 빗소리에 이따금 잠에서 깼다 다시 잠들곤 했던 나는 알람 소리를 듣고도 한참이나 갈등했다. 저 현관문을 열고 나가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몸에 붙은 잠기운을 툭툭 털어낼 거냐 아니면 아침 운동을 거른 채 밀린 잠을 내처 잘 거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것이다. 유혹은 아주 깊고 달콤했지만 나는 결국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새벽 산행에 나섰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여전히 어두웠다. 간밤에 내린 비로 숲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는 듯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천연덕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까치의 울음소리가 악다구니처럼 들렸다. 잠에 취해 좀처럼 힘이 붙지 않던 다리도 등산로 초입의 계단을 다 오를 즈음부터 생기가 돌았다. 가파른 경사로에서 쓸려 내려온 낙엽 더미가 평지의 끝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퇴비처럼 쌓여 있었다. 인근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선 벌써부터 중장비 소리가 요란했다.


능선에 위치한 '산스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은 늘 만나던 사이인데 올해부터는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마주칠 뿐 좀체 만날 수가 없었던 분이었다. 성함도 알지 못하는 그분을 나는 언제나 '멋쟁이 할아버지'로 기억하곤 했다. 머리는 완전한 백발이지만 연세에 비해 풍채가 좋은 그분은 내가 산행에 나서는 그 시각에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마주치곤 했었다. 손안에 호두알을 움켜쥔 채 열심히 굴리기도 하고, 정상에 올라 손바닥을 세게 마주쳐 크게 박수를 치기도 했었는데... 그럼에도 걸음은 언제나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산스장'에서 나와 함께 몸을 풀면서 조금 힘겨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전에는 거의 매일 만나던 분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욕쟁이 할머니'로 기억하던 분이었다. 60줄에 들어선 따님을 앞세우고 열심히 산에 오르던 분이었다. 그러나 80대 후반의 연세가 된 그분 역시 이제는 더이상 산에 오를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하셨다고 했다. 따님과 함께 아파트 인근의 공원을 몇 바퀴 도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멋쟁이 할아버지' 역시 이제는 매일 산에 오르는 게 힘에 겨워 일주일에 한두 번 오르는 게 전부라고 했다. 매일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줘서 고마웠다며 멋쩍은 고백을 하는 '멋쟁이 할아버지'. 그분도 이제 80대 후반의 연세가 되셨다고 했다. 나는 그분께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살 날이 많이 남은 사람은 특정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이 크고,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은 미안함보다는 고마움이나 감사함이 더 큰 법이다. 내가 '멋쟁이 할아버지'에게 나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멋쟁이 할아버지'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내게 고마움을 고백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나도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미안함보다 고마움이 앞서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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