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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평점 :
과거 어느 시점의 나는 대하소설을 좋아했었다. 적어도 3권 이상의 대하소설만 좋아했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한 권으로 끝나는 단행본의 소설은 너무 빠르게 끝이 나는 바람에 읽다 보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나의 소설을 적어도 몇 날 며칠 동안 읽고, 생각하고, 음미하면서 하루의 일과를 마칠 때마다 소설의 남은 부분을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을 내며 귀가를 서두르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내게 단행본의 소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길이 면에서 그보다 훨씬 짧은 단편소설집이 눈에 띌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랬던 내게 단편소설이 주는 재미를 가르쳐 준 작가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쓴 앤드루 포터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쓴 테드 창이었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호흡과 인내력이 짧아진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가 없었더라면 폴 윤의 소설집 <벌집과 꿀>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폴 윤'은 내게 무척이나 생소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낯을 가리는 것처럼 나는 작품을 통한 작가와의 교분에 있어서도 무척이나 낯을 가리는 편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아는 몇몇 작가의 작품만 주구장창 읽어대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다. 편애하는 소수의 작가들 사이에 '폴 윤'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여러 작가군에 속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뉴욕에 사는 여동생으로부터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유명 작가의 책을 이따금 선물처럼 받아보고는 있지만 그곳에서도 '폴 윤'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바 없었다. '폴 윤이 그린 이미지 너머에는 너무 먼 곳과 너무 오래된 이야기가 낭떠러지 아래의 드넓은 해안처럼 펼쳐져 있다.'고 쓴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 한 구절이 나를 이해시켰듯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런 까닭인지 그의 소설집 <벌집과 꿀>에는 한국을 향한 디아스포라의 감성이 곳곳에 녹아 있었다.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보는 붕대를 목도리처럼 목에 걸친 다음 양쪽 끝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아들을 몬트리올 어딘가에 두고 자신의 두 번째 삶을 떠나 이곳으로 돌아오는 카로를 상상해 보았다. 그는 잭슨하이츠에서 빨래방을 하던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의 얼굴을 기억해내려고 한 번 더 애를 썼다. 그 할머니도 기지에 있던 미군들을 알고 있었다. 보가 세탁기 청소를 도와줄 때면 할머니는 보에게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묻곤 했다. 보가 대답을 해도 할머니는 기억하지 못했다." (p.52)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고향이나 모국을 떠난 이방인이다.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든 간에 그들은 현재 낯설고 막연한 곳에 던져져 있다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과거 어느 시점의 공간을 그리워하고 현재의 장소에서 마주해야 할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와 같은 현실은 작가의 감성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한국전쟁 때 탈북 피난민이었던 조부가 미국에 이주하여 정착하고 작가 역시 퀸스에서 태어난 후 여러 곳을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살아왔던 이력으로 인해 자신 역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벌집과 꿀』은 그가 팬데믹을 거치며 쓴 단편소설들을 모은 책이다. 에도시대 일본, 19세기 연해주의 고려인 정착지, 한국전쟁 직후 남한의 외딴 산골을 거쳐 현대의 미국과 영국까지, 이 소설들 속 시공간의 폭이 이토록 광활한 건 가장 고립되고 단절된 시기를 거치는 동안 최대한 멀리까지 뻗어 나가 누군가와 연결되고팠던 작가의 열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p.294 '옮긴이의 말' 중에서)
장편소설에 비해 분량이 턱없이 짧은 단편소설의 경우 하나하나의 문장에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제대로 싣지 못하면 구성의 긴밀성을 아무리 잘 유지한다 해도 독자들에게 주제를 명확히 전달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이를테면 묘사를 통해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도 작가의 감정은 그 언저리에서 줄곧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폴 윤의 소설집 <벌집과 꿀>은 일견 성공한 듯 보인다. 공간적 배경이 어느 곳이든, 시대적 배경이 어느 시대이건 간에 작가가 구성하는 문장 하나하나에서 디아스포라의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럭에서 뛰어내린 개가 막심을 따라온다. 그들은 언덕에 위치한 도시로 함께 들어선 다음 곧장 해안으로 향해 간다. 차가운 오후 바람에는 모래가 섞여 있고, 육중한 소리가 가득 실려 있다. 막심은 그게 파도 소리라는 걸 아직 알지 못한다." (p.217)
좋든 싫든 일정한 나이가 되면 우리는 모두 디아스포라가 된다. 어떤 공간으로부터 멀어진 게 아니라 떠나기 싫었던 어떤 시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한 나이가 되기 전에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와 같은 감정은 모국을 떠나 타국을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그것과 사뭇 닮아 있는 듯 보인다. 젊은 시절에 자주 듣던 노래가 어느 길모퉁이에서 들려올 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동안 울컥하는 향수에 젖을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내가 폴 윤의 소설집 <벌집과 꿀>을 내처 읽은 후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알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망연자실 넋을 놓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