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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자국들 - 한하리, 첫 번째 이야기 ㅣ 낮이밤적 글모음 2
한하리 지음 / 보민출판사 / 2025년 5월
평점 :
시는 결국 수줍은 언어라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제 마음을 쉽게 내보일 수 없는 내밀한 언어. 어림짐작은 허용되지만 단 하나의 정답으로 결코 정의되지 않는 폭 넓은 언어. 시를 읽는 어떤 이의 마음도 시인의 마음과 동화될 수 있는 만능의 언어. 많지 않은 낱말과 문장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헤집어놓을 수 있는 마법의 언어. 어쩌면 시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시를 읽는 내가 시인이 생각하는 그쪽으로 기꺼이 건너가지 않는다면 해독불가의 암호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과거 어느 시점의 나는 무척이나 시를 좋아했었다. 의미보다는 감정으로 먼저 전달되던 시어간의 밀접한 조합이 좋았고, 노랫말처럼 기억되던 시의 리듬이 좋았다. 그러므로 시를 읽기 전에는 언제나 준비가 필요했었다. 책상 위에는 시의 여백을 닮은 정갈함이 놓여야 하고, 마음에는 새벽녘의 고요가 깃들어야 했다.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날에는 시를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읽은 시어가 하나하나의 낱글자로 읽힐 뿐 그것들이 사다리가 되어 시의 가슴에 닿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게 갖추어진 날에는 첫행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시인이 손을 내미는 그쪽 어딘가로 펄쩍 건너뛸 수 있었다.
비 냄새
비가 온다.
젖은 슬리퍼의 안쪽에
마침내 스러져 가는 내가 있다.
새로 산 우산에 당신의 손때가
안개처럼 자욱하다.
물 밖의 헐떡이는 구피는
내던져졌는가? 스스로 튀어나왔는가?
젖은 바닥은 과연 자유로운가?
자비 없이 돌발하는 아련한 향기에
물 머금은 비통한 오르가즘이 잉크처럼 번진다.
'지나온 감정의 시간들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쓴 기록'이라는 한하리의 시집 <감정의 자국들>은 그래서 더 깊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1부 '사랑 이전의 불안', 제2부 '겁 많은 사랑은 끝내', 제3부 '다정의 학습'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혹은 수많은 이별을 통하여 다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면서 애쓰고 노력하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게 크게 잘못되었음을 시인은 자신의 지난 기록이자 자신이 쓴 시를 통하여 자분자분 이야기하고 있다.
추억, 변곡
당신이 젖은 입천장을 더듬어가며
애써 기억해 낸 그날의 그 온도는
어쩌면 당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환상 덕에 당신이
다시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을 통해 사랑의 온기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의 온기는 단순히 확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내 가슴을 덥히고 한 걸음 한 걸음 다정한 인간으로 나아가게 한다. 한 토막의 미움을 지우면 그에 비례하여 한 토막의 사랑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는 온통 다정함이 넘치는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 쓰는 위로의 말, "어쩔 수 없었어"를 상처를 주기 위한 면죄부로 쓰지 말 것'이라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나에 대한 면죄부로 쓰였던 말, "어쩔 수 없었어"
6월의 마지막 주말. 장마가 쉬어가는 하늘엔 언뜻언뜻 흰구름이 번지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그늘 속으로 스며들었다. 삶은 시간의 거미줄에 갇혀 끝없이 파닥거리는 작은 몸부림에 불과하지만 오늘처럼 누군가의 시를 읽다 보면 또 이렇게 한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사방이 막힌 사무실에서 나는 소리를 죽여 자유를 외친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