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책임
김신회 지음 / 오티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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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지속한다는 건 어떻게든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세월만 보내는 무작위의 삶도 종국에는 책임을 지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결과는 나오게 마련이니까. 자신이 원했던 바가 아닐지라도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삶이라면, 그리고 시시각각 결과가 도출되는 게 우리의 삶이라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몸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세월에 따라 늙고 병이 드는 것도 자신의 책임이요, 자식을 낳고 성심을 다해 돌보았지만 자신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것도 결국에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나에게 질문했다. 나를 책임지며 산다는 건 뭘까.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는 건 하나도 없는데 물어볼 데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각자 자기 삶 건사하는 일에 빠듯했기 때문에. 다들 애초부터 그렇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만 빼고."  (p.19)

 

김신회의 에세이 <가벼운 책임>은 세상 그 누구보다 낙천적일 것 같던 김신회 작가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책이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김신회 작가는 꽤나 낙천적이고 대범해 보였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세상 무서운 것도, 걱정스러운 것도 없었다. 겉보기에는.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지만 독자의 관점에서 작가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책의 앞머리에서 자신이 이 년간의 심리 상담을 받았던 사실을 고백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동안 읽었던 작가의 저서 두어 권에서 받았던 나의 느낌은 얼음조각처럼 힘없이 부서졌다.

 

"앞으로도 나는 무수히 많은 선택 앞에서 망설일 것이다. 그러다 관성적으로,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하고 안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때, 이 년 반 만에 블라인드를 달겠다고 결심한 그날의 마음을 떠올려야지. 그러면 사소한 일도, 제법 큰 일도 심호흡 한번 하고 실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두려움을 잊고, 안 해본 걸 해본 그날의 기억이 가끔 내게 기운을 줄 것 같다."  (p.163)

 

<가벼운 책임>은 작가가 반려견 입양을 결정하고 그 생명을 온전히 책임지는 과정에서 겪었던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담아낸 책이다. 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달아나기에 바빴던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작가는 이제부터라도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움으로써 40대 중반의 나이에 걸맞은 어른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유기견 풋콩이를 돌보면서 작가는 비로소 '책임감'이라는 말의 무게보다는 책임지는 삶의 행복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책임감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껍고 행복한 일상을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그것은 결코 버겁거나 무거운 일이 아니라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가볍고 마땅한 일이었다.

 

"마음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면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 결국 혼자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 미덥지 못한 내 감정과 행동을 책임지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 책임질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책임감이라는 말의 존재감은 나날이 거대해졌다. 열심히 도망치지 않으면 그 아래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  (p.193 'epilogue' 중에서)

 

책임감을 상실하면 나에게 남는 것은 권태와 무기력뿐이다. 책임감 상실의 기저에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책임감 있는 삶을 선택한다는 건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관계에 대한 복원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일상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속에서 우리가 깨닫는 건 아마도 일상의 소중함이 아닐까. 헐거워진 관계만큼이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우정의 속살이 아깝고, 무료하게 보냈던 맹탕의 시간들이 마냥 덧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일상의 회복이란 단순한 반복을 기꺼운 마음으로 견디겠다는 즐거운 서약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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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이 과연 미덕이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렇다고 겸손하지 말라고 말한다거나 겸손의 미덕을 마구 흠집 내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좀 더 겸손해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고 자신을 표현함에 있어 과장된 몸짓이나 부풀려진 말로 떠벌리는 걸 몹시도 싫어하는, 이른바 '꼰대' 기질이 다분한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겸손'은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귀히 여기던 그런 느낌의 '겸손'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요.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의 개념도 달라져 있고 그 방법이나 뜻조차 많이 왜곡되고 변질되었다는 것을 현실에서 번번이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민족과 서구 사회 구성원을 가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지나친 '겸손'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육체적, 정신문화적 차이 등 다양한 구분이 가능하겠습니다만 오늘 말하려고 한 주제는 '겸손'에 국한된 까닭에 다른 것들은 가급적 들먹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단합은 겸손을 바탕으로 한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겸손의 미덕을 깎아내릴 의도 또한 전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겸손의 문제점을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어느 날 갑자기 들었던 생각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나는 오래전부터 이것에 대해 생각해 왔고, 우리 사회의 몇몇 구성원들이 겸손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숨기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면으로 여론을 형성해 왔다는 사실에 분개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동체를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존재하던 '겸손'이 작금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숨겨진 무기로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겸손'을 가장한 사기인 셈이지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종부세의 문제입니다. 종부세는 주택 및 토지의 공시 가격을 인별로 합산한 결과, 합계액이 과세기준금액을 초과하는 경우 그 초과분에 대하여 과세되는 세금인 까닭에 토지 및 주택의 공시 가격이 크게 오를 경우 납세 대상과 금액이 상승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납부해야 할 세액은 상황에 따라 다르고 납부자에게 실제로 고지되는 납부 세액은 그렇게 높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언론에서는 '세금 폭탄'이라는 둥 강남에서 1주택을 소유한 은퇴자는 집을 팔아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둥 엄살을 떨곤 합니다. 이건 숫제 '겸손'이나 엄살이 아니라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엄포 또는 사기에 가까운 행태인 것입니다. 9억을 초과하는 1가구 1주택을 소유자들의 평균 자산 총액이 3억 5천만 원정도에 이르니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재산을 혹은 부의 정도를 최대한 낮추어 말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예컨대 '친구 00에게 비하면 나는 거지나 다름없다'는 둥 '나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라는 둥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우리 주변에는 '생활보호대상자'만 득실거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상상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그들의 자산은 대대로 대물림되는 실정입니다. 국민들 전체가 그들의 죽는소리를 액면 그대로 믿게 된 데는 그들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한 언론의 역할이 한몫한 까닭입니다. 언론 종사자 역시 그들과 같은 자산가의 후손이거나 억대 자산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기를 쳐 왔는지 우리나라의 최고 자산가 중 1인인 이재용 부회장이 그에게 부과된 상속세를 납부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1년 연봉 7천만 원도 못 받는 사람들이 배당금만 7천억 원 이상을 받는 이재용 부회장을 걱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요.

 

서구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로 대표되는 사회입니다. 말하자면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나 다름없지요. 그러므로 자신의 부나 권력을 최대한 부풀려 내보여야 하고 자신의 약점은 드러내지 않는 게 관습처럼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자신의 부나 권력을 가급적 낮춰왔던 게 사실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겸손의 미덕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던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덕이 변질되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이용된다면 사회 구성원들 간의 단합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언론에서도 이제 '당신은 얼마나 가난하냐?'고 물을 게 아니라 '당신은 대한민국의 몇 번째 부자냐?'고 물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당당하게 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정과 정의는 과세의 형평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법과 도덕의 준수와 같은 절차적 정의에 기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기술이 발달할수록 투명해지고 자연스레 지켜지는 것입니다. 누군가 데모를 한다고, 검찰이 대대적으로 조사를 한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과세의 형평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앞장서서 나아가 문제를 지적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숫자에 약하고 세법 또한 복잡하기에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약점을 이용하여 언론을 이용한 우민 정치가 쉬워지는 것이겠지요. 쓰다 보니 두서없이 말만 길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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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
신민경 지음 / 책구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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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숙명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나이도 젊고, 여전히 건강한 사람들에게 '죽음'은 단지 호기심의 대상은 될지언정 곧 닥칠 미래에 대한 대비로 여겨지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자신의 언저리에 언제나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사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까마득히 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 현재의 자신과는 하등 관련도 없는, 그렇지만 미래의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직접적인 현실로서의 '죽음'을 인지하게 될 날이 결국 오고야 말 거라는 사실을 꿈결처럼 어렴풋이 떠올리는 게 전부이다. 그러나 아주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은 숨죽이며 먹이를 쫓던 호랑이의 도약처럼 갑작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시간은 흐르고 몸은 더 망가져 가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들 언저리만 계속해서 서성였다. 죽고 나면 어차피 누군가가 다 알아서 해줄 일들. 그렇게 시간을 방치해 두다가 불현듯 '지금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 찾기에 돌입했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었던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방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p.27)

 

누구나 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거지만 임박했거나 미리 예고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쓴 책을 나는 꽤나 여러 권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의 삶이 궁금하고, 호기심에 이끌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에 이른다. 나는 삶의 이편에서 여전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럴라치면 나는 삶과 죽음의 가느다란 줄 위에 올라 선 듯 아슬아슬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때로는 '죽음' 쪽으로 한 발 더 기운 듯하고, 때로는 삶 쪽으로 한 발 더 다가선 듯하다. 이런 기분은 뭐랄까. 끝을 모르는 절벽 위에서 아스라한 공포에 사로잡혔다고나 할까, 더없는 공포와 비견할 수 없는 평화가 공존하는 그런 기분이다.

 

신민경의 산문집 <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 역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젊은 여성이 쓴 책이다. 젊다는 건 때로는 짙은 우울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른 나이의 '죽음'이 예정되었을 때는 더욱더. 관광경영학을 전공했다는 저자는 다양한 세상을 깊이 있게 경험하기 위해 호주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40여 개 국가에서 살아보았다고 한다. 2015년 유방암 발병으로 수술했고, 2017년 재발해 두 번째 수술을 했으며, 2020년 영국으로의 유학을 앞두고 다발성 전이를 확인,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는 내용의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를 읽으며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을 저자의 삶을 가만가만 상상해 보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가족과 지인들 몰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왜 저예요? 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인 거 아시잖아요? 저한테 어쩜 이러실 수 있어요! 왜? 왜! 왜!" 부정하고 분노하고 따지며 목 놓아 울었다. 물론 나는 이런 걸 바깥으로 티 내는 사람은 아니다."  (p.159)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을 때 내게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이제 더는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을 수 없다는 거였다. 왜 나는 진작 사소하지만 궁금했던 것들을 모두 물어보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떠난 이에게 궁금했던 모든 질문들은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산다는 건 그에게 궁금한 것들을 질문할 수 있는 시간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지만 그것 역시 영원하지 않기에 잘 산다는 건 그에게 궁금한 것을 그때그때 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쓰는 내내 너무 살고 싶었다. 살아서 뭐라도 하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괜찮다. 원래 이상과 현실은 차이가 있는 법이고, 그게 삶인 걸 알았으니. 내 걱정은 하실 것 없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조용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타고난 능력 부족을 노력으로 메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잘 안 바뀌니까."  (p.197 '에필로그' 중에서)

 

장마철처럼 내리는 비.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에서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을 마치 영겁의 시간을 빠져나온 듯 길게 읽었다. 한 사람의 삶이 책 속에 오롯이 담긴, 더 이상 숨길 것도, 그렇다고 더 이상 내세울 것도 없는 저자의 순박하고 투명한 시간들이 책 속에서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가볍게 죽을 수 있을까?' 나는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빗소리도 잊은 채. 칙칙한 어둠과 함께 굵어지는 빗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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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요즘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향기의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다. 지난 주말에는 짙은 황사와 미세먼지로, 이번 주초에는 때 아닌 비로 변덕스럽고 요상한 기분의 며칠을 보냈지만 흐렸던 날씨도 개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자마자 다시 또 때 이른 무더위가 찾아온 듯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게 날씨인데 날씨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꼴이라니...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도 허울뿐 인간은 한낱 연약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오늘 한낮의 햇살은 뜨거웠다. 반소매 옷을 입고도 더위를 느꼈을 정도로 한낮 더위는 매서웠다. 이러다 어쩌면 불쑥 장마가 찾아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때 이른 더위에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이러다 말겠지, 하는 기대 심리도 없지는 않았지만 지구 온난화와 이에 따른 기상이변이 한반도만 비껴갈 리도 없는 까닭에 내심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일 게다.

 

인터넷 뉴스를 보니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폭격이 다시 또 시작된 모양이다. 현대 인류에게 있어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인간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스라엘의 정치인이 아닐까 싶다. 달아날 곳도 없고 방어 수단도 없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향해 대대적인 무력 진압을 시행하는 것도 모자라 민간인을 향한 폭격과 살상 행위를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해치우는 걸 보면 저들도 과연 인간의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 교수가 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독서의 폭발적 성장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는 습관을 갖게 만듦으로써 인도주의 혁명에 기여했을 것이다. 정보와 사람의 유입이 지니는 힘은 일찍이 정치적, 종교적 폭군에게 효과가 없었던 적이 없다. 폭군들이 말과 글과 조직을 억압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민주 국가들이 권리 장전에서 그 통로를 보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도시와 문해력이 성장하기 전에는 해방적인 사상이 생겨나고 통합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17~18세기에 성장한 세계주의는 인도주의 혁명에 부분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만하다."

 

스티븐 핑커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은 독서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스라엘 국민들은 독서를 일절 하지 않는 야만의 종족을 지도자로 뽑았다는 것인데 이 또한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독서도 하지 않는 천박한 인간들이 이스라엘의 정치인임을 21세기의 우리가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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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문장들 쓰는 존재 4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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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매 시간 균질한 밀도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때로는 빡빡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살다 보면 성긴 시간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후회와 그리움을 소환하고 때로는 희망과 걱정을 저글링 하며 나른한 시간을 채운다. 몸은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성긴 시간을 메워주던 그리움과 후회. 그리움과 후회는 어쩌면 희망과 걱정의 대척점에 있는 단어들일지도 모른다. 이미 살아본 시간과 앞으로 살게 될 미래의 시간을 자맥질하며 우리는 고단한 현실을 잊곤 한다. 그럴 때면 누군가 말했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남는다.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것이고, 덤벼드는 적들로부터 용케 도망쳤거나 잘 이겨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 지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리워할 수 있다. 그리움은 생존 무기다. 무기는 꼭 사용해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힘을 가진다. 방호복이나 비상식량처럼 그리움도 나를 지키고 보살피는 데에 긴요하다."  (p.12)

 

림태주가 쓴 <그리움의 문장들>은 그리움에 대한 온갖 것들이 총망라되어 하나의 철학적 관념을 형성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감정들을 하나로 끌어모은다. 그것은 마치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신기하기만 하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움에 종사하다 그리움에서 퇴직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주장답게 '보고픔과 기다림과 외로움의 합체어가 그리움이라 그리움의 뿌리는 외로움'이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리움의 문장들'은 '외로움의 문장들'이기도 하다.

 

"나도 이제 노인의 언어를 이해해야만 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 나는 아마도 침묵의 언어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당신처럼 함부로 외로움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알 수 없다. 아버지도 나처럼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다짐한다 해도 불어나는 외로움의 채무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감정의 수도꼭지가 점점 헐거워지고, 잠가도 흘러나오는 비탄이 하수구를 막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아무리 기다려도 배관공은 오지 않는다."  (p.149)

 

성긴 시간에 찾아드는 그리움, 혹은 변질된 외로움을 우리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다. 물길을 막는 저 단단한 수력댐처럼 우리의 삶에서 그리움을 완전히 차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움은 물길처럼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그리움의 습격에 인간은 그저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산다는 건 누군가의 가슴에 돋을새김의 그리움을 한 자락 새겨 넣는 일이라지만 그리움과 허무함이 넘치도록 나를 잠식하는 밤이면 마음을 굳게 닫고 저 멀리 달아나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을 꼴딱 새우고 부스스한 아침을 맞았을 때의 더러운 기분을 무엇보다 싫어하기 때문이다.

 

산에는 요즘 이소(異所)를 준비하는 어린 까치의 날갯짓이 분주하다. 아카시아 꽃의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향기가 온 산을 가득 채우는 동안 어린 까치는 스스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한 자락의 그리움을 가슴에 품은 채 서둘러 작별을 고할 것이다. 마침 오늘은 어버이날. 부모의 곁을 떠났던 이맘때의 나는 자라고, 나이 들어 그 시절의 부모님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한 자락의 그리움을 끈질긴 혈연의 끈인 양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외로움의 귀퉁이, 그리움의 모서리였을 꽃밭 앞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엄마가 있다. 내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엄마의 어룽대는 등을 가만히 껴안아 주고 싶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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