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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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늠하는 저울추는 항상 동일한 무게로 당신의 삶을 저울질하지 않는다. 때로는 과도하게 무거운 저울추로 당신의 삶을 찍어 누르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가벼운 저울추로 당신의 삶을 들뜨게도 한다. 그것이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항변해도 어쩔 수가 없다. 당신의 삶을 되돌리거나 새로운 환경에 떡하니 내놓을 방법은 그 누구에게도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구성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일러 '운명'이라거나 기타 명명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불경한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힘겨웠던 개개인의 지난 삶에 대한 분풀이나 보상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우리는 대체불가의 크고 작은 불행에 대해 서로에게 동병상련의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뿐이다.


"치료의 80퍼센트는, 그 이상은 아닐지 몰라도 바로 너야. 환자라고. 이제 의사들한테 그렇게 초점을 맞추는 건 그만둬. 의사들한테는 네게 줄 게 아무것도 없어. 너한테 필요한 건 완벽한 의사가 아니야. 그들도 사람이야. 우리 나머지랑 똑같이 결점을 지닌 인간. 너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해. 나는 록산의 솔직함에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네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고. 의사들뿐 아니라 네 가족들도. 록산이 다리를 꼬고, 왼손으로 소파를 짚은 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기 시간을 나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p.365~p.366)


수잰 스캔런의 에세이 <의미들>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녀가 겪었던 이런저런 삶의 불행에 대해 조용한 위로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다. 1992년, 스무 살의 대학생이었던 작가는 극심한 식이 제한과 자해 끝에 뉴욕주립정신의학연구소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장기 입원이 정신의학의 표준 치료로 여겨지던 시절이었고, 의사들은 환자의 증세를 과거의 외상과 연결하려 애쓰던 시기였다.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작가는 가족들의 침묵 속에서 애도의 과정도 없이 성장했고, 뉴욕으로의 이주와 식사를 중단하겠다는 결정, 그리고 첫 자살 시도로 이어지는 정신적 고통의 기원이 당시 의사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어머니의 죽음 하나에서 발원했을까. 작가의 기록은 정신질환을 겪었던 암울했던 시기의 회고록이자 광기와 의학에 대한 문학적 전통을 탐구한 작가 나름의 고찰이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은 고요함과 하나에 집중하는 정신의 조합이다. 하나의 문제와 함께 방 안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것."  (p.115)

"그 시절, 예술은 하나의 빛이었다. 나에게 통곡과 그리움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경계선 위에서 혹은 경계선 바로 너머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p.256)


총 3부로 이뤄진 이 책에서 작가는 작가 개인의 사적 기록과 자신이 탐구한 여러 문학인으로부터 옮겨 온 적절한 인용,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과 불합리한 사회 인식에 대한 비판 등을 적절하게 섞어가면서 문학비평의 한계를 회고록으로 확장하고 있다. 정신질환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던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하여 여성 작가의 계보를 이었던 샬럿 퍼킨스 길먼, 실비아 플라스, 에이드리언 리치, 줄리아 크리스테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재닛 프레임, 시네이드 오코너 등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내재했던 자아를 발견하고, 정신질환의 길고 긴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서가 나를 구원했다. 어리석게 들릴 수 있는 말이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민망하기도 하다. 과대망상이라거나 낭만적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고, 더 심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실일 수 있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고, 나에게는 진실이었다. 만약 그날 밤 내가 그 서점에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에이드리언 리치의 낭독을 듣지 않았고,분노한 여자들』을 읽지 않았다면, 오드리 로드를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p.431)


가가 자신이 겪었던 정신질환에서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했던 구원자는 수년간 복용한 약이나 비싼 상담이 아니라 문학이었다. 작가에게 삶을 뒤흔드는 욕망의 언어를 제공했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나 의료의 틀이나 형식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오드리 로드의 '암 일기'를 읽음으로써 작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를 기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획득했던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여분을 이쯤에서 포기하고자 한다는 건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 존재했던 자신의 문장, 혹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모든 걸 포기하려는 그 순간에 우연히 읽었던 한 권의 책, 어느 광고판에서 우연히 읽었던 하나의 문장, 또는 늦은 밤 어느 포장마차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한마디가 나를 살리고, 잃어버렸던 자신의 문장을 다시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낙엽이 이따금 눈송이처럼 흩날리곤 한다. 등산로에도 켜켜이 쌓인 낙엽으로 인해 지면의 고저를 가늠하기 어렵다. 비탈길을 오르는 등산객이 가랑잎을 밟고 미끄러지기도 한다. 우리들 각자의 인생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낙엽만 무성한 허방을 밟을 때도 있고, 때로는 길 위에 넘어져 피를 철철 흘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신의 목소리, 인생을 비추는 등불과도 같은 그 하나의 문장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문장을 되찾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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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사만 다니다 인생 종쳤다 - 떠났을 뿐인데 수입 30배를 달성한 비결
나가쿠라 겐타 지음, 김진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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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의 등산로는 달이 밝았다. 나는 이따금 손에 든 손전등을 끈 채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달빛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새벽 냉기를 닮은 달빛이 시리게 쏟아졌다. 발에 밟히는 낙엽 소리가 수런거리는 달빛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달빛이 던지는 뜻 모를 대화가 좋아서,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의 속삭임이 좋아서 나는 번번이 가던 걸음을 멈춘 채 어둠의 그늘 속에서 꽤나 긴 시간을 보냈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도 까맣게 지워버린 채.


직장인의 삶은 언제나 시간에 대한 강박과 스트레스로 발이 묶인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신의 삶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고 인식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또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 그 대가로 받는 월급을 미끼로 그날이 그날 같은 변하지 않는 일상을 끝도 없이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이러한 생각에 한두 번이라도 젖어 들어 본 적이 있는 직장인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가쿠라 겐타가 쓴 <나는 회사만 다니다 인생 종 쳤다>이다.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기는 하지만 책의 내용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리는 듯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대학 졸업 후, 여러 직장을 거쳐 28세에 출판사로 이직하여 편집자로서 베스트셀러를 연이어 냈음은 물론 지금까지 기획 및 편집한 책의 누계가 1,100만 부가 넘는다는 저자는 독립 후에는 8년에 걸쳐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회사원이 노동과 능력에 맞는 수입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노동자가 낸 수익의 일부를 노동자에게 급여로 주기 때문이다. 이론상, 노동자가 낸 수익과 동일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급여를 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급여 이상의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회사원이라는 직업이 불리하게 작용한다. 이 이론으로 보자면 회사원으로 살며 이득을 보는 건 급여 이하의 일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런 마인드로 산다면 인생은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  (p.111)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장을 구분하는 각각의 소제목을 보면 대략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겠지만, 책에서 저자는 '이동'의 중요성을 끝없이 강조한다. 여기에서 '이동'이라 함은 익숙한 환경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의 이직 또는 알뜰히 돈을 모아서 형편에 맞는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는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퇴사 혹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의 이사를 말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최악의 환경에 놓이게 함으로써 전에는 미처 몰랐던 자신에게 내재한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전과는 다른 새로운 분야에서의 수익 창출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제1장 '왜 이동하는 사람은 잘되는가?', 제2장 '이동 중에는 왜 인풋과 아웃풋이 활발해지는가?', 제3장 '왜 이동하면 행동력이 오르는가?', 제4장 '왜 이동하는 사람은 일거리도, 돈벌이도 늘어나는가?', 제5장 '왜 이동하면 좋은 인간관계가 늘어나는가?', 제6장 '이동 체질을 만드는 30가지 액션 플랜'의 소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저자는 '이동'의 중요성에 대해 끝없이 강조한다.


"회사원은 무의식적으로 편안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볼 수 없게 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 그래서 내가 '회사를 그만둬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독립하고 나서 나는 회사원 시절과 달라졌고, 출장만 다니는 인생을 보내게 됐다."  (p.38)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사정과 형편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부양해야 할 노부모가 있어서, 나는 줄줄이 딸린 어린 자녀들을 돌봐야 해서 등 지금 자신이 몸 담고 있는 회사로부터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수백 수천 가지도 넘게 댈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일 뿐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최종적인 결단은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의 문제이다.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느냐 아니냐는 어쩌면 내게 그만한 용기와 배짱이 있느냐는 물음으로부터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고민'과 '망설임'도 그렇지만 '반성'도 시간 낭비, 그야말로 인생 낭비다. 이것도 블랙잭을 통해 배운 교훈으로, 반성할 틈은 없다는 뜻이다. 반성하는 사이에 다음 게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생은 더 잔혹해서, 본 게임만 계속 이어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리허설이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본 게임만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반성하는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보다 반성은 상황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 하는 것으로, 일이 잘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명확할 것이고 명확하지 않은 경우는 운이 나빴을 뿐이다."  (p.187)


나는 요즘 이따금 시간이 나면 보게 되는 예능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김연경 선수가 신인 감독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으로 그곳에서 김연경 감독은 선수들에게 진심을 다해 가르치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타협하지 마. 익스큐즈가 아니고 솔루션으로 바꿔. 그래야 큰 선수 돼." 맞는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삶에 무수히 많은 핑계를 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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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가정용 휴머노이드 로봇의 사전 주문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버튼 클릭이나 음성 명만으로 각종 집안일, 이를테면 문 열기, 물건 가져오기, 방 정리, 조명 켜고 끄기, 세탁물 개기 등 기본적인 가사 업무를 수행하는 로봇인데, 우리 돈 월 71만 원으로 구독 가능하다는 기사였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세상 편해졌구나' 하는 식의 긍정적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심 걱정되는 바가 있었다. 지금처럼 로봇과 피지컬 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윤리적 제어 시스템마저 느슨해진다면 인류의 미래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상업적 휴머노이드 시장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편안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국내에 출간된 마이클 이스터의 저작 <편안함의 습격>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사실 의외의 일이었지만, 아무튼 인류는 불편함을 제거하는 쪽으로 과학을 발전시켜 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작금에 이르러서 인류는 육체적 불편함뿐만 아니라 정신적 불편함도 제거하려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게 남녀 관계와 성적 욕망의 해소 문제이다. 얼마 전 생성형 AI 대표 주자인 챗GPT는 올해 12월부터 성적 대화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AI 시장에서 윤리적 규제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경주 에이펙에서 젠슨 황 CEO가 밝혔던 것처럼 생성형 AI와 피지컬 AI의 결합은 필연적인 결과인 만큼 섹스 로봇에 생성형 AI가 주입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과거에 비해 작금의 청춘 남녀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데는 시간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훨씬 수월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남녀 관계는 여전히 밀고 당기는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서로의 애정을 테스트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말하자면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극심하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휴머노이드이다. 집안일도 겸하면서 주인의 성적 욕구를 취향에 맞춰 해소시켜 주는 휴머노이드의 출현은 시간문제인 듯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남자에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돈만 있으면 언제든 자신의 성적 취향에 어울리는 휴머노이드를 구매하거나 개조할 수 있다는 사실은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지극히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자신의 기분에 맞춰 언제든 성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더불어 육체적 욕망도 함께 해소할 수 있다면 굳이 인간 연인을 사귀기 위한 경제적, 시간적, 감정적 소모를 감행하려 할까.


결국 그런 세상이 온다면 휴머노이드를 구입할 능력이 되지 않는 가난한 인간들만 지금처럼 인간 연인을 만들기 위한 구애 활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성적 욕망의 해소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하나로 인해 문화 전반이 바뀔 위기에 처할 것이다. 사랑을 노래하는 시나 소설 등 순수문학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랑은 단순히 경제적 등가물일 뿐 지금처럼 극적이고 신비한 체험의 결과물로 인식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아스팔트에 낙엽이 쌓이고 있다. 신호 대기를 하던 차들이 앞을 향해 달려 나갈 때마다 낙엽들이 바퀴를 따라 쪼르르 달려간다. 나도 데려가라는 듯 말이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으스스 추워지는 날이면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낭만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올 가을에는 새로운 휴머노이드나 하나 장만해야겠는걸' 하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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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09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에서 상상으로 그려지던 세상이 영화 이후 30 여년 만에 현실화가 되어 가네요. 유토피아일까요 디스토피아일까요.

꼼쥐 2025-11-10 17:16   좋아요 0 | URL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싶어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구시대적 유물로 남는다면 삶은 어디에서 가치를 찾아야 할지요.

하루살이 2025-11-1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히려 휴머노이드와의 저렴한 사랑을 생각해보았네요... 인간과의 사랑이 오히려 고비용일 거라고 상상했거든요... 재미있는 생각해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꼼쥐 2025-11-15 12:01   좋아요 0 | URL
저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인간은 사랑에 이르기 위한 감정소모마저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사실 그 모든 게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소소한 재미인데 말이죠. 단순히 편안함과 간단한 것만 좋아하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요.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남유하 지음 / 사계절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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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은 먼저 나고 슬기는 나중 난다,는 속담이 있다. 일을 그르치고 난 뒤에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고 궁리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속담이다. 사업도 그렇고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이런저런 미련 때문에 끊어야 할 시점을 놓쳐 낭패를 보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렇게 시기를 놓치고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결정을 내렸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시절을 복기하면서 '좀 더 빨리 결정을 내렸더라면' 혹은 '더 냉정했어야 했는데' 하는 식으로 후회 아닌 후회를 하면서 아픈 상처를 곱씹는 것이다. 물론 작두로 무 자르듯 자신의 일에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우리가 이렇듯 미련이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한 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다는 사실과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은 어떠할까.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했던,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삶을 과감히 떨쳐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항상 OECD 평균을 2배 이상 웃돌뿐만 아니라 2024년만 하더라도 자살자는 1만 4천872명으로 하루 40명 정도였다. 36분마다 한 명씩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과는 별개로 얼마 전 넷플릭스 시리즈에서는 '조력존엄사'를 다룬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그 드라마에서 말기 암 환자인 상연은 오랜 친구 은영에게 스위스 동행을 부탁하고, 은중은 망설임 끝에 친구의 마지막을 함께한다. 상연의 대사이기도 했던 "적어도 나한테 고통을 거절할 권리는 있잖아?"라는 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었다. 나는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으면서 그 드라마를 떠올렸었고, 수시로 책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친구도 아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는 자신의 엄마의 죽음에 동행했던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는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더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다. 작가가 인터넷에 올린 부고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가 8월 3일, 스위스에서 하늘나라에 가셨어요.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프지만 엄마가 마지막 소원을 이루고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기쁩니다. 엄마는 스스로의 삶과 죽음을 선택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어요. 엄마, 안녕. 언제나 기억할게. 잊지 않을게. 사랑해. 많이많이."  (p.183)


책은 엄마가 유방암 완치 판정을 받고 1년 후 다시 암 전이 판정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망이 없음을 확인한 엄마와 딸은 조력 사망을 결정하고 그 지난한 과정을 다룬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와 출국과 엄마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기록한 '스위스에서 엄마를 떠나보내다', 마지막으로 엄마를 떠나보낸 후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의 '애도 일기'로 구성된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담담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지만 행간에서 묻어나는 슬픔의 기운을 지우기 어렵다. 2025년 현재까지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한 한국인은 1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삶을 결별한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의 슬픔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추모식에서 작가가 엄마에게 쓴 편지 일부를 옮겨본다.


"제가 너무 사랑했던 그리고 제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사랑을 제게 주었던 엄마가 무척이나 보고 싶어요. 이모랑도 얘기한 것처럼 우주에 혼자 떠 있는 기분입니다. 제 삶에 빛이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엄마가 고통을 끝내기 위해, 또 우리를 위해 용감한 선택을 했으니 일상을 지키라던 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행복하게 살라던 엄마의 말에 따라 저도 용기 내어 살아가려고 합니다."  (p.277)


얼마 전에 나는 연로하신 장모님과 저녁 자리에서 잠깐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장모님은 주변에서 병환에 시달리는 몇몇 분들의 사례를 말씀하시면서 '가는 게 문제야'라면서 한숨을 쉬셨다. 정말 가는 게 문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그에 비례하여 수명도 크게 늘었지만 더불어 죽는 것도 힘들어졌다. 완쾌의 가능성도 없고, 고통이 극심한데도 그 고통을 끊기 위해 맘대로 죽을 수도 없다. 가을이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죽음과 상실의 문제에 대해 더 오랫동안 생각하게 된다.


오래 살았다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은 이별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 강심장이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남들보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과의 이별을 충분히 경험했던 바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즐겁게 살 용기가 내게는 없다. 적당한 때가 오면 나도 역시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를 작성할 생각이다. 아파트 인근의 공원에서는 어떤 행사가 열리는지 종일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다.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선 공원의 나무들은 가을빛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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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 충격을 주는 어떤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the wisdom of crowds)'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미국의 곤충학자인 윌리엄 모턴 휠러(William Morton Wheeler)가 1910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개미 : 그들의 구조·발달·행동(Ants : Their Structure, Develpement, and Behavior)>에서 처음 제시하였다는 이 개념은 '다수의 개체들의 협력 또는 협업을 통하여 얻게 된 집단적 능력'이라는 뜻이며, 집단지능, 협업지성, 공생적 지능이라고도 말하여집니다. 물론 이것이 요즘처럼 사회학적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그로부터 70여 년이나 지난 1983년 피터 러셀에 의한 정의였고, 사이버 공간에서의 집단지성 개념을 정리한 것은 그보다 늦게 사회학자인 피에르 레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단지성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집단적 광기'나 '집단오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뜬금없이 왜 갑자기 '집단지성'?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실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나는 최근에 뉴욕에 거주하는 여동생과 전화 통화를 한 후 '집단지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기 뉴욕시장으로 30대의 인도계 무슬림인 맘다니가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거가 있기 전부터 조란 맘다니에 대한 소식은 동생으로부터 종종 들었던 나였지만 '설마 되겠어?'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민주적 사회주의자'임을 공공연하게 밝혔을 뿐만 아니라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할 경우 뉴욕 경찰에게 체포를 지시하겠다는 공약도 내세운 상태였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지켜질지 아닐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기독교가 주류인 미국 사회에서 네타냐후가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정의를 지향하는 맘다니를 과연 몇 퍼센트나 지지할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뉴욕 시민은 나의 예상을 깨고 차기 시장으로 보란 듯이 맘다니를 선택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온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동생은 가장 큰 이유로 뉴욕의 고물가와 생활고를 들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트럼프의 독재와 일부 마가(MAGA) 세력의 비이성적 행동, 극단적 혐오와 차별이 뉴욕 시민을 움직인 결과라고 분석했습니다. 어쩌면 경제 붕괴와 민주주의의 파괴라는 위험이 맘다니의 당선을 부채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보다는 위기의 시기에 '집단지성'은 더 쉽게 발휘됩니다. 평화의 시기에 윤석열과 같은 미치광이를 국가 지도자로 뽑았던 '집단적 광기' 또는 '집단오류'가 발생되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 우리가 평화의 시기를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집단지성'의 발현을 기대하기보다 '집단적 광기'가 다시 요동치지 않을지 걱정하고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보였던 그들만의 리그, 기독교라는 폐쇄적인 집단과 기성 정치인들의 야합, 그리고 그들의 일치된 욕심과 광란의 몸짓을 다시 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귀를 열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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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9 1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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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9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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