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남유하 지음 / 사계절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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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은 먼저 나고 슬기는 나중 난다,는 속담이 있다. 일을 그르치고 난 뒤에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고 궁리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속담이다. 사업도 그렇고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이런저런 미련 때문에 끊어야 할 시점을 놓쳐 낭패를 보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렇게 시기를 놓치고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결정을 내렸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시절을 복기하면서 '좀 더 빨리 결정을 내렸더라면' 혹은 '더 냉정했어야 했는데' 하는 식으로 후회 아닌 후회를 하면서 아픈 상처를 곱씹는 것이다. 물론 작두로 무 자르듯 자신의 일에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우리가 이렇듯 미련이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한 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다는 사실과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은 어떠할까.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했던,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삶을 과감히 떨쳐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항상 OECD 평균을 2배 이상 웃돌뿐만 아니라 2024년만 하더라도 자살자는 1만 4천872명으로 하루 40명 정도였다. 36분마다 한 명씩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과는 별개로 얼마 전 넷플릭스 시리즈에서는 '조력존엄사'를 다룬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그 드라마에서 말기 암 환자인 상연은 오랜 친구 은영에게 스위스 동행을 부탁하고, 은중은 망설임 끝에 친구의 마지막을 함께한다. 상연의 대사이기도 했던 "적어도 나한테 고통을 거절할 권리는 있잖아?"라는 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었다. 나는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으면서 그 드라마를 떠올렸었고, 수시로 책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친구도 아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는 자신의 엄마의 죽음에 동행했던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는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더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다. 작가가 인터넷에 올린 부고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가 8월 3일, 스위스에서 하늘나라에 가셨어요.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프지만 엄마가 마지막 소원을 이루고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기쁩니다. 엄마는 스스로의 삶과 죽음을 선택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어요. 엄마, 안녕. 언제나 기억할게. 잊지 않을게. 사랑해. 많이많이."  (p.183)


책은 엄마가 유방암 완치 판정을 받고 1년 후 다시 암 전이 판정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망이 없음을 확인한 엄마와 딸은 조력 사망을 결정하고 그 지난한 과정을 다룬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와 출국과 엄마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기록한 '스위스에서 엄마를 떠나보내다', 마지막으로 엄마를 떠나보낸 후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의 '애도 일기'로 구성된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담담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지만 행간에서 묻어나는 슬픔의 기운을 지우기 어렵다. 2025년 현재까지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한 한국인은 1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삶을 결별한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의 슬픔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추모식에서 작가가 엄마에게 쓴 편지 일부를 옮겨본다.


"제가 너무 사랑했던 그리고 제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사랑을 제게 주었던 엄마가 무척이나 보고 싶어요. 이모랑도 얘기한 것처럼 우주에 혼자 떠 있는 기분입니다. 제 삶에 빛이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엄마가 고통을 끝내기 위해, 또 우리를 위해 용감한 선택을 했으니 일상을 지키라던 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행복하게 살라던 엄마의 말에 따라 저도 용기 내어 살아가려고 합니다."  (p.277)


얼마 전에 나는 연로하신 장모님과 저녁 자리에서 잠깐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장모님은 주변에서 병환에 시달리는 몇몇 분들의 사례를 말씀하시면서 '가는 게 문제야'라면서 한숨을 쉬셨다. 정말 가는 게 문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그에 비례하여 수명도 크게 늘었지만 더불어 죽는 것도 힘들어졌다. 완쾌의 가능성도 없고, 고통이 극심한데도 그 고통을 끊기 위해 맘대로 죽을 수도 없다. 가을이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죽음과 상실의 문제에 대해 더 오랫동안 생각하게 된다.


오래 살았다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은 이별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 강심장이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남들보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과의 이별을 충분히 경험했던 바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즐겁게 살 용기가 내게는 없다. 적당한 때가 오면 나도 역시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를 작성할 생각이다. 아파트 인근의 공원에서는 어떤 행사가 열리는지 종일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다.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선 공원의 나무들은 가을빛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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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 충격을 주는 어떤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the wisdom of crowds)'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미국의 곤충학자인 윌리엄 모턴 휠러(William Morton Wheeler)가 1910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개미 : 그들의 구조·발달·행동(Ants : Their Structure, Develpement, and Behavior)>에서 처음 제시하였다는 이 개념은 '다수의 개체들의 협력 또는 협업을 통하여 얻게 된 집단적 능력'이라는 뜻이며, 집단지능, 협업지성, 공생적 지능이라고도 말하여집니다. 물론 이것이 요즘처럼 사회학적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그로부터 70여 년이나 지난 1983년 피터 러셀에 의한 정의였고, 사이버 공간에서의 집단지성 개념을 정리한 것은 그보다 늦게 사회학자인 피에르 레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단지성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집단적 광기'나 '집단오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뜬금없이 왜 갑자기 '집단지성'?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실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나는 최근에 뉴욕에 거주하는 여동생과 전화 통화를 한 후 '집단지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기 뉴욕시장으로 30대의 인도계 무슬림인 맘다니가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거가 있기 전부터 조란 맘다니에 대한 소식은 동생으로부터 종종 들었던 나였지만 '설마 되겠어?'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민주적 사회주의자'임을 공공연하게 밝혔을 뿐만 아니라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할 경우 뉴욕 경찰에게 체포를 지시하겠다는 공약도 내세운 상태였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지켜질지 아닐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기독교가 주류인 미국 사회에서 네타냐후가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정의를 지향하는 맘다니를 과연 몇 퍼센트나 지지할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뉴욕 시민은 나의 예상을 깨고 차기 시장으로 보란 듯이 맘다니를 선택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온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동생은 가장 큰 이유로 뉴욕의 고물가와 생활고를 들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트럼프의 독재와 일부 마가(MAGA) 세력의 비이성적 행동, 극단적 혐오와 차별이 뉴욕 시민을 움직인 결과라고 분석했습니다. 어쩌면 경제 붕괴와 민주주의의 파괴라는 위험이 맘다니의 당선을 부채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보다는 위기의 시기에 '집단지성'은 더 쉽게 발휘됩니다. 평화의 시기에 윤석열과 같은 미치광이를 국가 지도자로 뽑았던 '집단적 광기' 또는 '집단오류'가 발생되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 우리가 평화의 시기를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집단지성'의 발현을 기대하기보다 '집단적 광기'가 다시 요동치지 않을지 걱정하고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보였던 그들만의 리그, 기독교라는 폐쇄적인 집단과 기성 정치인들의 야합, 그리고 그들의 일치된 욕심과 광란의 몸짓을 다시 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귀를 열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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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9 1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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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9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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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의 정원
안리타 지음 / 디자인이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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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미지를 문자로 전환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왜곡이 따르게 마련이다. 아무리 노련한 작가라도 그것만큼은 피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즐겨 읽는 글에도 왜곡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름다운 왜곡'이라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흔히 보이는 풍경이 독자들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또는 평범한 일상이 다시없는 감동으로 읽힐 수 있다는 건 작가의 글이 그에게 내재한 '아름다움'의 변환장치를 통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아름다움의 변환장치를 수시로 점검하고 가다듬어야 한다. 아름다운 것만 보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는 것도 그중 한 방법이지 아닐까 싶다. 물론 아름다운 글을 읽는 것은 작가에게도, 독자들에게도 더없이 큰 선물이지만.


"사슴뿔 같은 고목의 자태와 산천의 벗겨진 얼굴도, 가슬가슬 메마른 들판의 품도 봄바람이 스친 자리엔 초록이 물들고 살이 올랐다. 봄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생명이 되살아난다.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햇볕을 쬐면, 빛들이 몸의 구석구석 언 세포를 깨우며 혈관을 타고 돌았다. 자연의 혼이 바람을 일으켜 인간의 혼을 깨우는 기운이 생동하는 계절이었다."  (p.32 '초봄' 중에서)


안리타 작가의 산문집 <리타의 정원>은 이렇듯 '아름다운 왜곡'으로 빼곡하다.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 이 글을 나는 왜 읽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싸일 때가 있다. 글을 읽는다고 딱히 해가 될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다. 내게 익숙한 자본주의 논리로 보자면 작가의 글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서 돈이 될 것도 아니요, 언젠가 삶의 보탬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다만 책을 읽는 데 필요한 지금의 시간과 노력을 무참히 소모하고 있다는 게 약간의 손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잡초처럼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 소중한 것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쓰레기장에서 살더라도 내면에는 꽃밭의 아름다움을 키우는 시간, 아귀다툼의 각박한 세상에서 살더라도 사랑의 온도를 1도씨 올려보겠다는 의지는 다른 이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삶의 기억, 내 영혼의 언덕에 꽃 한 그루 심는 일이 아닌가. 그것을 어찌 한낱 돈으로 환산할 수 있으랴.


"자신을 고독 속에서 마주하지 못한다면, 고독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자립하고, 자존하고, 실존적인 삶을 살 수 없으니까, 스스로가 나의 세계를 살지 못한다면, 마음이 왠지 늘 불안하고 불행해지고 마니까, 나는 마음의 중심에 늘 고독의 축대를 놓는다. 흔들리는 외부의 마찰이 조금씩 사라져갈 때까지 자전하며 이 중심의 축을 포기하지 않는다. 동시에 자신의 고독 속에서 마주한 풍경들이 아프지 않도록 어루만져준다."  (p.164 '고독예찬' 중에서)


나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현실을 아름답게 왜곡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안리타 작가가 '마음의 중심에 늘 고독의 축대를 놓는' 것처럼 이 현실을 아름답게 왜곡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변환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날것의 현실을 그저 묵묵히 견디며 살아내고 있을 뿐 '아름다운 변환'이나 '아름다운 왜곡'은 내 몸 어디에서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럴 만한 체질을 타고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름다움의 변환장치'를 나도 알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에 영영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의 문장들이 나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며 나를 추상할 것이고, 누군가는 나라는 사람을 자신의 세계와 함께 상상해볼 것이다. 수풀에 피어 있는 들풀들은 그 존재 자체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들풀을 어떻게 묘사할지, 바라봐주는 자의 마음이 완성한다. 그것은 내 세계를 벗어난 타인의 몫이므로, 나는 당신의 세계가 이제 이 문장을 완성해주기를 늘 기다린다."  (p.208)


오락가락하던 계절의 진행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고 있는 듯하다. 나는 가을 볕이 반가운 사무실 베란다 창가에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셨다. 따사로운 햇살이 까무룩 낮잠을 불러오지만, 계절이 내딛는 느릿느릿한 걸음이 차마 아까워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바람도 없는 그런 하루였다. 안리타 작가의 시선이 마냥 부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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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이야기가게
조은숙 지음 / 소코트라(socotra)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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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오히려 수채화에 가깝다. 단풍이 드는 풍경은 제각각 물든다기보다 푸르름 속으로 번지거나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물에 섞인 물감이 여백을 향해 번져가는 모습, 붓을 따라 번져가는 모습이 흡사 수채화를 빼다 박은 듯 단풍은 그렇게 물들어가는 것이다. 물에 젖어 울룩불룩 주름이 진 가을 뒷면을 곱게 다림질하여 주름을 펴면 반듯반듯한 겨울산이 흰 눈을 뒤집어쓴 채 나타날지도 모른다. 콕콕 점을 찍듯 온 천지에 연녹색 점묘화를 그리던 계절이 왕성하던 푸르름을 지나 빨갛고 노란 색깔을 푸르름 속으로 번지듯 풀어내는 때가 오면 나는 옛날 다리미에 숯불을 담아 한 해의 주름을 곱게 펼 준비를 한다.


시인이자 동화구연가인 조은숙 작가의 작품 <시가 있는 이야기가게>를 읽었다. 17편의 시와 그림이 실린 이 책은 시집이 아니라 시화집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시인의 지나온 삶이 아스라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인에게 생명은 '많은 오염과 고난을 거쳐야 비로소 피어나는' 어떤 것인 까닭에 시인 역시 삶의 고비를 돌고 돌아 지금의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책을 펼쳐 들면 한눈에 들어오는 그림과 시인의 마음결 같은 시가 독자의 마음을 따라 흐른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시인은 다음 생에도 반드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소망한다. 이웃으로부터 도움만 받고, 사랑만 받으며 살았으니 다음 생에는 '미인도 말고/공주도 말고/튼튼한 억척네로/태어나게 하소서//'('환생' 중에서) 기도한다.



사무실 창밖에는 가을 햇살을 닮은 은행잎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번지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과거의 이맘때쯤이면 시화전이 열리곤 했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영 소질이 없었던 나는 친구에게 그림을 부탁하곤 했었다. 그러면 친구는 내게 시 한 수를 써달라고 말했었다. 일종의 품앗이였던 셈인데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제출했던 시화는 액자에 걸려 전시가 되곤 했었다. 내게 그림을 그려주던 친구는 지금도 여전히 그림을 그려 먹고사는데 나는 결국 시인이 되지는 못했다. 마음에 드는 시화의 액자 밑에 줄줄이 매달리던 장미꽃처럼 나는 조은숙 시인의 시화마다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하고 싶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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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는 채 단풍이 들지 않은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비에 젖은 낙엽들이 보도블록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릅니다. 해가 나는가 싶던 하늘은 금세 또 어두워지곤 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낭만적이고 운치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우수에 젖게 하던 낙엽들이 오늘은 왠지 스산한 느낌입니다. 어린 손자를 데리고 나온 할아버지 한 분이 손자가 탄 자전거가 장애물에 걸려 멈출 때마다 자전거를 밀어 다시 또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다리 힘이 약한 손자는 작은 턱을 넘는 일도 무척이나 힘에 겨워 보입니다. 힘을 줘서 페달을 구를 때마다 뒷바퀴에 달린 보조바퀴가 간당간당 위태롭습니다. 손자로부터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오히려 당신 앞에 놓인 장애물을 이따금 놓치고 맙니다. 길가에 놓인 광고판에 걸려 어이쿠! 넘어질 듯 위태위태 걸어가는 모습이 어쩐지 짠해 보입니다.


떠들썩하던 경주 에이펙(APEC)도 모두 끝이 났습니다. 취임 후 불과 5개월의 짧은 준비 기간에 치르는 국제 행사였지만, 무사히, 그것도 성대하게 끝났다는 사실에 국민 대다수가 안도했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론 전임 대통령이었던 윤석열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그저 아찔하기만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처럼 상대국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외교 방식에 대응하여 원칙과 국익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천우신조라고 해야 옳을 듯합니다.


나가쿠라 겐타가 쓴 <나는 회사만 다니다 인생 종 쳤다>를 읽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지요? 그러나 책의 내용은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전개됩니다. 책의 앞부분만 조금 읽었을 뿐이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를 떠올렸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이직과 이주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책에선가 하루키는 자신이 이사 다니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고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기르지 못하면 앞날을 헤쳐 나가기 어렵다. 게다가 일본에서 회사원만큼 가성비가 좋지 않은 직종도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회사나 꾸준히 다니는 편이 좋다고 조언하는 사람이 더 무책임한 게 아닐까. '시키는 일이나 하고 살아라'라는 뜻과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회사를 그만두는 이들 중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퇴직과 동시에 이사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직장을 그만두는 것만으로도 '안정'을 버리게 되는 일인데, 이사까지 하니 더욱 각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33)


우리는 이따금 대중의 의견과 다른 독특한 논리를 앞세우는 사람을 '괴짜' 또는 '엉뚱한 사람' 취급하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때로 자극을 받고,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활동하기 좋은 보편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진다면 더없이 좋겠다고 생각되지만, 1년 내내 그런 날씨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요. 오늘은 바람이 거칠게 불고 쌀쌀합니다. 이런 날 우리는 나가쿠라 겐타가 쓴 <나는 회사만 다니다 인생 종 쳤다>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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