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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활발발 - 담대하고 총명한 여자들이 협동과 경쟁과 연대의 시간을 쌓는 곳, 어딘글방
어딘(김현아) 지음 / 위고 / 2021년 12월
평점 :
어느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곳에나 많은 경쟁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능력보다 노력과 열정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한계를 모르는 까닭에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노력해야 하는지, 어느 선에서 멈추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노력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우리는 지레짐작만으로 자신의 열정을 쏟아붓기도 전에 노력을 멈추곤 한다. 그리고 타인의 성취를 무척이나 부러워한다. 이런 사례는 글쓰기 분야에서도 다르지 않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하지만 모든 걸 작파하고 오직 글쓰기에만 전념하는, 소위 전업 작가에게 있어 글쓰기가 매번 즐겁기만 할까. 아무리 즐겁던 일도 자신의 업이 되는 순간 하기 싫어지는 건 만국 공통이 아닐까 싶다. 만화나 웹툰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학생도 그것이 교과서에 실리면 보기 싫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글을 잘 쓰려면 밥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하고 청소도 잘해야 한다는 내 말 따위는 잊어버렸거나 헛소리라는 것쯤 알아버렸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글방의 기원에는 입맛 좋은 소녀들이, 아, 그 총명하고 섬세하고 솔직하던, 그렇지만 한밤중에 맨발로 집을 뛰쳐나와야 했던, 고립무원의 절벽에 섰던, 견고한 벽을 향해 미친 듯 질주하던, 때로 으스러지고 부스러지던 나의 그녀들이 있다. 시도이자 예감이자 미래인." (p.83)
어딘글방을 운영한다는 어딘(김현아) 작가의 에세이 <활활발발>은 그야말로 우연히 읽게 된 책이다. 자주 들르는 도서관의 서가를 아무런 목적도 없이 훑어보던 중 제목이 특이해서 내 눈에 띄었던 책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책날개에 적힌 작가의 이력을 읽지 않았더라면 책을 빌려 집에까지 끌고 오지는 않았을 터, '어딘글방은 양다솔, 이길보라, 이다울, 이슬아, 하미나 등 출판계에 신선하고 활활발발한 바람을 불어넣은 90년대생 여성 작가들이 몸담았던 글쓰기 수련의 장이자 글쓰기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배우는 곳이었다.'라는 대목에 나도 모르게 홀딱 정신이 팔렸지 뭔가. 1부 '글방이 활활발발해지는 순간', 2부 '글도 잘 쓰고 일도 잘하는 입맛 좋은 소녀들', 3부 '세상에 꽃이 핀다면 그녀들의 웃음소리 때문이다 - 글방러들의 글 모음' 등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시종일관 유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글방을 한 지 10여 년이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써서 만나 합평회를 하는 방식에는 변함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글에 대한 피드백을 들을 때 두근두근 초긴장하는 얼굴들도 변함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늘 글이 좋았다는 편을 받은 사람의 발그레한 홍조도 변함이 없다. 얘들아 웬만하면 쓰지 마, 글 쓰는 거 힘들어, 안 쓰고 살 수 있으면 쓰지 말고 살아.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하는 말이다." (p.8 '들어가며' 중에서)
목적이 없는 독서가 즐겁듯이 글쓰기에도 목적이 없을 때 즐겁다. 물론 단점도 있다. 어딘글방처럼 글쓰기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모인 곳에서 집중적으로 글쓰기를 연마하지도, 그렇다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나와 같은 얼치기 독서인은 아무리 책을 읽어도 글쓰기 실력에는 도통 진척이 없다는 것이다. 글을 써서 돈벌이를 하겠다는 목표도, 그렇다고 남들보다 더 멋진 글을 써서 이름을 날려보겠다는 목표도 없으니 나의 글은 언제나 일기 수준의 끄적임에서 머무를 뿐이다. 하지만 장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읽었던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도 있고, 속절없는 분노나 슬픔이 치솟을 때도 비록 형식에는 맞지 않는 글이지만 뭔가 써보려고 컴퓨터를 켜서 빈 화면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가라앉곤 하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라고 나는 종종 말하곤 한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도 아주 열심히 진지하게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매번 새롭고 놀랍다. 저 명민한 이들은 알아챈 것이다. 자신이 우주라는 걸, 내 한 몸이 꽃일 때 온 세상이 봄이라는 걸. 그렇지 않고서야 글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토록 열렬히 글방을 열어가다니. 이들로 인하여 글방은 확장되고 변주되고 진화한다. 그리고 연결된다, 당신과 나, 이토록 우연히 이토록 찬란히." (p.244~p.245)
꽤나 오랜 시간 블로그를 운영하는 나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물론 그들 각자가 추구하는 목적은 서로 다르겠지만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쓰고, 이웃을 만들고, 때로는 맘에 드는 누군가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연결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사실 나의 감정 조절을 목적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고는 있지만 타인과의 연결에 때론 충만함을 느낀다. 나와 일면식도 없고 서로에 대해 아는 바도 없지만 단지 글을 통하여 서로를 칭찬하고, 위로하고, 지지한다는 이 사실이 때론 놀랍다. 당신과 나의 연결이 이토록 찬란하다고 쓴 작가의 마지막 문장이 조용한 주말 오후에 작은 파문으로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