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식 이별 - KBS클래식FM <김미숙의 가정음악> 오프닝 시 작품집
김경미 지음 / 문학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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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입니다. 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을을 기다리며 한 권의 시집을 읽겠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나는 우리가 또는 길고 긴 여름을 보내는 우리가 따뜻한 봄이나 선선한 가을을 기다리며 우리는 마치 하늘에 보내는 짧은 제문처럼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어쩌면 이쯤에서 우리의 고난을 끝내고자 하는 작은 바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절은 가고 또 오는 것, 그 숱한 회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성마른 성격의 인간에게 부여된 인내의 한계는 참으로 얕고 얕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고, 나는 영혼에 찌든 때를 씻어내듯 한 편의 시를 읊어야 했던 것입니다.


가을입니다


며칠 사이에

복사지처럼 얇게 느껴지는 여름옷들


그 복사지로는


물들기 시작한 가을 은행잎과 단풍잎들

다 베낄 수 없어서


두툼한 노트 한 권

스웨터 한 벌 마련한 가을입니다


가을 강물 보러 왔는데

갈대만 보이는 계절입니다


반송되어온 편지묶음 같은 갈대들


세상 모든 감정 뒤섞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가을입니다.  (p.264)


<김미숙의 가정음악> 오프닝시를 2019년 3월부터 일주일에 7편씩 매일 썼었다는 김경미 시인의 시집 <카프카식 이별>은 어쩌면 전적으로 낭송을 위해 쓰인 시만 묶은 낭송 시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는 목소리를 숨긴 채 눈으로만 읽히는 소리 없는 시가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로 혹은 세상 모든 사람의 목소리로 읽혀야만 하는 낭송을 위해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목소리를 잃은 시는 순전히 목소리만 잃었던 것은 아닌 듯 사람의 온기마저 잃고 우리 곁에서 멀어졌습니다. 시를 읽지 않는 세상에 텅 빈 계절이 소리도 없이 오가고, 우리는 그렇게 텅 빈 세월을 허무하게 살다가 하냥 사라졌습니다. 김경미 시인은 우리에게 시를 배달했던 게 아니라 뜨겁지 않은 체온을 날마다 전해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카프카식 이별 1


그만두자고 일방적으로 상처 주고 떠나온 여행


누워도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 같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3등석 2층 침대 윗칸에서


이별이 고통스럽기는 왜 내가 더 고통스러운지  (p.176)


갓 태어난 아이가 말을 배우듯 나는 시인의 시를 한 자 한 자 눌러가며 서툰 솜씨로 시를 낭송합니다. 나의 목소리는 시나브로 작아져만 가고 종국에는 소리를 잃고 흔적만 남았습니다. 가만가만 불렀던 나의 노래가 하늘을 훨훨 날아올라 가을을 기다리는 한 편의 제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늘 어딘가에 머물다 가을을 재촉하는 한 방울의 비로 떨어지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누군가의 바람이 비가 되어 내립니다. 어쩌면 우리가 시를 읊어 가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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