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몸이 바닥까지 가라앉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일조차 마냥 귀찮게 여겨진다. 어제저녁이 그랬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다만 작은 주방창으로 흘러드는 성근 저녁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고, 지금은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이들의 얼굴을 하나둘 떠올렸었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소파에 누웠던 게 다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에 대해 '왜?'라거나 '왜 나에게?'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걸 삶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렇게 묻고 따진다면 내가 믿는 하느님도 당황스러울 테니까 말이다. "너에게는 안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어나도 된다는 논리냐?"라고 하느님이 내게 되묻는다면 나는 마땅한 대답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건이나 사고는 다만 그 시간에, 그에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그것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고 나는 담담히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불행의 원천은 '혹시 내가 하느님께 불경한 일을 저질러서?', '주변의 다른 누군가에게 저질렀던 못된 짓에 대한 죄과로?', '조상의 묘를 잘못 써서?' 등 온갖 종류의 인과를 자신에게 귀결시키다 보면 없던 병도 생길 가능성이 높고, 그것 역시 평소 자신이 믿는 신을 당혹게 하는 정신 자세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종교의 필요성 역시 사라질 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 한 번씩 몸도 마음도 크게 흔들리거나 심하게 허물어질 때가 있다. 어제처럼. 나 역시 정신적으로 취약한 보통의 인간 중 한 사람일 뿐 수도자가 아닌 까닭에 그와 같은 우울을 피하거나 예방할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것 역시 이따금 발병하는 감기처럼 그 순간에 일어난 하나의 현상일 뿐이라고 믿게 될 뿐.


갑자기 휘몰아치는 격한 감정이나 정신적 추락에 대해 나는 저항하거나 반항할 생각을 일절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동안 무심히 나 자신을 지켜보다 보면 뭔가 다른 하고픈 일이 생기고 바닥났던 의욕도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이다. 머리맡에 두었던 책을 읽는다거나 밖으로 나가 조금 걷는다거나 예전에 보다 만 영화를 이어서 본다거나 그도 저도 싫으면 그저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울에서 벗어나는 다른 좋은 방법들이 얼마든지 있겠지만 나는 적어도 나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들이 여러 번 발생할 테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켜가지 않을까 싶다.


오늘도 바깥 기온은 여전히 높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가로수 밑 그늘로 숨어들고 있다. <이것은 꿈인 동시에 생시>를 읽고 있다. 다섯 명의 시인이 쓴 이 책은 마치 그들이 쓴 산문시처럼 읽히지만 사실은 그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쓴 에세이.


"인연을 떠나보낸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제멋대로 화락 펼쳐지는 장우산처럼, 내 속도 있는 대로 펼쳐지던 때가 있다. 바야흐로 사랑의 우기였다. 그럴 때에 나는 해가 쨍쨍 드는 거리에서 혼자만이 커다란 장우산을 쓰고 가듯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어디 구석에다가 이 거추장스러운 속마음을 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기어코 접어지지 않는 커다란  장우산을 쓰고 내가 걸어왔던 거리를 그대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빗살을 하나하나 다시 가누고 우산을 접듯 속마음을 접어둘 수가 있다."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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