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눈이 내려 대한민국은 이제 온통 눈 세상이 되었습니다. 건듯 불어오는 바람도 눈의 냉기를 한껏 머금은 듯 조금의 온기마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청량합니다. 점심을 먹은 후 더부룩한 속을 달래느라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보이고, 햇볕을 쪼이며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 모습도 보입니다. 12월의 첫 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표정은 이렇듯 냉랭한 한기 속에 적잖이 움츠러든 모습입니다.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추구하던 편안함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사실 나는 그와 같은 편안함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미련하다는 세평을 꽤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쿠팡을 이용하지 않는 까닭에 장을 보기 위해 직접 마트를 방문해야 하는 것은 물론 간단한 것을 구매할 때에도 편의점이나 인근의 가게를 방문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나는 어떤 배달앱도 이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배달 음식이 먹고 싶을 때에는 가게에 직접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한 후 약속 시간에 맞춰 찾으러 가곤 합니다. 게다가 나는 남들 다 한다는 '페이'도 이용하지 않고 플라스틱 카드로 결제를 하곤 합니다. 독서를 좋아하지만 전자책은 이용하지 않고 오직 종이책만 고집합니다.


이런 내 모습이 직장 동료들에게는 구시대적 유물처럼 보이나 봅니다. 그럼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나의 루틴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껏 나의 개인정보가 단 한 번도 유출된 적이 없었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과거 내가 이용하던 인터파크에서도, 최근에는 SK텔레콤에서도 나의 개인 정보는 무참히 유출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내가 이용하던 인터넷 사이트에서 두어 번의 정보 유출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어차피 개인정보가 유출될 거면 편안함을 추구하고 유출되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나에게 주장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편안함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입니다.


인간의 삶은 어쩌면 아날로그적 경험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실수와 그로 인해 우리가 지불하는 많은 불편과 시간낭비를 통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편안함과 효율성만 추구하다 보면 우리의 삶도 그렇게 효율적으로 흘러가게 될 것 같은 불안이 나를 이따금 깨어나게 합니다. 그것은 마치 대량생산을 담당하는 자동화된 공장과 다를 게 없는 듯합니다. 나의 삶도, 당신의 삶도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단일한 삶이라면 우리는 굳이 개별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겠지요. 당신의 삶도, 나의 삶도 이제껏 없었던 고유한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와 같은 삶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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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간밤에 눈이 조금 내렸다. 첫눈이었다. 포근한 날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우리가 기대하는 첫눈의 낭만이나 환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온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날씨는 추웠다.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잊지 못할 기억 때문인지 눈송이마저 푸슬푸슬 가늘게 쪼개지는 듯했고, 옹송그린 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눈이 내리는 허공을 향하지 않고 시종일관 땅으로만 향해 있었다. 나는 행인들의 우울한 시선을 뒤로한 채 서둘러 차를 몰았다. 연말의 바쁜 일정 틈틈이 읽기 시작했던 권여선 작가의 <푸르른 틈새>도 이제 몇 쪽 남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어떤 소설이건 소설을 읽는 독자는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손에 땀이 나고 호흡은 거칠어지게 마련, 그 순간에 다른 일로 어쩔 수 없이 책을 손에서 놓아야 했던 독자는 마치 책이 펼쳐 놓은 그물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듯 어서 빨리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허둥대게 된다.


"나는 연애가 아니라 이별을,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을 기억한다. 연애의 시작이나 과정은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지만 연애의 끝은 언제나 특별하다. 나는 그 특별한 그리움과 집착, 뒤틀린 내 몸 안에 도사리고 있던 특별한 사나움을 기억한다. 실제보다 더 길어 보이는 욕실 거울처럼 이별의 순간을 몹시 길고 캄캄한 세월로 반사하는 내 기억의 틀 속에서......"  (p.202)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소설의 주인공인 미옥이 이사를 앞둔 7일 동안 자신의 자취방에서 서른 살에 이르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함으로써 자신에게 있었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그녀의 인생은 대학 시절을 거쳐 삼십 대인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회고의 중심은 민주화 운동기였던 1980년대 중후반의 대학가를 배경으로 미옥이 운동권 여대생으로 정착되었던 시점을 부각하고 있다. 1960년대에 태어나 대학 입학 정원 확대와 중산층의 성장에 기대어 대학에 진학했고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광장에 섰던 혹은 억지로 그곳에 서야만 했던 시대 상황과 여성성을 억압한 채 남성 중심의 운동 문화 속에서 중성적 여인으로 성장해야 했던 불합리한 현실이 소설 속에 투영되고 있다.


"어느 날엔가 나는 꽃무늬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서 가구에 둘러싸인 채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움직일 수 있다고, 내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믿음과는 달리 습기를 잔뜩 머금은 젖은 나무토막처럼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이렇게 서서히 젖어가고 싶다는 축축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먼 훗날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 내겐 전혀 개의치 않고 이 방의 가구들과 함께 나를 들어내어서 어디론가 싣고 가 낱낱이 부수어주기를, 그렇게 해체된 채로 햇볕 받으며 말라가기를, 골수부터 관절까지, 마디마디까지 곰팡이로 뒤덮였던 몸이 콱콱 쪼개지고 틀어지며 버쩍버쩍 말라가기를 나는 꿈꾸었다."  (p.154~p.155)


어린 시절 미옥은 원양어선을 탔던 아버지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없었지만, 가산을 탕진한 외삼촌으로 인해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 식구들이 미옥의 집에 얹혀살았다.  둘째 이모는 남편의 바람기로 자식과 함께 미옥의 집으로 들어왔고, 사업으로 가산을 탕진한 외삼촌으로 인해 외숙모 역시 비슷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미옥의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실직자가 되었을 때 둘째 이모부는 사업에 성공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외숙모와 외할머니 역시 미옥의 집을 떠났다. 운동권의 현실에 실망했던 미옥이 휴학계를 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미옥과 아버지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집 안에서 머물러야만 했다. 미옥이 다니던 대학에 복학하면서 여성성을 회복하고 한영과의 연애가 시작되는데...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 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듯하다."  (p.280)


곤두박질쳤던 기온은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다. 어떤 작가든 그의 초기작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약간의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운 느낌과 함께 작가 자신의 선명한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부각되곤 한다.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세계관이 작품 속에 진솔하게 묻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유정 작가의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쓴 소설의 권수가 더해지고 세월이 흐를수록 작가 본연의 색채는 옅어지지만, 어색했던 문장은 더욱 매끄러워진다. 그것을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따금 작가의 데뷔작이 몹시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첫눈을 그리워하듯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의 데뷔작을 나는 오늘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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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베란다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내려다보면 아이들 놀이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휴일 한낮의 느긋함을 확인하기 위해 놀이터의 풍경을 몰래 훔쳐보곤 한다. 쇠양배양 돌아치는 아이들의 잰 몸놀림을 미처 따라잡지 못한 시간은 급할 것 없다는 듯 느릿느릿 흘러간다. 꾸물꾸물 늦장을 부리는 시간 속을 쉼 없이 움직이는 아이들. 극과 극의 대비가 휴일 한낮의 놀이터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은 군에 있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응시하는 부모의 시선이 되었다가 이따금 거침없이 뛰노는 아이의 시선이 되기도 하면서 단지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느긋한 여유를 즐긴다. 휴일의 시간은 그렇게 나릿나릿 흘러간다.


12월의 첫날.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비장한 표정이다. 하필이면 첫날이 월요일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어제보다 기온이 떨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또는 비상계엄 1주년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켜보고 있을 때의 시간은 정말 느리게 흐르지만 대충 뭉뚱그려 따져보는 시간은 너무너무 빨리 흐른다. 벌써 1년이라니... 뜬금없는 비상계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 그리고 암담하게 흘러가던 시간들. 내란에 대한 죄과가 낱낱이 드러난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처벌이 시작된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 처참하고 암담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고 있다.


영화감독 윤가은의 산문집 <호호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나는 별자리 운세에 꽤 진지하다. 꿈은 너무 멀고 사랑은 계속 아픈데, 나는 내 마음조차 모르겠어 끝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에 별자리를 만났다. 친한 선배의 소개로 점성술사 수전 밀러의 별점을 다달이 번역해 올려주는 개인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가 전에 경험한 적 없던 큰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크고 따뜻한 무언가가 나와 내 인생을 깊이 이해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절대 겁을 주거나 경고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저 다정하게 위로하고 부드럽게 격려할 뿐이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도 같았다. 너와 비슷한 주기로 넘어지고 일어나는 다른 친구들도 많이 있다고, 그들과 함께 가는 거니까 너무 외로워 말고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것도 같았다."  (p.165)


우리는 비록 별자리는 서로 다르지만 '비상계엄'이라는 엄청나게 높은 산을 함께 넘은 동지이자 동시대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시민으로서 '비상계엄 1주기'에 맞춰 힘내라는 응원의 말이라도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추워진 날씨에 우리는 갑자기 서로의 건강이 문득 걱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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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 장수에서 광장으로 - 민주화 운동가 이오순 평전
임수정 지음 / 밥북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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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운명은 한순간에 변한다. 살아보니 그렇다. 우리는 마치 두께가 다른 얼음판 위에 서서 어디가 얇은지 또는 어디가 두꺼운지 도통 아무런 정보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얼음판의 둘레를 마구 헤집고 다니는 꼴이다. 겁도 없이 말이다. 단 한 번도 나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얇은 얼음 위를 딛지 않는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물론 얇은 얼음을 디뎠지만 물에 휩쓸리기 직전에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경우도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삶을 유지하는 건 두렵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두렵다고 해서 다들 한 귀퉁이에 모여 오들오들 떨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두려움을 떨치고 과감히 일어나 자신이 밟을 곳이 살얼음판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한 발을 내딛는 이도 있고, 그것을 똑똑히 지켜본 이들 역시 자신의 두려움을 툭툭 털고 일어서 다른 이의 평안한 삶을 위해서, 그리고 현실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자신의 편안한 삶을 기꺼이 포기하기도 한다. 삶의 용기는 그렇게 하품처럼 전염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이 두려울 때마다 그들의 지난 삶을 회상하기도 하고, 그들의 용기를 가슴에 깊이 새기기도 한다.


"나는 처음부터 이오순의 외동딸 송영숙에 주목했다. 이오순이 서울로 장사하러 떠날 때 열 살이었던 송영숙은 엄마 없는 집에서 가사를 전담했다. 1965년 가족들이 서울로 이주할 때 함께 상경했으며 청계천 봉제공장에 취직해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막냇동생 송광영이 분신하자 엄마와 함께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내가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일흔여섯의 송영숙은 치매를 앓고 있었다. 대부분의 질문에 '다 좋았다'고 답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느냐고 묻자 '막둥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제'라고 답했다."  (p.6 '책머리에; 중에서)


나는 평전을 좋아한다. 개인의 일생에 대한 필자의 논평이 곁들여진 평전은 전기문에 비해 객관적이고 학술적이라는 게 다수의 견해다. 물론 미화와 왜곡으로 점철된 평전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수정 작가가 쓴 <민주화 운동가 이오순 평전, 돗자리 장수에서 광장으로>를 읽게 된 것도 지금까지 내가 유지해 온 독서 편력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발의했던 학원안정법에 반대하여 스스로 분신의 길을 택했던 이오순 여사의 아들 송광영 열사를 익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책을 읽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했다. 사실 8,90년대의 민주화 과정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에게 있어 '송광영'은 낯선 이름이다. 더구나 그의 모친이었던 '이오순'은 더더욱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독재에 저항하고 그들의 탄압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용기와 헌신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오순은 숨죽인 채 오열했다. 머리에 삼베수건을 쓰고 대열의 맨 앞에 서 있던 유가협 어머니들 그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울음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 뚝뚝 떨궜다. 동백꽃이 툭, 질 때처럼. 심장이 벌떡이는데도 소리 내 울 수는 없었다. 울음소리를 내는 순간 광영의 죽음은 개인적인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이오순은 그때 알았다. 침묵만큼 처절하고 슬픈 오열은 없다는 것을. 광영의 죽음, 열사들의 자기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순수한 피흘림이라는 것을. 수천의 군중 앞에서 열사로 호명되는 순간 광영의 죽음은 그 의미가 분명해졌다는 것을. 막내아들 광영은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투사라는 것을 가슴에 또렷하게 새겼다."  (p.213)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에 태어난 이오순은 그녀의 나이 38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다섯 명의 어린 자식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다가 1994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산이나 연고도 없이 자식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살이를 시작했던 1959년부터 그녀의 삶은 오롯이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한 셈이었다. 더구나 1985년에 막내아들을 잃고 1986년부터 시작된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창립회원으로서의 활동은 평범한 아낙이었던 이오순을 광장의 투사로 변모시켰다. 산업화시기에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그들의 허기진 일상을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지지 않았던 위정자와 기업인들로 인해 거리는 온통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갔고, 공장 노동자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갔었다. 나는 이오순 평전을 읽는 내내 송광영 열사의 짧았던 생애를 떠올렸고, 언젠가 읽었던 권여선 작가의 <푸르른 틈새>가 나도 모르게 오버랩되었다.


"이오순은 자식뿐만 아니라, 이웃, 일가친척, 유가협 동지들을 돌보며 함께 살아갔다. 그녀는 언제나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조용히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헌신을 했을까? 수많은 자료를 훑어보아도 '무엇을 좋아했다', '무엇을 즐겼다'는 기록은 없었다. 늘 돈을 벌러 다녔고 시위에 참여했고 유가협 회원들과 한울삶에서 지냈다."  (p.289 '에필로그' 중에서)


숨이 컥컥 막혀 곧 죽을 것 같던 현실도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듯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기억 속의 시간은 언제나 중력을 잃고 부유한다. 그러나 가벼이 떠다니던 기억들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졌을 때,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그때의 기억을, 그 시절의 삶을 가슴으로 살아내게 된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한 우리는 남편과 자식을 잃고 억척같이 살았던 한 여인의 삶을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오순이라는 여인과 그 여인을 어머니로 두었던 송광영이라는 이의 뜨거운 피가 책을 통하여 수혈되었는지도 모른다. 영하로 떨어졌던 오늘 아침의 기온 속에서 조금의 추위도 느끼지 못한 채 산을 오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런 까닭이었을 테다. 삶의 열정은 역사의 물관을 타고 그렇게 끝없이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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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긴 슬픔이 가슴을 헤집어놓고 사라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인간이란 본디 기쁨보다는 슬픔에 더 익숙한 까닭에 슬픔이 찾아올 때면 오히려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이 들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슬픔이 지나간 뒤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온몸에 힘이 빠지고 만사에 의욕이 사라지곤 합니다. 한번 그렇게 떨어진 의욕이 다시 보통 사람의 그것으로 회복하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열고 슬픔이 무시로 드나들 수 없도록 가슴을 꽁꽁 걸어 잠그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어디 현관문을 잠그듯 필요할 때마다 그렇게 잠가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문지기를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요.


오늘 아침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습니다. 나는 탁하고 텁텁한 미세먼지의 온기에 기대어 비교적 수월한 산행을 했습니다. 어제 내렸던 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워낙 적은 양의 비가 내렸던 탓일 테지요. 다만 어제 불던 바람은 잦아들어 어둠에 싸인 숲은 그저 고요했습니다. 나는 사실 요 며칠 뉴스를 뒤덮었던 내란 재판 변호사들의 난동과 대한민국의 종교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난동을 부렸던 변호사들 역시 종교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는 개신교는 자신들의 돈에 대한 탐욕을 교묘한 언어로 숨겨왔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거나 자유시장경제 등의 언어를 교묘하게 섞어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그와 같은 언어 뒤에 숨겨왔습니다. 사리사욕을 위해 전두환과 같은 살인자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목사도 있고, 피고인 김건희와 함께 사찰을 방문하여 절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종교는 뒷전이고 오직 자신의 권력과 돈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실 나는 대한민국 개신교의 발전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자신의 종교를 단순히 돈과 권력을 획득하는 용도로 사용해 왔다는 데 화가 날 뿐입니다. '그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닌데 왜 갑자기?'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겠습니다만, 윤석열 정권을 지나오면서 그들의 행태는 선량한 국민들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난동을 부렸던 변호사는 "일본 제국주의가,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선진국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관이 같은 놈을 데리고 있으니까 우리가 선진국이 못 되는 거죠. 저 같잖은 놈이, 안경 쓴 키 작은 남자라고 써 놓고서 자기 얘기인지도 모르고.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입니까?"라는 말 속에는 자신을 감치한 판사를 조롱하는 것과 더불어 그의 뇌리에 뿌리 깊이 박힌 일제에 대한 찬양과 동경의, 얼룩진 역사 인식이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폴란드를 침공했던 독일 나치에 대해 오직 자신의 돈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대중이 용납할 수 없는 언어로 나치를 찬양하는 폴란드 유태인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반역자인 동시에 인류 보편적 인권에 반하는 언어를 내뱉은 자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국가인권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종교를 방패막이 삼아 장애인이나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며 증오를 부추깁니다.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해야 할 그들이 앞장서서 인권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태는 박근혜 정권을 넘어서면서 일부 불교 종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말하자면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돈과 권력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돈에 눈이 먼 그들이 대중에게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합니다.


종교를 방패로 삼는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의 언어가 주로 욕설과 저주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진실한 종교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혐오와 차별, 그리고 증오의 언어로 어찌 신의 사랑이나 자비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사이비 종교인일 뿐입니다. 나는 비록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지만 그들처럼 인간에 대한 증오의 말을 쏟아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신실한 종교인으로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서로 종교가 다를지라도 인류애라는 보편적 가치는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조국과 민족을 배신할 수 있고, 같은 민족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내는 그런 비열한 인간은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적어도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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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1-2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개신교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같은 이가 나와서 뭔가 싹다 정리를 해야할 거 같습니다~

꼼쥐 2025-11-28 13:53   좋아요 0 | URL
지금이야말로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기인 게 아닌가 싶어요. 소위 목회자라는 놈들이 돈과 권력에 눈이 멀었으니...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