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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간밤에 눈이 조금 내렸다. 첫눈이었다. 포근한 날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우리가 기대하는 첫눈의 낭만이나 환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온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날씨는 추웠다.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잊지 못할 기억 때문인지 눈송이마저 푸슬푸슬 가늘게 쪼개지는 듯했고, 옹송그린 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눈이 내리는 허공을 향하지 않고 시종일관 땅으로만 향해 있었다. 나는 행인들의 우울한 시선을 뒤로한 채 서둘러 차를 몰았다. 연말의 바쁜 일정 틈틈이 읽기 시작했던 권여선 작가의 <푸르른 틈새>도 이제 몇 쪽 남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어떤 소설이건 소설을 읽는 독자는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손에 땀이 나고 호흡은 거칠어지게 마련, 그 순간에 다른 일로 어쩔 수 없이 책을 손에서 놓아야 했던 독자는 마치 책이 펼쳐 놓은 그물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듯 어서 빨리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허둥대게 된다.
"나는 연애가 아니라 이별을,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을 기억한다. 연애의 시작이나 과정은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지만 연애의 끝은 언제나 특별하다. 나는 그 특별한 그리움과 집착, 뒤틀린 내 몸 안에 도사리고 있던 특별한 사나움을 기억한다. 실제보다 더 길어 보이는 욕실 거울처럼 이별의 순간을 몹시 길고 캄캄한 세월로 반사하는 내 기억의 틀 속에서......" (p.202)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소설의 주인공인 미옥이 이사를 앞둔 7일 동안 자신의 자취방에서 서른 살에 이르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함으로써 자신에게 있었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그녀의 인생은 대학 시절을 거쳐 삼십 대인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회고의 중심은 민주화 운동기였던 1980년대 중후반의 대학가를 배경으로 미옥이 운동권 여대생으로 정착되었던 시점을 부각하고 있다. 1960년대에 태어나 대학 입학 정원 확대와 중산층의 성장에 기대어 대학에 진학했고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광장에 섰던 혹은 억지로 그곳에 서야만 했던 시대 상황과 여성성을 억압한 채 남성 중심의 운동 문화 속에서 중성적 여인으로 성장해야 했던 불합리한 현실이 소설 속에 투영되고 있다.
"어느 날엔가 나는 꽃무늬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서 가구에 둘러싸인 채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움직일 수 있다고, 내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믿음과는 달리 습기를 잔뜩 머금은 젖은 나무토막처럼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이렇게 서서히 젖어가고 싶다는 축축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먼 훗날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 내겐 전혀 개의치 않고 이 방의 가구들과 함께 나를 들어내어서 어디론가 싣고 가 낱낱이 부수어주기를, 그렇게 해체된 채로 햇볕 받으며 말라가기를, 골수부터 관절까지, 마디마디까지 곰팡이로 뒤덮였던 몸이 콱콱 쪼개지고 틀어지며 버쩍버쩍 말라가기를 나는 꿈꾸었다." (p.154~p.155)
어린 시절 미옥은 원양어선을 탔던 아버지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없었지만, 가산을 탕진한 외삼촌으로 인해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 식구들이 미옥의 집에 얹혀살았다. 둘째 이모는 남편의 바람기로 자식과 함께 미옥의 집으로 들어왔고, 사업으로 가산을 탕진한 외삼촌으로 인해 외숙모 역시 비슷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미옥의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실직자가 되었을 때 둘째 이모부는 사업에 성공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외숙모와 외할머니 역시 미옥의 집을 떠났다. 운동권의 현실에 실망했던 미옥이 휴학계를 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미옥과 아버지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집 안에서 머물러야만 했다. 미옥이 다니던 대학에 복학하면서 여성성을 회복하고 한영과의 연애가 시작되는데...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 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듯하다." (p.280)
곤두박질쳤던 기온은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다. 어떤 작가든 그의 초기작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약간의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운 느낌과 함께 작가 자신의 선명한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부각되곤 한다.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세계관이 작품 속에 진솔하게 묻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유정 작가의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쓴 소설의 권수가 더해지고 세월이 흐를수록 작가 본연의 색채는 옅어지지만, 어색했던 문장은 더욱 매끄러워진다. 그것을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따금 작가의 데뷔작이 몹시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첫눈을 그리워하듯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의 데뷔작을 나는 오늘도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