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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평점 :
소설가는 기본적으로 그가 속한 사회의 변화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지닌 인간이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구성원이 미처 감지하지 못한 미세한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인지하는 것은 물론 그와 같은 현상을 직접적인 설명이 아닌, 익숙한 배경과 친숙한 인물을 배치한 가상의 공간에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변화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이 소설가가 담당해야 할 몫이라는 뜻이다. 그러자면 소설가는 자신의 눈과 귀는 물론 영혼의 수신기마저 대중을 향해 활짝 열어 놓을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김애란의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는 내내 나는 소설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는 한편 김애란 작가는 누가 뭐래도 우리 시대의 좋은 소설가 중 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한 시절 누군가와 정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해서, 긴장과 웃음, 안부를 나눴다 해서 헤어짐이 이렇게 서운할 줄은 몰랐다. 이상하지. 직장에서는 그 모든 게 지겨웠는데. 사회적 감각의 스위치를 꺼두고만 싶었는데. 고향에서 엄마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의 관계로 세계가 쪼그라들자 그 많은 언어가 그리워졌다. 실수하고, 변명하고, 거짓말하고, 반문하고, 더러 표 안 나게 유혹하고, 티 나게 매혹하고, 긍정하고, 의심하고, 호응하는 사회적 몸짓이. 그래서 그 일부를 한동안 내준 로버트가 필요 이상으로 소중하고 친밀하게 다가왔는지 몰랐다." (p.254 '안녕이라 그랬어' 중에서)
표제작인 '안녕이라 그랬어'를 비롯하여 '홈 파티', '숲속 작은 집', '좋은 이웃', '이물감', '레몬케이크', '빗방울처럼'의 총 6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에서 작가는 어떤 집단에 소속되기를 갈망하는 개인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탈락하거나 그 집단의 기존 구성원으로부터 내쳐지는 상황에서 개인이 겪는 상실감과 절망을 그리고 있다. 예컨대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어떻게든 그들 집단에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성민이 그들 중 한 사람인 오 대표가 주최한 홈 파티에 삼류 배우인 이연을 대동하고 참여하지만 사회적 지위나 금전적 차이 등 여러 이유로 겉돌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린 '홈 파티'나 집에서 독서 토론 수업을 하고 있는 '나'는 어느 날 신혼부부인 듯 보이는 젊은 남녀가 위층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며 인테리어 공사에 대한 협조를 구하는 입주민 동의서에 사인을 해주면서 소음으로 인한 갈등을 겪게 되는데, 그것을 계기로 전세를 살고 있는 '나'의 처지와 경제적으로 자신보다 못하다고만 여겼던 학생의 부모가 신축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한다는 소식에 상실감과 절망에 빠진다는 '좋은 이웃' 등은 우리 사회가 친밀도나 경제적 지위에 따라 예전보다 더욱 세분화되고 그렇게 세분화된 집단과 집단 간에 발생하는 배척과 적의는 더욱 강해지고 있음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 그 실상을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 욕구, 생존 욕구 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p.141 '좋은 이웃' 중에서)
마을이나 지역 또는 국가 단위의 공동체의 유지와 결속력은 어쩌면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개개인의 친밀도나 비슷한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기존에 형성되었던 집단은 나날이 소규모로 분화되고, 한 집단에 소속되었던 구성원 역시 어떤 사고나 건강, 또는 재정상의 이유로 집단에서 탈락하여 어쩔 수 없이 더 낮은 계급의 집단에 편입되는 일은 전에 비해 더 흔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에 따라 상실감과 절망에 빠지는 개인은 나날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어떤 집단에서 탈락한 개인은 전에 속했던 집단의 정체성을 꾸준히 유지하는 까닭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조건에 따라 이합집산이 현실화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구성원 대다수가 심각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김애란 작가는 그와 같은 현상을 정확히 짚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책에 실린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김애란 정도 되면, 즉 한 작가가 자기만이 아니라 문학 자체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면, 그를 통해 문학의 본질을 곧장 말할 수도 있게 된다. 자주 사용되는 개념은 '재현'과 '표현'이다. '재현 represent'은 세계를 더 선명하게 다시 나타나게 하는 일이고, '표현 express'은 주체의 감정을 밖으로 정확히 찍어내는 일이다. 김애란의 재현에 대해서는, 누군가를 사회학자라고 규정할 자격이 사회학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 (p.311 '해설' 중에서)
처서도 지났는데 올여름 더위는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이 무색하게 질병관리청에서는 말라리아 경보와 함께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말라리아는 백신도 없다면서 말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내적 친밀도와 의식적 계층 구분에 따라 세분화되고 폐쇄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것이 비단 최근에 불어닥친 갑작스러운 변화일까마는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그와 같은 현상이 급격히 강화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으로 그친다면 별 문제가 없을 듯 보이지만 집단 상호간의 유대는 단절되고 그에 따라 적대감마저 보이고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작가의 말'이 내게 주었던 의미를 곰곰 되짚으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앞으로도 저는 삶이 무언지 모른 채 삶을, 죽음이 무언지 모른 채 죽음을 그릴 테지만, 때로는 그 '모름'의 렌즈로 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음을 새로 배워나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뒤늦은 깨달음의 형태로 다가오니까요." (p.316~p.317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