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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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기본적으로 그가 속한 사회의 변화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지닌 인간이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구성원이 미처 감지하지 못한 미세한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인지하는 것은 물론 그와 같은 현상을 직접적인 설명이 아닌, 익숙한 배경과 친숙한 인물을 배치한 가상의 공간에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변화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이 소설가가 담당해야 할 몫이라는 뜻이다. 그러자면 소설가는 자신의 눈과 귀는 물론 영혼의 수신기마저 대중을 향해 활짝 열어 놓을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김애란의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는 내내 나는 소설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는 한편 김애란 작가는 누가 뭐래도 우리 시대의 좋은 소설가 중 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한 시절 누군가와 정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해서, 긴장과 웃음, 안부를 나눴다 해서 헤어짐이 이렇게 서운할 줄은 몰랐다. 이상하지. 직장에서는 그 모든 게 지겨웠는데. 사회적 감각의 스위치를 꺼두고만 싶었는데. 고향에서 엄마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의 관계로 세계가 쪼그라들자 그 많은 언어가 그리워졌다. 실수하고, 변명하고, 거짓말하고, 반문하고, 더러 표 안 나게 유혹하고, 티 나게 매혹하고, 긍정하고, 의심하고, 호응하는 사회적 몸짓이. 그래서 그 일부를 한동안 내준 로버트가 필요 이상으로 소중하고 친밀하게 다가왔는지 몰랐다."  (p.254 '안녕이라 그랬어' 중에서)


표제작인 '안녕이라 그랬어'를 비롯하여 '홈 파티', '숲속 작은 집', '좋은 이웃', '이물감', '레몬케이크', '빗방울처럼'의 총 6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에서 작가는 어떤 집단에 소속되기를 갈망하는 개인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탈락하거나 그 집단의 기존 구성원으로부터 내쳐지는 상황에서 개인이 겪는 상실감과 절망을 그리고 있다. 예컨대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어떻게든 그들 집단에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성민이 그들 중 한 사람인 오 대표가 주최한 홈 파티에 삼류 배우인 이연을 대동하고 참여하지만 사회적 지위나 금전적 차이 등 여러 이유로 겉돌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린 '홈 파티'나 집에서 독서 토론 수업을 하고 있는 '나'는 어느 날 신혼부부인 듯 보이는 젊은 남녀가 위층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며 인테리어 공사에 대한 협조를 구하는 입주민 동의서에 사인을 해주면서 소음으로 인한 갈등을 겪게 되는데, 그것을 계기로 전세를 살고 있는 '나'의 처지와 경제적으로 자신보다 못하다고만 여겼던 학생의 부모가 신축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한다는 소식에 상실감과 절망에 빠진다는 '좋은 이웃' 등은 우리 사회가 친밀도나 경제적 지위에 따라 예전보다 더욱 세분화되고 그렇게 세분화된 집단과 집단 간에 발생하는 배척과 적의는 더욱 강해지고 있음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 그 실상을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 욕구, 생존 욕구 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p.141 '좋은 이웃' 중에서)


마을이나 지역 또는 국가 단위의 공동체의 유지와 결속력은 어쩌면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개개인의 친밀도나 비슷한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기존에 형성되었던 집단은 나날이 소규모로 분화되고, 한 집단에 소속되었던 구성원 역시 어떤 사고나 건강, 또는 재정상의 이유로 집단에서 탈락하여 어쩔 수 없이 더 낮은 계급의 집단에 편입되는 일은 전에 비해 더 흔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에 따라 상실감과 절망에 빠지는 개인은 나날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어떤 집단에서 탈락한 개인은 전에 속했던 집단의 정체성을 꾸준히 유지하는 까닭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조건에 따라 이합집산이 현실화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구성원 대다수가 심각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김애란 작가는 그와 같은 현상을 정확히 짚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책에 실린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김애란 정도 되면, 즉 한 작가가 자기만이 아니라 문학 자체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면, 그를 통해 문학의 본질을 곧장 말할 수도 있게 된다. 자주 사용되는 개념은 '재현'과 '표현'이다. '재현 represent'은 세계를 더 선명하게 다시 나타나게 하는 일이고, '표현 express'은 주체의 감정을 밖으로 정확히 찍어내는 일이다. 김애란의 재현에 대해서는, 누군가를 사회학자라고 규정할 자격이 사회학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  (p.311 '해설' 중에서)


처서도 지났는데 올여름 더위는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이 무색하게 질병관리청에서는 말라리아 경보와 함께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말라리아는 백신도 없다면서 말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내적 친밀도와 의식적 계층 구분에 따라 세분화되고 폐쇄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것이 비단 최근에 불어닥친 갑작스러운 변화일까마는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그와 같은 현상이 급격히 강화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으로 그친다면 별 문제가 없을 듯 보이지만 집단 상호간의 유대는 단절되고 그에 따라 적대감마저 보이고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작가의 말'이 내게 주었던 의미를 곰곰 되짚으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앞으로도 저는 삶이 무언지 모른 채 삶을, 죽음이 무언지 모른 채 죽음을 그릴 테지만, 때로는 그 '모름'의 렌즈로 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음을 새로 배워나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뒤늦은 깨달음의 형태로 다가오니까요."  (p.316~p.317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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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맑은 날이 지속되면서 집 밖을 나가는 게 사뭇 두려워졌다. 예전 같으면 차를 운전하여 바닷가라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텐데 그럴 마음이 도통 들지 않는 것이다. 이런 날씨에 그늘 하나 없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호불호를 판단하는 수준을 넘어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어쩌다 가로수 그늘이 있는 도심의 인도를 햇빛 속에서 10여 미터만 걸어도 살갗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폭염의 기세를 느끼곤 하는데, 쨍한 햇빛을 정면으로 받는 바닷가 백사장을 걷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런 추세를 반영한 탓인지 장마가 길지 않았던 올해의 여름 날씨에 비해 해수욕장 주변 상가들의 주머니 사정은 그닥 좋지 않았던 듯하다. 폭염과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는데도 많은 해수욕장이 이미 폐장했거나 폐장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인과의 점심 약속이 있었던 나는 점심을 간단하게 먹은 후 근처 카페에 들러 잠시 수다를 떨다가 헤어졌다. 저녁에도 약속이 하나 더 잡혀 있다. 약속 때문에 집에서 뒹굴거릴 시간이 없는 주말이면 뭔가 크게 손해를 본 느낌이 들곤 한다. 젊은 시절에는 일부러라도 주말에 약속을 잡곤 했었는데 이제는 어렵게 잡힌 약속도 취소하고 싶은 심정이 이따금 들곤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난 후의 피로감을 감당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런 사실을 어쩌다 생각할라치면 세월에 따라 잃게 되는 어떤 상실로 인해 슬퍼진다기보다 그 시절엔 어떻게 그리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낯선 당혹과 이질감이 나의 과거로부터 나를 멀리 떼어 놓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을 읽고 있다. 200쪽이 되지 않는 비교적 얇은 소설이지만 시적인 문체의 그 소설은 독자들에게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하기 때문에 완독을 하는 데는 짧지 않은 시간이 소모되곤 한다. 물론 책이 얇은 까닭에 아껴 읽고 싶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우리의 기억이란 것은, 엄청난 파도에서 빠져나와 아직도 그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강아지와도 같아서 그 기억 자체가 아주 이상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확실히 기억할 수 있는 때는 처음으로 별들을 쳐다보게 되었을 때라고 하겠다. 물론 그전에도 별들은 여러 번 나를 내려다보았을 테지만 말이다."  (p.12)


막스 뮐러가 자신의 생애에서 남겼던 단 한 편의 소설인 <독일인의 사랑>을 나는 과거에도 좋아했었고,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여전히 좋아한다. 아파트 화단에 핀 '천사의 나팔(Angel's Trumphet)'을 보았다. 꽃이 핀 지는 꽤나 시일이 지난 듯했다. 배롱나무에 핀 꽃도, 보랏빛의 맥문동 꽃도 언제 피었는지도 모른 채 화단을 장식하고 있다. 바쁘다는 건 내 주변으로부터 나를 고립시키는 행위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점점 소외되거나 낯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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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너스에이드
치넨 미키토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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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펜스 소설을 읽는 묘미는 쫄깃한 긴장감과 진한 감동에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서스펜스 소설의 특성상 그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사회에 내재한 문제점과 구성원의 부조리한 인식을 공론화하는 것 역시 서스펜스 소설이 갖는 장점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모든 사물에는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 독자의 이목을 끌기 위한 지나친 폭력성이나 과한 선정성 등은 서스펜스 소설의 단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순하디 순한 서스펜스 소설이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치넨 미키토가 쓴 <이웃집 너스에이드>는 꽤나 정제된 서스펜스 소설임에 틀림없다. 덕분에 책을 읽는 독자들이 으레 느낄 수 있는 서늘한 긴장감은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지만.


"류자키는 사요코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고마워......" 하고 목소리를 짜냈다. 그 눈에 살짝 눈물이 어린 것처럼 보였다. "이야아, 아름다운 장면이네. 그럼 이쯤에서 슬슬 웃기지도 않는 신파극은 끝내도록 합시다." 비웃듯이 말하면서 세이류인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부하들이 보우건을 들어 겨누는 것을 보고 미오가 눈을 감았을 때 별안간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p.351)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은 세이료 대학 부속병원의 신입 간호조무사인 사쿠라바 미오와 통합외과의 천재적인 의사 류자키 타이가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대척점의 위치에 서 있다. 외과의사였던 유이는 심네스 환자인 언니 사쿠라바 유이를 수술하였지만 유능한 기자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절망감으로 자살하고 말자 미오는 PTSD를 겪으며 의사로서의 어떤 의료 행위도 하지 못하는 등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까닭이다. 의사로서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한 미오는 세이료 대학 부속병원을 대표하는 히가미 교수의 도움으로 신입 간호조무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한편 불우한 가정형편을 딛고 천신만고 끝에 의사가 된 류자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의학적 지식과 끊임없는 훈련과 기술 연마뿐이라는 신념을 지닌 인물이다. 전국에서 우수한 외과의를 모아 설립한 세이료 대학 부속병원의 통합외과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등급인 플레티넘에 위치하였지만 그는 한시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한편 불안해하는 환자의 가족에게 담당의인 류자키가 수술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을 해 달라는 미오의 요구를 거절했던 류자키는 미오와 사사건건 부딪히지만 환자를 살리겠다는 열정과 간절함은 미오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환자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간호조무사 미오의 지적에도 그는 편견 없이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유일한 의사였다. 일정이 잡힌 샴쌍둥이의 분리 수술 일자를 연기해 달라는 미오의 요구를 수용한 것도 류자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미오의 집에 도둑이 들어 집안이 난장판이 되었고, 갈 곳을 잃은 미오에게 자신의 트레이닝 룸을 기꺼이 내준 이도 다름 아닌 류자키였다. 우연히 같은 아파트의 옆집에 세를 들어 살게 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고,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외과의사였던 미오가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현관 앞에 선 미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는......" "내 트레이닝 룸이야. 비는 시간에 여기서 훈련을 거듭하고 있어." 미오는 이 아파트에 입주할 당시 집주인한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201호실과 202호실은 상주하는 사람은 없고 어떤 사람이 창고처럼 쓰고 있다고. 그 '어떤 사람'이 류자키였던 건가. 미오는 빨려 들어가듯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 보니 구석에는 러닝 머신을 비롯해 웨이트 트레이닝용 덤벨과 바벨까지 갖춰져 있었다."  (p.108)


환자를 배하는 견해차로 두 사람은 서로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팀처럼 움직인다. 미오가 PTSD를 극복하고 하루빨리 의사로 복귀하기를 희망하는 류자키와 다른 이가 넘볼 수 없는 천재적인 의료 기술에 더하여 류자키가 환자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미오. 어느 날 미오는 죽은 언니의 남자친구였던 다치바나 형사로부터 언니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고 언니가 운행하던 차량의 내비게이션 이력에서 폭력단의 비밀 아지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곳에서 미오는 다시 류자키와 조우하게 되는데, 그는 거액을 받고 불법 수술을 해주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은 마찬가지라고 담담히 대꾸한다. 그러던 어느 날 류자키가 성장했던 보육원의 한 소녀가 충수염에 걸려 응급 수술을 받기 위해 내원하였는데, 사이비 종교를 믿는 그 소녀의 엄마가 수술을 완강히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목숨이 위태로운 그 소녀를 구하기 위해 미오와 류자키의 작전이 시작되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류자키와 미오, 같이 근무하는 간호조무사들 모두가 위험에 빠져들게 된다. 과연 그들은 미오의 언니가 취재하던 불법 행위의 내막을 밝히고 자신들이 처한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외과의사가 되고 싶었고, 피나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최고의 기술을 습득했어. 그 기술을 갖고 있는데 또다시 가족을 내버려 둔다면 내 인생은 무의미했다는 것이 돼. 그러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가족을 살릴 수 있게 해 줘. 그날 이후의 노력이, 그날 이후의 내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증명할 수 있게 해 줘!"  (p.272~p.273)


현직 내과의사로서 소설가를 병행하고 있는 치넨 미키토는 자신의 전문 지식을 이 소설에 쏟아 부음으로써 사실감을 드높이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나치면 독자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재미를 잃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오겠지만 작가는 그 적정선을 유지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쓴 흔적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독자였던 나는 몇몇 의문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의사였던 미오가 모든 걸 내려놓고 간호조무사라는 직업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점과 젊은 여성인 미오가 언니를 죽인 자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경찰에 알리지도 않은 채 폭력단의 아지트를 염탐할 수 있을까? 하는 점 그리고 언니가 남긴 취재 기록을 찾기 위해 자신의 집을 찾아온 사건 연루자들의 사정이 딱하다고 그들을 그냥 놓아주는 게 가능할까? 내가 소설에 심취했던 탓인지 이런저런 의문이 뭉글뭉글 피어난다. 그럼에도 재밌으면 됐다. 소설은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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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소설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가 더러 있다. 예컨대 '정대건의 소설 <급류>에 등장하는 도담과 해솔은 나중에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살았을까?'라든가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길상과 서희는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과 결별했을까?' 하는 궁금증 등 우리가 읽은 소설을 이따금 되짚어 생각할라치면 몇몇 의문이나 궁금증이 늘 한 몸처럼 따라붙곤 한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나는 '날마다 머리에 꽃을 꽂는 여자' 김유진의 미래를 궁금해하곤 했었다. 30대 후반이었고, 남편과 이혼하였던 그녀는 그 당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었다.


"부끄러움 없이 맨몸을 보일 수 있는 상대는 사랑하는 단 한 사람뿐이다. 연인 사이의 누드란 서로가 떳떳할 때, 아무것도 감출 것 없이 순결할 때만 보일 수 있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상대가 내 모든 허물까지도 받아들이고 사랑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옷을 벗어 보이는 것은 '내가 널 사랑한다'라는 소리 없는 진실한 고백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혼한 여자가 불행할 거라고 생각한다. 외로울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남자들은 자기들이 이혼녀의 밤을 위로해 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짝이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행복한 게 아닌 것처럼 이혼한 여자도 그다지 불쌍하지 않다. 잠든 남편 옆에 누운 아내의 밤이 자주 외로운 것만큼 이혼녀의 밤이 쓸쓸하지도 않다. 행복이나 고통의 빛깔이 다를 뿐 삶의 무게를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를 한다면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이혼한 사람의 기울기는 어느 정도 수평을 이룰 것이다."


정확히 2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필명이었던 '김유진'을 버리고 '김규나'라는 본명을 되찾았다. 그리고 본명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은 듯하다. '날마다 머리에 꽃을 꽂는 여자'라는 그녀의 정체성 말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축복해 마지않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하여 그녀는 '날마다 머리에 꽃을 꽂는 여자'로서의 정체성에 의거하여 '노벨 가치의 추락, 문학 위선의 증명, 그리고 역사 왜곡의 정당화'라고 씀으로써 자신이 '날마다 머리에 꽃을 꽂는 여자'임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렇게 커밍아웃을 한 작가는 요즘도 글을 쓰고 있다. 신문 지면과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을 간략하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쓰라린 실패와 좌절을 통해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성장은 오직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질 때만 가능하다. 때로 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행운을 얻기도 하지만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감당해야 할 몫이 있을 뿐, 인생 어디에도 공짜는 없다. 누가 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가? 만약 공짜로 무언가를 주겠다거나 조건 없이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이가 있다면 그 대가로 무엇을 내놓으라 두려워할 것인가, 두려워해야 한다."


"지성이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듯, 오십팔은 명단도 공개할 수 없는 수많은 유공자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무장반란을 우리 젊은 군인들이 목숨 바쳐 진압, 국가와 국민을 지킨 사건이다. 당시는 광주사태라고 불렸는데 언제부턴가 만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의 성역이 되어버렸다. 제주사삼 역시 대한민국의 탄생을 막으려고 남로당 잔당 세력이 일으킨 무장반란이고 우리 경찰이 진압한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진압 과정에서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애초에 반란이 없었다면 그 눈물 역시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무엇이 먼저인가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진압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도 없었다."


우리는 이따금 나와 상관도 없는 누군가의 미래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추억처럼 그 궁금증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 마주치는 누군가는 과거의 그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세월의 경과는 모든 이를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매번 동일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을 쓰는 듯하지만 그녀의 소설이 인기 있는 까닭은 독자도 세월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과거의 등장인물의 다음 삶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세월이 탄생시킨 새로운 인물에게 새로운 책의 제목과 함께 새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과거에 쓴 어떤 인물의 미래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탈색시킨 새로운 인물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과 세월의 흐름에 동승한 새로운 인물의 탄생. 우리는 가끔 누군가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본능처럼,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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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국경 섬을 걷다 - 당산나무에서 둘레길까지, 한국 섬 인문 기행
강제윤 지음 / 어른의시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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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꽤나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법정스님이 타계한 후 한동안 스님의 추천 도서만 읽었던 나는 어느 날 도서관에서 <숨어 사는 즐거움>을 검색하게 되었고, 강제윤 작가가 쓴 <숨어 사는 즐거움>을 빌려 읽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스님이 추천했던 책은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이 쓴 <숨어 사는 즐거움>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헛다리를 짚은 셈인데 허균의 책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읽었던 강제윤의 <숨어 사는 즐거움>이 허균의 책을 읽지 못했던 나로서는 '꿩 대신 닭'이었는지 '닭 대신 꿩'이 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1988년 시인으로 등단하였던 작가는 고향인 보길도에 정착하여 '보길도 시인'으로 살다가 2005년 보길도를 떠나 청도 한옥학교 한옥 목수 과정을 졸업한 뒤 2006년 가을 완도군 덕우도를 시작으로 10년 동안 한국의 유인도 500여 개를 거어서 순례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자동차와 손전화를 갖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 3무의 삶을 살고 있다는 작가는 유랑자라기보다 구도자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시인이자 섬 환경운동가로서 그리고 사단법인 섬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한 작가의 신작 <바다의 국경 섬을 걷다>를 읽는 기분은 마치 오래전에 알던 친구를 다시 만나 반가운 술잔을 기울이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랬다.


"무인도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싶겠지만 무척 중요하다. 2014년 중국이 민간자본을 앞세우 우리의 무인도 하나를 매입하려 했다. 태안군 격렬비열도는 동.서.북 3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중국과 가장 가까운 무인도인 서격렬비열도가 매물로 나왔었다. 우리나라 사람도 잘 모르는 서해의 외딴섬이 매물로 나온 사실을 중국이 어찌 알았을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다행히 가격 협상이 결렬되어 서격렬비열도는 팔리지 않았고,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정부가 서격렬비열도를 포함한 8개의 무인도를 '외국인 토지거래 허가구역'으로 지정하며 한숨을 돌렸다."  (p.9~p.10 '여는 글' 중에서)


대학에서 스킨스쿠버 동아리를 했던 덕분에 나는 비교적 많은 섬을 다녔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바다와 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은 편이다. 섬에서 나고 자란 작가에 비해서는 견줄 바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작가는 고향인 보길도를 떠나 20여 년간 섬을 떠돌면서 섬 이야기를 복원하였고, 그 결과물로 이 책을 출간하였다. 8편의 나무 이야기와 7편의 길 이야기, 9편의 사람 이야기와 7편의 역사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저자는 '섬의 환대와 돌봄'으로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섬에 대한 저자의 사랑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한 섬사람들에게 있어 그들만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작가에게는 섬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경계를 풀고 그들의 속내를 한껏 풀어놓았다는 건 섬을 사랑하는 작가의 진심을 그들이 알아챘다는 것이다.


"내수전일출전망대에 올랐다가 되돌아 내려오면 석포로 가는 숲길이 이어진다. 또 한동안 길을 가다 보면 느닷없이 쉼터가 나타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정매화골이다. 옛날 개척민 중 정매화라는 이가 살던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매화가 살다 간 뒤 이곳은 1962년 9월부터 이효영 씨 부부가 삼 남매와 살았다. 이씨 일가는 1981년까지 19년을 이 외딴 골짜기에서 살았는데 이 씨 부부의 이름이 남은 것은 그들이 이곳에 살면서 폭설, 폭우에 조난당하거나 굶주림에 지친 사람을 300여 명이나 구조한 미담이 있기 때문이다."  (p.107)


책의 4부 '섬에는 역사가 있다'에 실린 내용은 어쩌면 이 책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뭍과의 교통이 불편했던 섬에는 섬사람들만의 역사가 유지되었고, 그들만의 문화와 관습이 존재했을 테니까 말이다. 한 나라의 국민이지만 나라의 역사에 온전히 편입되지 않았던 그들만의 역사는 그래서 더 애틋하다. 과거 쾌속선이 없던 시절에 울릉도는 정말 고립된 섬이었다. 대학 시절 동아리 선배들과 함께 여객선을 타고 울릉도를 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뱃멀미에 시달리며 12시간을 가야 하는 울릉도 여행은 그야말로 고난의 뱃길이었다. 지금은 쾌속선은 3시간 내외, 일반페리는 6~7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으니 조금 과장하면 육지나 진배없는 곳이 된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교통이 발달해도 섬은 섬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곳의 역사와 문화가 남아 있는 한 섬은 섬으로서의 자생적인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찾는 강화도만 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발견하곤 한다.


"강화도는 '불멸의 섬'이다. 세계 최강 몽골제국의 군대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제국, 미국의 침략에도 끝끝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섬이다. 하지만 강화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안아야 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왕성이 옮겨 오면서 왕궁과 성벽 건설 등의 노역에 시달렸고 조선시대 말에는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침략 전쟁으로 전란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p.309)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이제 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섬나라에 불과하다. 대륙과의 연결이 끊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류가 활발하다는 건 문화와 문화가 뒤섞이고, 역사와 역사가 뒤섞이면서 종래에는 사람마저 그 정체성을 잃고 희미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섬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고유한 문화, 고유한 역사가 대를 이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흔들릴 때 또는 유구한 역사의 숨결마저 미약해져 젖내 나는 어머니의 품이 몹시도 그리울 때 우리는 뭍을 떠나 섬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는 고향의 온기가, 구수한 고향의 냄새가 언제든 우리를 반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잊고 지내던 우리 자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강제윤 작가의 <바다의 국경 섬을 걷다>가 반가운 이유도 그런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지금은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른 것도... 언젠가 섬이 그리운 날엔 나는 또다시 강제윤의 <바다의 국경 섬을 걷다>를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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