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소설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가 더러 있다. 예컨대 '정대건의 소설 <급류>에 등장하는 도담과 해솔은 나중에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살았을까?'라든가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길상과 서희는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과 결별했을까?' 하는 궁금증 등 우리가 읽은 소설을 이따금 되짚어 생각할라치면 몇몇 의문이나 궁금증이 늘 한 몸처럼 따라붙곤 한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나는 '날마다 머리에 꽃을 꽂는 여자' 김유진의 미래를 궁금해하곤 했었다. 30대 후반이었고, 남편과 이혼하였던 그녀는 그 당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었다.


"부끄러움 없이 맨몸을 보일 수 있는 상대는 사랑하는 단 한 사람뿐이다. 연인 사이의 누드란 서로가 떳떳할 때, 아무것도 감출 것 없이 순결할 때만 보일 수 있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상대가 내 모든 허물까지도 받아들이고 사랑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옷을 벗어 보이는 것은 '내가 널 사랑한다'라는 소리 없는 진실한 고백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혼한 여자가 불행할 거라고 생각한다. 외로울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남자들은 자기들이 이혼녀의 밤을 위로해 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짝이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행복한 게 아닌 것처럼 이혼한 여자도 그다지 불쌍하지 않다. 잠든 남편 옆에 누운 아내의 밤이 자주 외로운 것만큼 이혼녀의 밤이 쓸쓸하지도 않다. 행복이나 고통의 빛깔이 다를 뿐 삶의 무게를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를 한다면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이혼한 사람의 기울기는 어느 정도 수평을 이룰 것이다."


정확히 2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필명이었던 '김유진'을 버리고 '김규나'라는 본명을 되찾았다. 그리고 본명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은 듯하다. '날마다 머리에 꽃을 꽂는 여자'라는 그녀의 정체성 말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축복해 마지않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하여 그녀는 '날마다 머리에 꽃을 꽂는 여자'로서의 정체성에 의거하여 '노벨 가치의 추락, 문학 위선의 증명, 그리고 역사 왜곡의 정당화'라고 씀으로써 자신이 '날마다 머리에 꽃을 꽂는 여자'임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렇게 커밍아웃을 한 작가는 요즘도 글을 쓰고 있다. 신문 지면과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을 간략하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쓰라린 실패와 좌절을 통해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성장은 오직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질 때만 가능하다. 때로 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행운을 얻기도 하지만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감당해야 할 몫이 있을 뿐, 인생 어디에도 공짜는 없다. 누가 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가? 만약 공짜로 무언가를 주겠다거나 조건 없이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이가 있다면 그 대가로 무엇을 내놓으라 두려워할 것인가, 두려워해야 한다."


"지성이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듯, 오십팔은 명단도 공개할 수 없는 수많은 유공자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무장반란을 우리 젊은 군인들이 목숨 바쳐 진압, 국가와 국민을 지킨 사건이다. 당시는 광주사태라고 불렸는데 언제부턴가 만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의 성역이 되어버렸다. 제주사삼 역시 대한민국의 탄생을 막으려고 남로당 잔당 세력이 일으킨 무장반란이고 우리 경찰이 진압한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진압 과정에서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애초에 반란이 없었다면 그 눈물 역시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무엇이 먼저인가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진압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도 없었다."


우리는 이따금 나와 상관도 없는 누군가의 미래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추억처럼 그 궁금증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 마주치는 누군가는 과거의 그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세월의 경과는 모든 이를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매번 동일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을 쓰는 듯하지만 그녀의 소설이 인기 있는 까닭은 독자도 세월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과거의 등장인물의 다음 삶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세월이 탄생시킨 새로운 인물에게 새로운 책의 제목과 함께 새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과거에 쓴 어떤 인물의 미래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탈색시킨 새로운 인물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과 세월의 흐름에 동승한 새로운 인물의 탄생. 우리는 가끔 누군가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본능처럼,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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