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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다시 시작 - 잠깐의 멈춤,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ㅣ Begin Again Series 1
정소령 지음 / 그래더북 / 2025년 5월
평점 :
글쓰기를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삶에 글쓰기를 편입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튜브 영상을 볼 시간은 있어도 편한 시간에 글을 쓰고자 노트를 펼친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익숙함에서 오는 차이이기도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글쓰기를 해본 적 없는 사람에게 글쓰기란 어느 날 오후, 그림 그리기에 젬병인 내가 '그림이나 그려볼까' 하면서 스케치북을 펼치는 것만큼이나 막막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써야 할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어떻게 끝을 맺을지 등 머리를 어지럽히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어렵게 만드는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글쓰기의 효과 또는 글쓰기의 혜택일 것이다. 말하자면 글쓰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이익이나 혜택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그러한 혜택이 들인 노력이나 시간에 비해 월등히 크다는 확신만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처럼 글쓰기를 주저하거나 회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예컨대 글쓰기로 인하여 삶의 활력을 얻게 되었다거나 전에 비해 여유 시간을 더욱 건전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혜택에서부터 자신이 쓴 책 덕분에 큰돈을 벌게 되는 것과 같은 확실한 효과가 눈으로 증명되지 않는 한 마냥 주저하던 글쓰기를 무작정 시도할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란 대체로 진입장벽이 제법 높은 분야이기도 하다.
"글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치유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나누는 과정이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매끈한 이야기만 글이 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울퉁불퉁한, 지극히 현실적인 희로애락이 내 글의 존재 가치가 된다." (p.68)
우리의 뇌는 사실 추상적이고 현실을 과하게 부풀리는 경향이 있어서 하나하나 글로 써보지 않으면 조금 힘겨워 보이는 대부분의 일들을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섣불리 예단하게 된다. 불안이나 슬픔의 원인도 글로 써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내면과 직접 대면하지 않으면 치유나 위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정소령의 에세이 <쓰기로 다시 시작>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글쓰기의 동인(動因)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글쓰기 관련 서적이 차고도 넘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거론하는 이유는 글쓰기는 단순히 그 효과만 강조해서는 글쓰기를 실천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글쓰기 관련 서적은 많지만 정작 글쓰기의 장으로 많은 이들을 불러들일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는 뜻이다.
"책이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겠지. 그때는 이 책에서 말한 것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왜 달라졌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책을 쓸 당시와 지금 사이에 많은 시간이 지났고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해야지. 성장하는 중이라고, 나는 생명 없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서 계속 달라지고 있다고. 알 수 없는 미래의 나를 두려워하느라 지금을 쓰지 않는 겁쟁이가 되지는 않기로 했다. 지금도 그 마음을 간직한 채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한다." (p.176~177)
'마케터로 살다가 엄마가 되면서 일을 그만뒀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정소령 작가는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자신을 이끈 순간들에 대해 꾸미지 않고 비교적 소박하게 그리고 얼버무리지 않고 또박또박 밝히고 있다. 자신 명의의 수입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학창 시절의 취미와도 같았던 글쓰기에 대해 생각했다는 작가. 책의 목차만 보아도 작가가 책을 읽는 독자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 글은 일상의 기록, 책은 인생의 단편 "나를 글에 담아보기로 하다.", 2. 나만의 정의, 표현, 생각 정리하기 "우리는 모두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다.", 3. 처음의 다짐을 놓지 않는 법 "누구나 어떻게 쓸지 방향을 잃을 때가 있다.", 4. 결국, 글과 책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 "함께 쓰고 읽고 느끼면 된다."
"이 책이 당신에게 닿아 글쓰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담아 써 내려간 책이니 말이다. 나의 쓰는 날을 탈탈 털어 담았다. 처음부터 잘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처음이 없으면 더 쉽게, 혹은 더 잘 쓰게 될 내일도 없다. 그러니 이 책을 덮으면 몇 문장이라도 쓰기 시작해보자. 글쓰기의 시작을 시작할 당신을 응원한다." (p.227 '에필로그' 중에서)
나 역시 돈도 되지 않는 블로그를 십 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물론 돈이 목적이었다면 진즉에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는 영리를 목적으로 글을 쓰지 않는 까닭에 나의 생각이나 하고픈 말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 중 그 누구에게도 블로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가까운 사람이 나의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써야 할 말과 써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는, 이른바 자체검열의 과정이 이어지고, 그렇게 되면 글쓰기의 재미나 자유로움을 쉽게 잃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소통하며 강산이 변하는 세월을 겪어왔던 것이다. 정소령 작가의 <쓰기로 다시 시작>을 읽는 내내 길다면 길었던 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