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울타리는 넝쿨장미로 가득합니다. '붉음'이라는 두 글자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마치 도장을 찍듯 꾹꾹 눌러 담는 꽃의 자태에 나는 새삼 감탄하곤 합니다. 만만치 않은 꽃의 무게를 감당하는 장미 넝쿨은 그저 그늘로서만 존재합니다.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듯 푸르름만 유지한 채 선명한 보색대비를 위해 전면에는 언제나 꽃의 '붉음'이 드러나도록 애쓸 뿐입니다. 여름에 피는 까닭에, 여름을 대표하는 까닭에 넝쿨장미는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을 닮았습니다. 꽃을 꺾어 가까이에 두고 감상하고픈 마음이 나도 모르게 들었던 건 어쩌면 넝쿨장미의 '붉음'이 나를 유혹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붉음'이란 모름지기 중독성이 강한 색깔이라고 믿었던 나의 오래전 생각도 어쩌면 그런 까닭에서 연유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선이 코앞입니다. 그럼에도 선거 분위기는 그저 차분하기만 합니다. 국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도록 지시했던 내란 우두머리는 자신의 잘못을 망각한 채, 아니 어쩌면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만큼 미친 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꾸벅꾸벅 졸거나 낄낄대면서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가 속했던 정당의 인물들 역시 자신들의 과오를 망각한 채 그를 두둔하거나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읍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탈을 썼다면 어떻게 그리 할 수 있을까요. 자신들의 죄를 고하고 국민들께 용서를 비는 게 마땅한 도리이거늘 자격도 없는 후보를 내세워 지지를 호소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며, 반성의 의미로 후보를 내지 않는 게 마땅한 도리였을 것입니다.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조금 읽었습니다. 진도를 쭉쭉 낼 수 없었던 건 슬픔의 돌부리가 나의 발길을 툭툭 걸어 자주 비틀거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흔들렸고, 울먹울먹 억지로 울음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책의 표지를 볼 때마다 나는 속이 까끄름하고 마음이 심란하기만 합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허방을 짚는 것처럼 덧없고 허망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전이 판정을 받고 나서 우리는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었고, 우리는 그런 아슬아슬한 나날을 '죽음 이행기'라고 불렀다. 죽음 이행기에서는 타인의 눈에 비상식적으로 비칠 수 있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엄마의 자살 방법에 대해 농담처럼 이야기를 나눴듯이." (p.44)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그는 유죄시 무기징역 또는 사형에 처해진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그럴 테지만 이 재판이 제발 빠르게 진행되어 그의 꼴을 우리 사회에서 더는 볼 수 없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토요일 오후, 비가 한 차례 내렸고, 날씨는 제법 선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