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따러 가자 - 고립과 불안을 견디게 할 지혜의 말
정은귀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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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비가 잠깐 내렸다. 얼마만의 비인지... 과거 노무현 정부 시기에는 가뭄이 들어도, 홍수가 나도 모두 대통령의 잘못인 양 전국의 모든 언론이 대통령 탓을 하기에 바빴었다. 대한민국에서 정부의 잘못을 제대로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그야말로 언론사다운 건전한 언론사가 단 한 군데라도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언론 소비자 중 한 사람인 나로서도 너무 심하다는 인식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언론사들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봄 가뭄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와중에도 이게 모두 대통령의 탓이라거나, 밀양에 번진 대형 산불로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대통령은 한가하게 브라질과의 축구 국가대표 경기를 관람하고 있느냐고 지적하는 언론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언론사들도, 경찰도, 심지어 검찰도 알아서 길 거라는 예언은 현재의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부터 용하다는 어느 여인의 입을 통해 기자에게 전달된 바 있었다. 과연 그 여인은 무속인들과 그리 어울려 다니더니 웬만한 무속인을 능가하는 예지와 신통력(?)을 지닌 게 아닌가!

 

"좋은 날도, 슬픈 날도 다 지나갑니다. 기도와 웃음은 정다운 주술과 같습니다. 괴로워도 슬퍼도, 외롭고 서러워도, 두렵고 막막해도, 불안해도, 눈물을 거두고 웃습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오늘 우리를 기다리는 하루는 다시 희미한 웃음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안에서 지펴낼 수 있는 온기는 바로 웃음입니다. 전환점이 되는 달에 멀리서 미소 담은 편지를 띄웁니다."  (p.128)

 

한국외대 영미문학ㆍ문화학과 정은귀 교수의 산문집 『딸기 따러 가자』가 출간되었다. 코로나19를 통과하던 시기, 묵상하듯 인디언의 노래를 찾아 읽으며 고립과 불안을 달랠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열두 달과 지금 우리가 사는 1년 열두 달의 주기를 비교하며 우리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계절 감각과 생활 감각을 일깨운다. 북아메리카에 흩어져 살던 인디언들은 비록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서로 달랐지만 자신이 깃들어 사는 터를 존중했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식으로 생태적 가치를 지켜왔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면면을 지녔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투느라 전쟁마저 불사하는 요즘, 인디언들의 지혜는 현대인의 절망을 극복하는 현명한 처방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환경에 맞추어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던 아메리카 인디언은 힘든 환경이나 사건 사고를 두고 투덜거리지 않았습니다. 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순간순간 느끼려고 했지요. 세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그대로 우리에게 삶을 돌려줍니다. 이 세상이, 삶이 가치 없다 여기면 모든 일이 쓸모없이 여겨질 것이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이 세상이, 삶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 생각한다면, 주변의 작은 것들도 아름답게 느껴지겠지요."  (p.144)

 

퇴임한 전직 대통령의 사저 근처에서 주야장천 욕설을 퍼붓고, 확성기를 틀고, 근거도 없는 말들을 떠들어대는 인간들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 보게 된다. 자신들과 이념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영상을 제작하고 이를 통해 약간의 돈을 갈취하는 게 그들의 목적이겠지만, 아무리 돈이 중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인간성마저 팔아 팽개친다는 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렇게 생명을 부지한다는 게 무슨 소용이며, 몇몇 지지자들로부터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게 그렇게도 기분 좋아할 일이란 말인가.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여러 사람들의 건강과 평화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을 과연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서로가 소로의 다른 손, 다른 머리가 될 것. 함께 나눌 것. 성탄절에 세상에 오신 분이 가르치는 사랑도 그러한 것이겠지요. 강해 보이는 이에게 굴종으로 엎디지 말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이의 곁에 머물 것. 혐오의 말들이 난무하는 메마르고 거친 시절에, 구원의 역사를 새로 쓰신 분의 탄생을 기리며, 조금 차분한 성탄 전야를 보냅니다. 사랑으로 오신 분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하며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려 합니다. '구원'이 비현실적인 단어가 된 오늘날,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작고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p.223)

 

면허 취소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만취 상태에서 운전을 한 경력이 있는 자를 교육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주취범죄 처벌 현실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대통령. 차별금지법의 통과는 반대하면서 차별은 반대하는 이상한 논리. 선제타격 운운하면서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하는 정부.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란 늘 따라붙게 마련이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잘 드러나는 게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닌가. 최근 미 백악관의 초청에 의해 K팝 스타인 방탄소년단이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면담한 적이 있다. '반(反) 아시안 증오범죄 대응 방안'에 대한 의견 교환의 차원이었지만 낮은 지지율의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 제고 목적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명분만은 누구나 수긍할 만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정부의 지도자들은 얼마나 수준이 낮은가. 모호크 인디언의 어느 할머니는 가족 모두가 길을 잃고 낙심하고 있을 때, "딸기 따러 가자."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들에게 낙심과 우울과 절망을 떨치고 일어서도록 하는 원동력은 바로 딸기일 수도 있겠다. 오늘 당신의 '딸기'는 과연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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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은 당신의 '영혼'이 아니라 당신의 '깊은 사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오래전 기억들을 뒤져보면 그의 '얼굴'보다는 그의 '태도'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언젠가 했던 당신의 '깊은 사유'는 허공에 쌓인 시간의 지층 속에 오롯이 남아 긴 세월 동안 화석화 과정을 거칠 것입니다. 당신의 '깊은 사유'가 종이에 기록되든 그렇지 않든 당신이 없는 세상의 먼 훗날에 태어난 누군가가 얼굴도 알지 못하는 당신의 '깊은 사유'를 마치 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손길처럼 아주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붓질을 통해 발견해내고, 인류 영혼의 발전에 기여한 당신의 '깊은 사유'를 보물인 양 기릴 것입니다.


행복한 기억들은 순간인 양 흩어질 뿐, 당신을 '깊은 사유'로 이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살았던 당신의 삶이 '깊은 사유'로 인해 비로소 빛나는 삶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세나 전생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꾸며낸 허구라 할지라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후세의 누군가가 시간의 지층 속에서 화석으로 변한 당신의 '깊은 사유'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건 단 1%의 가능성일지라도 과학이자 부인할 수 없는 논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말초적인 기쁨이나 가벼운 행복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극히 가볍기만 한 인간이 자발적인 고통을 통해 끊임없는 '깊은 사유'의 길을 걷는다는 건 있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시간만큼은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깊은 사유'의 길로 스스로를 이끌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만들어 놓은 '깊은 사유'의 유물들이 시간의 지층 속에서 화석처럼 존재하는 한 인류는 풍요로운 영혼을 간직한 채 자신의 삶을 유익한 시간으로 채워 나갈 것입니다.


나는 지금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 농장>을 읽고 있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존스 씨를 몰아낸 나폴레옹과 스노우볼의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자, 동무들, 지금과 같은 우리의 삶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똑바로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단하며, 또 아주 짧게 지나가 버립니다. 이 세상에 툭 던져지면, 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먹이만 받아먹으며, 숨이 붙어 있는 한은 젖 먹던 마지막 힘까지 다 짜내어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무 쓸모가 없게 되면, 정말 끔찍하도록 잔인하게 도살을 당합니다. 영국 땅의 어떤 동물도 한 살이 넘으면 행복과 여가란 꿈도 못 꾸는 일입니다. 이들에게 자유란 없습니다. 우리 동물들의 삶은 이처럼 비참하게 죽도록 일만 하는 것입니다." (p.29 동물농장(소담출판사) 중에서)

유난히 자유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만든 검찰 공화국의 대한민국은 이미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조지 오웰은 돼지들이 장악한 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그렇게 상상했을지도... 현충일까지 이어지는 짧은 연휴의 첫날,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동물농장>을 현실과 견주면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시간의 지층에 남은 조지 오웰의 화석을 마치 고고학자라도 된 양 조심스레 더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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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외 지음 / 유선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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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재미있는 일도 취미가 아닌 직업이 되는 순간 재미는 완전히 사라지거나 반감되게 마련이다. 심지어 웬만한 아이들이라면 쉽게 빠져드는 인터넷 게임도 취미가 아닌 업으로 변하는 순간 흥미를 잃게 된다고 한다. 그도 당연한 것이 수십, 수백억 원의 연봉을 받는 프로 선수가 자신의 책임을 망각한 채 설렁설렁 취미인 양 임한다면 그를 고용한 구단에서도 참으로 난감한 지경에 처하게 됨은 물론 자신 역시 발전된 기량을 통해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애초에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글을 쓰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아마추어 작가일 때는 다른 무엇보다도 좋아하던 글쓰기가 시간과 돈에 의해 제한되는 업으로 변하는 순간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원고 요청을 제법 잘 거절하지만 여전히, 나를 원한다는 이유로 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글이 있다. 또는 일이기 때문에 쓴다. 내가 쓰고 싶다는 이유로 시작하는 글을 내가 원한 대로 지키기는 늘 어렵다. 내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p.92 '이다혜' 중에서)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는 어쩌다 보니 글쓰기가 업이 된 9명의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가벼운 책이다. 전업 작가가 된다는 건 어쩌면 대단한 특권이자 적지 않은 노력의 결과물임은 분명할 터, 작가 지망생들이 보기에는 '배부른 소리'로 읽힐 수도 있는 쓰고 싶지 않은 마음들은 대체로 마감을 앞둔 극도의 긴장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아마추어 작가일 때는 쓰고 싶은 순간에 자신이 쓰고 싶은 주제로 원하는 분량만큼 쓸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지만 돈을 받고 쓰는 글에는 그와 같은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글의 주제나 분량도, 마감 시한도 전적으로 의뢰자의 사정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토록 좋아하던 글쓰기 작업도 '의무'라는 무게에 눌려 압사 직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진 나의 머릿속에서 '자, 이제 준비기 되었으니 글을 써볼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더 할 일이 없는 건지, 정말 지금 완벽하게 글을 쓰기 위한 상태가 된 것이 맞는 건지 지뵤하게 묻고 있다는 걸. 그리하여 마침내 생각도 못했던 다른 할 일을 '녀석'이 기어이 찾아내는 걸 보면서 나는 알았다. 그동안 나는 쓰기 위한 준비를 해왔던 게 아니라 오로지 그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니기만 했었다는 걸. 그게 두려움이나 권태든 다른 무엇 때문이든 간에 나는 이 일이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또 하기 싫어졌다는 걸."  (p.70 '이석원' 중에서)


프로 작가가 된 후 마감 시한에 맞춰 글을 쓰기 위한 각자의 노력이나 일상 습관은 열이면 열 서로 다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가 되기 위해 쏟아부었던 열정이나 노력은 글쓰기에 대한 각자의 애정만큼이나 서로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여타의 취미와는 달리 글쓰기는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결코 좋아질 수 없는 취미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분야의 책 읽기가 선행돼야 하며, 산책이나 명상 등 생각의 파편들을 한데 모으는 작업을 수시로 반복해야 하며,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한 결과물을 다듬고 고치는 일이 지루하다거나 지겹지 않아야 한다. 그와 같은 반복을 통해 더딘 성장을 이룰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만이 글쓰기를 취미로 갖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에 투자된 시간과 노력이 항상 기꺼워야 하며, 아깝다거나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아야 한다.


"나는 청결하고 질서 정연한 세계 속에서 평화와 안정을 느끼지만, 동시에 저항하고 싶고 그 세계를 파괴해 버리고 싶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의 가치를 중요시하지만, 내 곁에 항상 올바른 사람들만 두고 싶진 않다. 나는 엘리트주의를 혐오하는 동시에 몰개성적인 다수를 혐오한다. 금욕적인 청교도 정신을 거부하면서 카톨릭 사제를 매력적으로 여긴다. 나는 무신론자이자 기독교인이고, 남성이자 페미니스트다. 나는 발언하고 싶지만 입을 닫고 싶다. 쓰고 싶지만 쓰고 싶지 않다."  (p.241 '임대형' 중에서)


오늘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13주기 추도식이 있었던 날. 검은 상복 속에 숨어든 많은 말들이 세상의 허무 속으로 흩어진다. 대기는 알 수 없는 미래처럼 탁했고, 흘러간 세월만큼 옅어진 슬픔이 잔기침과 함께 툭툭 불거진다. 아무도 막지 못했던 십삼 년 전 오늘의 미래가 세월을 따라 켜켜이 슬픔의 과거가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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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담장을 따라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붉은 너울과도 같은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우리네 삶에서 필요한 것은 생존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삶에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이 우리 곁에 넘치도록 가득하다는 걸 시시각각 깨닫게 된다. 넝쿨장미 몇 송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5월을 장식하는 넝쿨장미쯤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우리네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신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준비하셨구나, 생각할라치면 풀꽃 하나 떠가는 구름 한 장에도 눈길이 가게 되는 것이다. 우주의 작은 티끌에 불과한 각각의 인간들을 위하여...


사실 우리 선조들은 자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고, 우주에 담긴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았던 민족이다. 살아서 집을 지을 때도, 죽어서 묏자리를 잡을 때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때와 장소를 가린다는 것은 자연에 담긴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와 같은 순수한 의지로 반만년의 장구한 역사를 이어 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푸른 희망이다. 그런데 그 역사의 현장에서 술과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겠다는 작자들이 있다.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음식 반입을 철저히 금하는 박물관에서 만찬을 열겠단다. 무식도 그런 무식이 없다. 역사가 일천한 미국 대통령이야 유물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역사적 가치와 보존을 위한 지침에도 취약하다지만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식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위안부 피해 보상금이 밀린 화대'라느니 '러브샷을 하려면 옷을 벗고 오라'는 등 역사의식도 없고 윤리 의식도 없는 작자들이 정부 요직에 앉아 국가를 운영하고 있으니 나라의 꼴이 참으로 우습게 되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는 오직 개인의 욕망과 권력의 실현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이자 이뤄야 할 목표인 듯 보인다. 그런 자들에게 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선조들의 순수한 영혼이 깃든 여러 유물을 병풍 삼아 술잔이나 기울이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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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5-2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은 그렇다치고 안주가 문제군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안주가 필요했을까,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꼼쥐 2022-05-24 15:46   좋아요 0 | URL
아무리 안주가 필요했어도 그렇지 선조들의 얼이 서린 유물을 안주로 삼을 생가글 하다니...ㅜㅜ 꼴통들이 한둘이 아닌 모양입니다.
 
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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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엄마를 잃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던 건 지난해였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여동생까지 슬하에 3남 3녀의 많은 자식을 두었건만 병든 노모를 거두고 돌보겠다는 자식은 아무도 없었다. 팍팍한 현실이 만들어 준 이런저런 변명과 구실들이 노모를 모시지 못하는 주된 이유였지만, 요양원이라는 더없이 편리한 기관이 자식들의 불효를 모두 덮어주는 까닭에 지근거리에서 노모를 모시지 않고도 어떤 자책이나 회의감 없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사셨던 엄마가 재작년 어느 날 목욕탕에서 넘어져 약간의 뇌출혈 증상을 보였던 게 요양원 생활의 시작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감옥과도 같았던 요양원에서 2년 남짓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코로나 시국에 면회도 되지 않는 그 답답했던 시간을 엄마는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면회가 금지된 한 달 사이에, 대명의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고 주치의가 전했다. 그는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쯤 덮고 일남과 두어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대명의 임종 상황을 설명했다. 한 달 만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지난달 면회 때만 해도 아주 좋아 보이셨다고, 일남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흔둘, 언제 어느 순간에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연세였다."  (p.254 '특별재난지역' 중에서)


김유담 작가의 소설집 <돌보는 마음>을 읽다가 기어코 흐르는 눈물을 찍어내고야 말았다. 표제작인 '돌보는 마음'을 포함하여 열 편의 단편소설이 담긴 이 소설집은 돌봄을 근간으로 한 여성의 서사를 보여준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감정적 파고를 직접 겪어 보았고, 이를 통해 '돌봄 노동'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작가는 자신이 쓴 열 편의 짧은 소설을 매개로 독자와 소통하고 있다. '돌봄'을 소재로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 이를테면 청소년과 노년, 전업주부와 감정 노동 종사자 등 각계각층의 시선으로 돌봄의 현실과 마음을 펼쳐 보인다.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그녀는 아기를 독립적인 자아를 지닌 타인으로 인정하며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임신 기간 내내 태아는 자신과 개별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그녀의 의지나 생활 패턴과는 무관하게 태동하고, 무관하게 반응하는 아기의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태아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타자를 품고 있다는 이물감이 앞섰다. 하지만 친구가 툭 던지듯 말한 인생의 성패라는 단어가 가슴 한구석에 날카롭게 박히는 순간, 자신과 아기가 서로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p.139 조리원 천국' 중에서)


<돌보는 마음>에는 김유정작가상을 수상한 『안(安)』도 수록되어 있다.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큰엄마와 여성의 능력을 강조하는 엄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란 '나'의 고민을 통해 '집 안 여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소설이다.  그 외에도 복직을 앞둔 워킹맘 '미연'의 베이비시터에 관한 고민을 다룬 소설 '돌보는 마음'과 젖 잘 나오는 엄마가 되기 위해 몰두하는 산후 조리원의 풍경을 담은 '조리원 천국', 코로나로 아버지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게 된 가족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특별재난지역', 노년에 졸혼을 결심한 ‘희숙’과 노년에 결혼을 결심한 ‘명주’를 통해 결혼과 여성의 삶을 새로운 각도로 조망하는 '태풍주의보'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각계각층의 여성들을 통해 돌봄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나는 결혼한 지 2년 만에 공과 헤어졌고, 공의 집에서 나왔다. 처음 이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편하게 살면서 호강에 겨운 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고, 이혼 과정에서는 혼자만 편하려고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 여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p.72~p.73 '안(安)' 중에서)


'평균 수명의 연장이 우리의 삶에 과연 득일까, 실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 곰곰 생각할 때가 있다. 불과 쉰 살을 넘기지 못했던 수백 년 전의 사람들에 비한다면 우리의 삶은 획기적으로 좋아진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수명 연장이 우리 모두를 행복한 삶으로 안내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저녁에 접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환갑이 지나 백발이 성성해진 자식이 백수를 바라보는 부모를 모시는 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거동이 불편한 부모가 자식 늙어가는 걸 하릴없이 지켜보는 건 얼마나 가슴 미어지는 일이겠는가. 차라리 젊고 건강한 자식의 배웅을 받으며 세상을 하직하는 게 백 번 행복한 일일 테다. 그러나 돌봄 노동의 부담을 오롯이 홀로 떠안고 있는 대한민국 여성들의 고된 삶과  이를 당연한 듯 여기는 대한민국 남성들의 이기적인 삶을 생각할 때, 약자를 향한 애정의 발현이라는 돌봄이 오늘날에 와서는 노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나는 김유담의 소설집 <돌보는 마음>을 통해 배운다. 신은 사랑의 꼬리표에 돌봄이라는 의무를 우리들 몰래 매달아 두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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