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내게 일어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현실로 나타날 때가 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앞에 떡 하니 펼쳐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현실로 말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 느닷없음에 얼떨떨하고 어리둥절하게 마련이지만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임을 감안하면 도대체 이런 일이 하필이면 나에게 일어났을까 궁금해진다.

 

지난 어린이날에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주중 휴일을 조촐하게 보내고 다음날 아침 성남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탔었다. 전날 조금 피곤했었던지 버스가 출발하자 마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버스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벌써 도착했을 리는 만무하고, 차량 증가로 도로가 꽉 막혀 있나 싶어 밖을 내다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오직 내가 탔던 차만 2차선에 멈추어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어디론가 열심히 통화를 하느라 승객들에게는 일언반구 설명이 없었다. 출발한 지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아무리 버스라지만 고속도로 2차선에 멈추어 선 채 있어도 되나 싶었다. 혹시 사고라도 나는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어느 여자 승객은 기사에게 큰소리로 항의를 했다. 그러자 기사 아저씨는 마지못해 상황을 설명했다. 버스가 고장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라고 말이다. 곧 예비차량이 올 것이니 그 차로 옮겨 타면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승객의 안전이었다. 버스가 2차선에서 20분 이상 멈춰 서 있었는데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버스 안에서 안전벨트를 맨 채 대기하는 상태였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던 기사는 가까스로 버스의 시동을 거는 데 성공했고 꿀렁거리는 차를 몰고 몇 백 미터를 주행하여 갓길에 정차했다. 그 불안한 주행이 시작되고 차가 꿀렁꿀렁 흔들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아저씨!" 하는 짜증과 불안이 섞인 항의가 터져 나왔다. 차가 멈춘 지 30분 이상이 지날 즈음 같은 회사의 차량이 한 대 도착했다. 차 안에는 여러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저기 빈 자리를 찾아 앉아야만 했다. 그렇게 사고가 일단락 되고 차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를 포함하여 고속도로 2차선에서 멈춘 버스에 탔던 승객들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누르고 안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간혹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일이 내 앞에서 벌어질 때 일순 현실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한 채 멍한 느낌에 휩싸이곤 한다.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어린이날 아들은 학교에서 받아왔노라며 과학의 날 기념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주는 상장과 부상을 보여주었다. 부상이라야 나로호를 본뜬 USB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상을 받은 아들도 어떤 이유로 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단다. 무심해도 너무 무심하다. 초등학생인 사내녀석들은 다 그런 건지. 아무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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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니를 보라 - 세상에 불응한 여자들의 역사
박신영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사실 역사서나 역사소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90년대 역사소설이 유행했던 시절에는 나도 시류에 이끌려 주구장창 역사소설만 읽었었다. 귀가 얇은 탓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사소설의 인기가 바닥을 치는 까닭에 나도 덩달아 역사서를 멀리하게 되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역사서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던 적이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일본의 대만계 역사 소설가 진순신이 쓴 <십팔사략>을 읽었을 때였다. 특히 <십팔사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은나라의 주왕과 달기로부터 시작되는 <십팔사략>은 인간군상의 탐욕과 애욕, 배신, 권모술수, 지략, 처세 등 인간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까닭에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은 달라진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사설이 길었다. 각설하고,박신영 님의 <이 언니를 보라>는 열네 명의 역사 속 여자들을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파헤쳐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미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거상 김만덕, 헬렌 켈러 등 우리가 익히 들어보았거나 잘 알 만한 여성들의 삶에 대해 에피소드 형식의 단편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마다 여러 문헌들을 비교 분석하여 그 속에 작가의 시선을 담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실, 그녀의 삶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런 말초적인 성관계 에피소드보다 다른 곳에 있다고 난 생각한다. 도덕적인 면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면 미실의 상대 남자들도 같은 정도의 비난을 받아야 한다. 즉 제수씨이자 처조카를 후궁으로 삼은 진흥왕도, 친누나와 성관계를 가진 미생도 다 같이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개 권력자 남성의 성생활은 비난받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의 성생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다." (p.21)

 

어떤가? 위에 인용한 글을 읽고 불편함을 느꼈다면 당신은 분명 남성, 그것도 까칠한 성격의 남성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나는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내 성격이 무던하거나 남성의 권리 주장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한심한 놈쯤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사실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에 가깝고 사회적 이슈에도 민감한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그럴 수가... 생각하시겠지. 그것도 다 역사서를 읽었던 덕분이라고 말한다면... 아무튼 내가 이제껏 역사서를 통해 배웠던 진리는 단 하나, 인간 세상에서 영원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이나 판단이 구구절절 다 옳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요, 역사 속의 여러 시대를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의 사실을 현대의 가치관과 제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에는 의구심이 있다. 예컨대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컷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가족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는 실질적 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부터 평생 지적만 당하며 살았던 것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천 번 만 번 부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관점에서 루이자 본인은 평생 행복하다고 생각했을지 어찌 알겠는가.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기술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을 기록한다 할지라도 기술하는 사람에 의해 가감과 수정 보완이 늘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 시절을 완벽히 재현하지 않는 한 역사에 대한 객관성은 결코 담보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결국 역사란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에 의해 각색되고 편집된, 심하게 말하자면 한 개인이 바라본 지난 과거에 대한 감상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역사에 대한 선악적 가치판단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현재의 환경에서 현대인의 가치관에 입각한 하나의 생각일 뿐이지 그 당시 사람들의 의견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기에 앞서 현상을 바라보는 바른 생각, 즉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사상이나 정신은 언제나 환경이나 육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행복하다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편하고 자유로운 환경에서도 불행하다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다름'을 추구하고 저마다의 개성으로 빛날 때 인간 세상은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인간의 속성은 끝없이 '같음'을 추구하는 한편 '같음'에 대해서는 언제나 불편함을 느끼는 듯하다. 예컨대 자신이 입은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거리에서 만나면 불편하고, 자신과 같은 성격의 사람을 결코 좋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다름'에 대한 현대적 견해를 독자들에게 어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대건 시대적 본류에 속하지 않았던 몇몇 인물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주목을 받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평가자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인생이란 어차피 '다름'을 인정하고 배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견해가 나와 다르기에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다름'을 인정하면 모든 게 편하고 모든 게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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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벌써 여름으로 가려는지 사람들 입에서는 '덥다. 더워!'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조급함이 계절로 옮겨간 듯하다. 이제 겨우 5월 초순. 산책을 부르는 신선한 바람이 봄의 갈피 어디쯤 여전히 남아 있을 거라고 믿어 본다. 나는 아직 이 계절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음이다. 억. 울. 해!!!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읽은 후 걷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심해도 너무 심한 과장이다. 그야말로 뻥이다. 그러나 걷기에 대한 시각이 조금쯤 변한 건 사실이다. 걷기와 관련된 책을 찾다 보면 이따금 <플래닛 워커 : 아름다운 지구인> 과 같은 감동 100%의 책도 우연히 만나게 되고,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이나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와 같은 재미있는 책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걸어서 남 주나?' 아니면 말고.

 

 

 

 

 

 

 

 

나는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하루키의 광팬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사심이 작동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루키의 여행기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여행기와는 차원이 다르다.(물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루키의 여행기에 빠져서 하루키 폐인이 된 사람을 나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은 말할 수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그의 시적 영역, 또는 누구보다도 깊은 사색의 영역에 이끌리듯 빨려들어가게 된다. 마치 오래전부터 전해오던 지독한 열병처럼 '페소아적 사유'에 펄펄 끓게 된다. 그 장대한 사유의 기록은 그만큼 지독하다. 어쩌면 이 책은 그 '맛보기'일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하면 '아이, 언제 적 사람을 들먹이고 그래?' 하는 볼멘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 문단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중요한 작가일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가 반드시 접해야 할 작가 중 한 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뚜렷한 주관이 소설에서도 언뜻언뜻 비치지만 그의 산문집보다는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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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5-0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는 신작이 아니라 `하루키의 여행법`의 개정판인 모양입니다^^

꼼쥐 2015-05-07 15:40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어쩐지 목차를 보니 알겠더군요. ㅎㅎ
 
숙제의 힘
로버트 프레스먼 외 지음, 김준수 옮김 / 다산라이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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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이 길게 남았던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진한 아쉬움이나 어쩔 수 없는 회한 같은 것 말이지요. 마음의 찌꺼기와도 같은 그런 느낌은 어쩌면 자신의 열정과도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고3 수험생 시절, 한눈에 반한 첫사랑의 연인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떠나 보내야만 했던 이른 청춘의 기억처럼 언뜻언뜻 떠오르며 긴 여운만 남기는 일들 말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런 기억들이 나는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잘난 체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학창시절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힘겹게 버텼던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를 때마다 왠지 애잔하고 가엾다는 생각만 되풀이됩니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숙제의 힘>은 내가 자랐던 환경과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처한 환경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크구나, 생각하게 했습니다. 물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현실에서 너무도 당연한 일들은 가끔 잊고 지내게 마련이지요. 최근에도 아들은 해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학교에 다니기 싫다는 말을 아내에게 했다더군요. 그 또래의 아이들 대부분이 느낄 만한 가벼운 불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따금 아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때가 있습니다. 형제도 많고 매우 가난한 집에서 자랐던 나는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여겼으니까요.

 

사실 이 책 <숙제의 힘>은 아이들의 숙제 문제에 국한하여 쓰여진 책은 아닙니다. 미디어 환경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학습 습관을 심어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이를 바탕으로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는 학습 습관 연구서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은 바람직한 미디어 사용 습관, 숙제 습관, 시간 관리 습관, 목표 설정 습관, 효율적 대화 습관, 책임지는 습관, 집중하는 습관, 자립하는 습관 등 성공하는 아이를 위한 8가지 학습 습관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하나의 습관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를 만큼 넓은 범위일 수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실증적인 연구 결과를 통해 도출된 방안을 간략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컴퓨터와 태블릿 PC를 적정하게 쓰는 아이들의 경우는 아예 쓰지 않는 대조군에 대해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사용 시간이 45분을 넘자, 성적이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3시간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5시간이 넘게 되면 수학이나 영어에서 A를 받는 학생들은 매우 소수에 불과했다. TV 시청 시간이 1시간 30분만 넘어도 아이들은 성적이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TV 시청이 4시간을 넘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학교 성적을 받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게 된다." (p.97)

 

"아이에게 선물로 핸드폰을 사주지 마라. 핸드폰은 선물이 아니라 책임져야 할 대상이다. 정 갖고 싶다면 자신의 용돈으로 사야 한다." (p.113)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불도 갤 줄 모르는 아이의 손에 핸드폰을 쥐어 주고 책임감 있게 사용하라고 아무리 당부한들 통할 리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른도 하기 힘든 절제를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셈이지요. 놀이 상대가 부족한 요즘의 아이들에게 TV나 핸드폰은 끊을 수 없는 유혹이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구쯤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아이들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그것 또한 부모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겠지요. 결국 아이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부모의 책임을 다하려면 길고 힘든 고행의 과정을 통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 알다시피 배움이란 점진적으로 쌓여 가는 과정이기에 아이들에게 좋은 학습 습관을 심어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것은 결코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성취는 아닌 듯합니다.

 

"부모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남을 가르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르친다는 것은 일종의 기술이다. 효과적으로 남을, 특히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당신에게 교사 자격증이 있거나 혹은 실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중이라고 해도, 섣불리 당신의 자녀를 가르치려 들지 말라. 그건 다른 직종이다. 지금 당신의 직업은 엄마, 아빠이다. 오직 당신만이 가장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기술인 '숙제하는 법'을 익히도록 아이를 도울 수 있다. 아이가 스스로 학교 숙제를 하도록 두어야 긍정적인 학습 습관을 길러 줄 수 있다." (p.135)

 

나는 이따금 부모가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유산은 무엇일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모든 부모가 내 의견에 동의할지 아닐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유산은 없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돈을 물려줄 수 없기에 하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배우고 그렇게 길들여진 습관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내 말이 과히 틀리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부모의 습관을 판박이처럼 따라하는 아이들을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예컨대 약속을 밥먹듯이 하면서도 제대로 지키지는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습관처럼 거짓말을 하게 되고, 다 쓴 물건을 아무데나 두거나 밤낮 누워 지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물건을 정리할 줄 모르는 법이지요. 그러나 잘못된 습관에도 불구하고 욕심의 수치는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으니 인생의 비애는 거기에 있나 봅니다.

 

"불행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정한 용기를 갖춘 사람보다 단지 유명해지려는 욕망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넘치는 곳이다. 이런 명성에 대한 집착은, 많은 아이들에게 '최고가 아니라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결국 그냥 포기하고, 좀 더 쉽게 희망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일을 찾게 된다. 지금 이 일이 안 될 것 같으면, 뭔가 다른 것으로 넘어가면 그만인 것처럼." (p.310)

 

이 책의 구성은 1부 ‘평생 학습의 모든 것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2부 ‘평생 성공하는 아이를 위한 8가지 학습 습관의 법칙’, 3부 ‘성공하는 아이를 위한 21가지 놀이 과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찌 보면 2부가 주가 되겠지요. 나는 그동안 자녀 교육에 관한 많은 책을 읽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뭐가 뭔지 방향을 잃고 헤맬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나처럼 자녀 교육에 대한 원칙이 없어 갈팡질팡하는 부모에게 보탬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 들어 금연을 실천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워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많이 배웠던 것은 중독의 무서움이었습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런 까닭에 아내는 게임을 일체 하지 않습니다. 나도 물론 게임을 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무엇이건 일단 한번 중독되면 그것을 끊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일 느끼는 커피 한 잔의 유혹을 나는 여전히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가장 훌륭한 생활을 선택하라. 습관은 인생을 즐겁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지요. 힘들이지 않고 좋은 습관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내 경험에 의하면 '아무리 오래된 좋은 습관도 한순간만 방심하면 잃기 쉽고, 얼마 되지 않은 나쁜 습관도 버리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힘든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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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에서의 개인은 정보의 무차별적인 공습에 의해 쉽게 상처받고 그 상처받은 개인이 자신도 모르게 정형화된 어떤 보편적인 틀(또는 룰)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때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방치되고 소외되는 것은 주변에서 너무도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현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시큰둥하고 뜨뜨미지근할 뿐이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여 목격함으로써 우리가 처음에는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한 사건은 점차 퇴색하여 희미해져가고 사회로부터 도태되거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죄책감이나 서글픔은 먼 옛날의 신화처럼 산화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은, 아직은 도태되지 않은 나 자신도 언젠가는 사회로부터 추방된 무리 속에 속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것이 현실로 일어날 가능성은 백 퍼센트에 가깝다.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거나, 어떤 사고로 인하여 장애를 입거나 하는 피할 수 없는 육체적 손실로 인하여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소외되었을 때 '나만 아니면 돼.'하는 식의 차디찬 눈길을 받는다면 그 기분은 어떨지.

 

오늘은 세월호 승무원들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있었던 날이다. 선장과 나머지 14명의 승무원에 대한 판결이 있었고 그것으로서 세월호 사건은 일단락이 된 것으로 치부될지 모른다. 진실도 밝혀진 게 하나도 없는 이 마당에 세월호 유가족들은 어쩌면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영원히 잊혀질지도 모르고 사회에 편입되어 평범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사회를 위협하는 적대적 행위로 인식될 수도 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뿌린 경찰의 행태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오죽하면 국제엠네스티도 “평화적인 집회와 행진을 진압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그 유가족 모두에 대한 모욕적인 처사”라고 비판했겠는가.

 

세간에 떠돌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도 따지고 보면 어느 한 개인의 욕심에 의한 뇌물 수수 사건이 아니고 현 정부의 정권 획득 시기에 있었던 비열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대중은 거론된 인물들만 하루 빨리 도태되기를, 그렇게 됨으로써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드러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듯하다. 대중으로부터 추방된 한 개인은 상처받기 쉽고, 그 상처받은 개인은 대중으로부터의 개별적인 관심을 받지 않는 한 치유되기 어렵다. 잊는 것과 잊혀진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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