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일기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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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욕망이나 규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적어도 스스로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에게서 좋은 작품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그가 창조성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가라면 자유는 예술을 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술의 원천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자유로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꼭 일상 생활에서의 자유분방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조차 예술가입네,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미친X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작품활동과 일상생활을 철저히 분리할 필요가 있다. 작품에서조차 근엄한 척, 성인군자인 양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다면 예술가로서의 그의 생명은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48일 전 나는 교통사고를 겪으며 인간의 목숨은 유리잔처럼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극히 일부로나마 맛보았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기록하고, 나누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에 남겨진 길을 기쁨을 찾아 떠나는 지도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 순간 느끼고 있다. 이 일기는 그런 차원의 기록이다." (p.75)

 

소설가 최민석의 <베를린 일기>는 읽는 이에게 편안한 웃음을 선사한다. 강요된 깨달음이나 과장된 웃음이 아닌, 날것에서 오는 푸근하고도 편안한 느낌은 글을 잘 쓰려는 작가적 욕망이나 누군가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은 사회적 욕구가 어느 정도 배제된 채 쓰인 글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규칙이나 욕망에서 벗어난 순간, 우리는 억제되었던 동심을 회복할 수도 있고, 일상의 권태를 삶의 위트로 치환하는 방법도 깨우치게 된다. 일기를 쓴다는 건 결국 내 삶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밋밋한 일상에서 서너 개의 기쁨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기쁨은 창조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임을 알기에 일기를 씀으로써 우리는 맨송맨송한 삶을 몇몇 기쁨으로 채워갈 수 있는 것이다.

 

"만만한 곳이 없는 세상이다. 그나마 베를린은 버틸 만한 곳이다. 물론, 소시지와 쌀쌀한 기온과 해가 안 뜨는 어두움과 그로 인한 우울함과, 맛없는 음식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발음과 방을 구하기 위해 서류를 보내고, 줄을 서서 면접을 봐야 하고, 복잡한 지하철과 버스 노선과 느린 인터넷만 잘 견뎌 낼 수 있다면 말이다." (p.158)

 

2014년 가을, 한 예술 기관의 지원으로 2014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베를린 자유대학에 머물렀던 작가는 독자가 선물로 준 다이어리에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고, 매일매일 자신의 SNS에 올렸다고 한다. 독특한 문체로 쓰인 그의 일기는 독자들에게 큰 화제를 모았고, 그때의 일기를 모아 엮은 것이 바로 이 책 <베를린 일기>다. 그의 일기에는 이국땅에서의 고독이나 우울이 물기 묻은 향수나 징징거림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행자의 낭만이나 지적 허세로 포장되지도 않는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끝없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는 보란 듯이 사진을 첨부한다. 구라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일기는 일정한 형식을 유지한 채 계속된다. 가령 첫 문장은 "이 글은 1유로짜리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쓰고 있다." 등으로 시작해 마지막 문장은 "베를린에서 첫 번째 날이었다."로 끝내는 식이다. 일기의 중간중간에 특정 인물을 소환하여 "OOO만이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를 반복하여 쓰기도 한다. 작가는 원고 청탁도 받지 않은 글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자유롭게 씀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했노라고 고백한다.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 나를 배웅하러 나온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암흑 같은 검은 하늘 가운데 줄곧 비가 내렸다. 나는 그녀가 준 우산을 쓰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그녀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일 안 좋을 때, 제일 우울할 때 오니, 볼 것이 없어,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내 문학의 상징인 빈정댐과 투덜댐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은 잃어버려도 좋다. 그렇게 생각했다. 여든아홉 번째 날이었다." (p.484)

 

그의 일기에는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자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없다. 그날그날의 호구짓이 그저 젊은 날의 낭만쯤으로 읽힌다. 그렇다고 그가 마냥 젊다는 건 아니다. 그가 말하길, "고독은 현재 진행형일 때는 처참하지만, 과거 완료형일 때는 낭만적이다. 이 자발적인 일기가 그 낭만의 증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결국 인생에서 필요한 건 상대에게 웃음 짓는 것, 상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소중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 실천인 것 같다. 어디에 있건, 남은 시간들은 소중히 쓰기로 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백림의 여운은 이제 모두 정리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서울에서의 날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날이었다." (p.492)

 

서울의 공기 질이 인도 뉴델리에 이어 세계 주요 도시 중 두 번째로 대기 오염이 심했다고 하는 오늘, 짙은 회색빛의 하늘을 보며 서울중앙지검으로 향했던 한 여인은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라고 부유하는 먼지처럼 말했다. 그녀의 일기가 "교도소에서의 첫 번째 날이었다."로 마무리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의 하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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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대리인단의 일원으로 헌재에서 막말 논란이 일었던 김 모 변호사가 친박집회에서 했던 말을 기억할 줄 압니다. 그가 말하길, "…… 헌재에서 판결을 내리면 무조건 승복하자고, 여러분 우리가 노예입니까. 거짓말하는 것을 인정해주는데도 우리가 승복하란 말입니까. 조선 시대 양반들이나 상놈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무조건 양반들 말에 따르라고. 우리가 조선 시대입니까."라고 했었죠.

 

그의 말이 문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노예가 되기 싫다던 그는 지난 14일 탄핵으로 파면을 당한 민간인 박근혜 씨를 찾아가 스스로 그녀의 노예가 되려했다는 점은 같은 인간으로서 그의 생각을 납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박근혜 씨의 삼성동 자택을 방문했다가 사전에 약속이 잡혀있지 않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고 되려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화를 내던 그의 모습은 추하고 빈약해 보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15일 한 인터넷방송에 출연하여 박근혜 씨를 알현(?)했음을 자랑스럽게 말하더군요. 게다가 그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용비어천가'를 철저히 배웠던 것인지 박근혜 씨를 칭찬하느라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었습니다. 조선왕조 건국의 정통성과 여섯 임금의 업적이나 덕을 기리는 내용을 담았던 그 용비어천가 말이죠. "우리나라의 여섯 성군이 나시어 하는 일(건국 위업)마다 모두 하늘이 내리신 복이십니다. (이러한 일은) 중국 고대 성군들이 하신 일과 일치합니다."(海東 六龍이〮 ᄂᆞᄅᆞ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ᄒᆞ〮시니)로 시작되는 '용비어천가'는 사실 손발이 오글거리긴 합니다.

 

그런데 박근혜 씨에 대한 김 변호사의 찬사에 비하면 그것은 양반이더군요. 그가 말하길, "지난 2월에 뵀던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하시고 얼굴이 웃는 얼굴이시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시더라. 이분은 역시 어려움을 많이 이겨내신 분이구나. 제가 너무 감명받았다."라며 "조선시대 단종애사 이후에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사신 분인데 어떻게 저 많은 고통을 다 겪고도 저렇게 웃고 의연할 수 있는지, 인간 박근혜가 저한테 너무 깊은 감명을 줬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그는 "'순교자 박근혜'란 타이틀을 한 번 쓴 적이 있는데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모습이 마치 잔 다르크란 성인의 이야기까지도 연상이 되는 대단한 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시적인 문체는 아니지만 오글거림에 있어서는 '용비어천가'를 능가하지요? 본의 아니게 구토를 유발한 것 같아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도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21세기의 신(新)용비어천가'하면 그가 생각날 듯합니다. 낮기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요즘, 조금 덥다 싶으면 한번쯤 그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잠시나마 소름이 돋고 서늘한 한기를 느끼실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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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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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우의 <스파링>을 다 읽은 후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 사람도 학창시절에는 무협지깨나 읽었겠는걸' 하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남자들에게 무협지는 가장 흔한 소일거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힘과 외모를 중시하는 청소년기의 낭만적인 사내아이들에게 있어 무협지의 주인공은 또래 아이들의 로망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무협지의 서사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등장인물의 이름과 무술의 종류, 또는 주인공이 속한 문파만 달라질 뿐 줄거리는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 시절을 살아본 남자라면 <스파링>을 읽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을 줄 안다. 부모도 모르는 채 태어난 천애고아가 무림의 고수와 조력자를 만나 각고의 노력으로 무술을 연마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실력으로 중원의 무림을 평정하게 된다는 그런 스토리가 무협지의 주요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 달달한 연애담이 양념처럼 섞이고, 악인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도 무협지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말이다.

 

자 이제 <스파링>의 구성을 살펴보자. 원조교제를 하던 17세의 미혼모가 공중화장실에서 아이를 한 명 낳았으니 그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장태주 되시겠다. 출생서부터 비루하고 범상치 않다. 그렇게 태어난 장태주가 엄마와 같이 살았냐고?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버련진 아이는 보육원에 맡겨지고 그곳에서 성장한다. 주인공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그가 살았던 은혜보육원의 남자 아이 셋과 여자아이 한 명이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내가 이 시기를 잘 벼린 칼날처럼 명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때의 내가 먹이사슬의 최하층에 존재하는 군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덩치가 작고 소심했으며 숫기도 없었고 무엇보다 갈등이 빚어지는 상황들을 두려워했다. 늘 혼자 구석에 앉아 조용히 언제까지고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책이나 숨죽여 읽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p.31)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주인공을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지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선생님들의 차별과 힘이 센 아이들의 괴롭힘은 날로 심해져서 어느 순간에 이르자 그가 인내할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했고, 원하지 않던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이 세상의 부조리에 맞선 장태주의 첫번째 싸움이었다. 그런데 싸움의 상대자였던 아이를 단 한 방에 쓰러트림으로써 우리의 주인공은 그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힘의 우위에서 오는 달콤한 권력을 맛보게도 된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장태주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또래 아이들 간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자 부모의 재산을 후광 삼아 그 지역의 중고등학교 일진들을 규합한 선도연합회 회장이 장태주를 찾는다. 그러나 장태주가 그 자리에서 반기를 드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지고 그 건으로 장태주는 소년원에 들어간다.

 

소년원에서 쥐죽은 듯이 조용히 지낸 덕분에 장태주는 가퇴원 심사 대상자가 된다. 그러나 감독 선생을 향해 흉기를 휘두른 아이를 저지하기 위해 장태주는 그 아이와 어쩔 수 없이 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그 바람에 가퇴원 심사도 철회되었다. 이를 지켜본 소년원의 담임 선생님이 장태주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설득하여 권투를 배우게 한다.

 

구호 처분 만기 보름을 앞당겨 퇴원한 장태주는 자신의 거처를 보육원에서 담임의 집으로 옮기고 학교도 옮겨왔다. 담임과 그의 부인 그리고 담임의 권투 스승이기도 했던 담임의 장인으로부터 이제껏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 장태주는 그들의 사랑과 가르침 속에 승승장구한다. 장태주는 자신을 누구보다도 아껴주는 담임의 부인을 누나라고 부르며 따른다. 담임의 장인인 할아버지로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은 장태주는 처음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언론에 관심을 받지만 대한권투연맹의 제의를 거절한 후 출전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그들의 농간에 의해 탈락한다. 그러나 장태주는 담임을 비록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어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담임의 친구인 한영기는 미국에서 유명한 프로모터이다.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한 장태주는 그의 제안으로 프로에 데뷔한다. 그는 프로 데뷔 불과 삼 전 만에 챔피언 결정전에 나가게 되고 최연소 세계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삼 라운드를 넘기지 않는 전 경기 케이오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세계 4대 복싱기구 라이트급 통합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한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중원 무림을 평정한 셈이었다.

 

"나는 스물 한 살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제 장태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내겐 부조리한 조직 시스템에 굴하지 않고 최고 자리까지 오른, 불굴의 스포츠 스타라는 이미지까지 덧대어졌다. 나는 공정성의 신화처럼 여겨졌다. 부패척결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었고 불행을 딛고 스스로를 일으켜세운 상징처럼 일컬어졌다. 한 나라가 우리도 다시 시작해보자는 분위기로 들끓었을 만큼 나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p.287)

 

프로모터 한영기가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인 덕분에 장태주는 4체급을 석권하며 명실공히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태주의 마음 한켠에는 늘 허전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돈으로 해결하려 했던 장태주는 어느 날 담임과 심하게 다투게 되고 그 후 그는 호텔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담임의 집으로 돌아온다. 5체급 석권을 눈앞에 둔 미들급 타이틀매치가 성사되면서 장태주는 누나와 할아버지를 미국에 초청한다. 마지막 시합이 될 수도 있었던 그 경기의 세컨드를 할아버지가 보기로 했기 때문에 장태주는 몹시 들뜬 상태였다. 그러나 오기로 약속했던 할아버지와 누나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담임의 조언을 받아 질 뻔한 경기를 가까스로 이겼다. 관중들의 열기와 환호 속에서 자신의 대기실로 향하던 장태주와 담임은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되는데...

 

"나는 그 어마어마한 열기의 환호 속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대신 나를 들고 있는 담임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었다. 그 공간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허상과 내가 진짜 지켜야 하는 사람과의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지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나를 들여다보는 일. 나 자신을 먼저 인정하는 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진짜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 (p.316)

 

우리의 주인공 장태주는 그 뒤로부터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돈과 권력으로 치장된 부조리한 현실과 필요할 때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도구화 된 정의 앞에 그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낀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은 상실감으로 인해 그는 스스로 선택한 자기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소설로서의 재미보다는 주제나 교훈에 더 치중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주된 이유는 장태주가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들이 나이와 걸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장태주가 대신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달리 말하자면 작가는 독자에게 지나친 친절을 베풀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의도를 독자기 미처 알아채지 못하거나 곡해하는 건 아닌지 지레 겁을 먹고는 '이 소설의 주제는 이러이러한 것이니 오해하지 말기를' 하고 당부하는 투다. 또 있다. 부실공사로 인해 바다 위에 놓인 대교가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야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담임마저 차에 치여 죽게 만들었던 것은 자연스럽지도 않았고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외에도 갑작스러운 장면 변화라든가 불필요한 욕설 등은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아마추어 작가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이러한 실수의 노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겨울 방학이면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무협지에 빠져 살던 그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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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보던 풍경이 어쩐 일인지 달라 보일 때가 있다. 날씨나 계절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크나큰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또는 내가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익숙한 공간에서 맛보는 생경한 느낌은 때로는 나의 존재마저 잊게 만든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화도 내고, 적당한 방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며 두 발로 굳건히 섰던 내 삶의 현장이 오늘은 웬일인지 다른 세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나를 밀어낸 그곳에는 어느 순간 예전에는 없던 구형의 유리막이 처진 듯 사람들로부터의 어떠한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에 익은 사람들도 여럿 있건만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는지 도무지 알은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배제된 시간을 나는 지금껏 즐겨왔는지도 모른다. 영혼이 떠난 듯한 표정으로 잠시 동안 우두커니 있다 보면 누군가 내 어깨를 치며 괜찮냐 묻곤 한다. 그 순간 나는 원하지 않던 현실로의 강제 송환을 겪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나를 팍 하고 꺼지게 만드는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촛불이 꺼지듯 훅 하고 불어서 현실에서 나를 잠시 사라지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렇게 현실에 관여하지 않은 채 잠시 그들을 그저 묵묵히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아침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전에 간단히 몸을 푸는 산 위 능선의 체육공원에도 시나브로 봄 기운이 완연하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이라 볼에 닿는 바람은 여전히 차갑지만 말이다.

 

레너드 믈로디노프의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와 최민석의 <베를린 일기>를 읽고 있다. 봄의 나른함을 극복하기 위해 수학이나 과학 서적을 한두 권 읽어야겠다. 정신이 버쩍 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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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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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는 끝내 세월로 치료할 수밖에 없음을 어렴풋이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크게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것은 치료라기보다 하나의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를 더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점진적 내성일지도 모른다. 고통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점차적으로 둔해지다가 종국에는 '죽음'이라는 가장 큰 고통을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면 상처에 또다른 상처를 더하는 것은 지당하고 옳은 일이다.

 

손홍규의 산문집 <다정한 편견>을 다시 읽었다. 실상은 어이없는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 자책할 일만은 아니었다. 재작년 여름에 이 책을 읽고 리뷰까지 썼음에도 불구하고(http://blog.aladin.co.kr/760404134/7660211) 어떻게 나는 남의 일인 양 까맣게 잊은 채 도통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까. 급기야 나는 책을 새로이 구매했고, 모르는 낱말에 밑줄까지 그어 가면서 꼼꼼히 읽었다. 지난 주말, 방 청소를 하던 중 마구잡이로 쌓아올린 책더미 속에서 유난히 낯이 익다 싶은 책 한 권을 발견하였는데, 아뿔싸, 그것은 바로 내가 읽고 잇는 바로 그 책, 손홍규의 <다정한 편견>이었다.

 

"완전한 독서를 위해 우리가 준비할 것은 경이로운 것들 앞에서 기꺼이 감탄할 자세 하나면 된다.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그렇다면 언젠가 우리는 책 너머의 것들에 감탄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는 읽는 행위가 아니라 교감하는 행위다. 좀더 외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문장들과 속삭임을 나누고 손길을 나눈다. 책과 동침하고 책과 사랑을 나눈다. 책은 우리 안에서 익어가고 발효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책과 하나된 스스로를 출산한다." (p.167)

 

지난 2008년부터 3년 반 동안 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 〈손홍규의 로그인>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그의 산문집에는 당시에 썼던 180여 편의 글 중에서 138편만이 실려 있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1부 '시간이 지날수록 초라해지는 목록', 2부 '선량한 물음', 3부 '바느질 소리', 4부 '다정한 편견'의 제목 하에 글의 내용에 따른 분류가 이루어진 듯했다.

 

1부에는 주로 작가의 고향이나 가족을 주제로 한 글들이 많다. 새로 산 하얀 고무신을 물에 떠내려 보낸 후 혼이 날까봐 무서워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근동을 배회하다 밤이 늦어서야 들어간 집의 댓돌 위에 놓인 또다른 새하얀 고무신을 보고 눈물을 찔끔 흘렸던 추억 등 작가의 마음 속에서 한 폭의 그림으로 간직된 여러 이야기들이 읽는 이의 가슴을 아련하게 한다. 2부에는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올린 작은 깨달음과 다정한 이웃들의 따뜻한 시선을 담았다. 방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 직거래 카페를 들락거리며 우연히 보게 된 타인의 삶의 일부, 고즈넉하지도 평안하지도 않았던 그들의 삶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3부에는 소설가로서 문학을 대하는 작가 자신의 자세와 습작시절 등을 다룬 글들이 담겨 있다. 글은 왜 쓰는지, 무엇을 쓸 것인지,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등 작가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애환과 그럼에도 주관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자 애쓰는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4부에는 주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가 자신의 생각과 시대의 풍경이 담겨 있다.

 

재작년에 내가 썼던 리뷰에서도 언급했던 바이지만 작가의 글에는 잊혀져가는 순우리말이 적절히 섞여 있다. '여축없다', '몰강스럽다', '각다분하다', '끄느름하다', '비루먹다', '메지구름', '는질는질', '그들먹하다' 등의 낱말들이 섬처녀처럼 수줍게 다가온다. 이보다 더 많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자신의 부족한 우리말 실력을 탓하기보다는 책을 읽는 내내 '잘났어 정말' 하고 비아냥거렸을지도 모른다.

 

"눈 내리는 바다는 늘 해맑게 웃던 이가 어느 날 속깊은 울음을 터뜨렸을 때처럼, 타인의 내면을 무심코 목격했을 때처럼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리고 나는 이 당황스러움이 삶을 구성하는 찬란한 순간들임을 알았다. 상대의 진심을 알게 되던 속수무책의 순간들을 겪듯 매 순간 당황하고 당황하며 견뎌내야 하는 게 삶이라면 그 삶 가운데 비장하지 않은 삶이란 없다는 것도." (p.127)

 

길게 늘여 쓴 글이라고 해서 없던 감동이 갑자기 생길 리도 없지만 짧은 글이라고 해서 감동의 여운이 비례하여 짧아질 리도 없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까닭은 작가의 글이 원고지 4.5매 내외의 짧은 글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 이와 같은 분량상의 제약 때문에 작가 또한 괴로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짤막짤막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작가가 말하는 장면들을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원고지 4.5매로 압축했던 까닭에 행간의 의미는 더욱 깊어졌고 언어 너머의 여운 또한 길어진 듯했다. '행복은 건강과 좋지 않은 기억력에 달려 있다.'고 했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말이 새삼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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