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 50인의 증언으로 새롭게 밝히는 박원순 사건의 진상
손병관 지음 / 왕의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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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중기부터 근세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유럽, 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행해지던 마녀나 마법 행위에 대한 추궁과 재판서부터 형벌에 이르는 일련의 행위'를 우리는 '마녀사냥(witch-hunt)'이라 부른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당시에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마녀 혹은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고 하니 종교를 빙자한 인류의 야만성은 정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마저 마녀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고 하니 말 다했지 뭔가.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 중에 다수가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와 같은 마녀 사냥의 배후에는 가톨릭교회가 가장 약했던 시기에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를 질타하기 위해 예수와 대립되는 존재로 마녀를 만들어냈던 도미니코 수도회의 영향이 컸다는 게 정설이다. 말하자면 '마녀사냥'이란 본질적으로 절대적으로 믿는 어떤 대상을 지키기 위해 가상의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행위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있어 '마녀사냥'은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예수'라는 하나의 절대자가 분화하여 지켜야 할 대상만 교묘하게 넓혀졌을 뿐 예나 지금이나 '마녀사냥'은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예컨대 중세인들이 믿던 예수는 이제 다양한 이념 체계, 각자가 지켜야 할 다양한 욕망 체계 혹은 권리 체계에 투영되어 과거에 하나였던 예수가 작금에 이르러 수백. 수천의 예수로 부활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바람에 시도 때도 없는 마녀재판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게 되었고 말이다.

 

서론이 길었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마녀사냥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던 사건은 고인이 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었다. 신문에 무차별적으로 보도되는 기사는 모두 피해자 측의 주장뿐이었고,  박 전 서울시장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이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억울한 사정을 보도하는 기사는 일체 없었다. 말하자면 편파적인 언론 보도로 인해 피해자의 입장에 서면 정의로운 것이요, 가해자(라고 말해지는)인 박 전 시장의 편에 서면 불의이자 악의 편인 양 극단적으로 갈리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신이 아닌 인간이 하는 일에 100% 정의라는 게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그러나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언론이 이렇게 끌고 가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그 어떤 의심도 제기하지 못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이것이 과연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국가에서 가능한 일이었던가. '내 주장만 옳고 너희는 틀렸으니 그 입을 모두 닫으라'는 주장은 독재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그러나 그러한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여론을 선도하는 언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고 싶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했던 데카르트의 명제는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같은 팩트를 놓고도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게 민주주의이다. 전체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선택이 중요하지,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유교의 영향으로 늘 옳고 그름에 집착한다. 사고의 여백 없이 정답을 찾는 교육도 이런 성향을 부추긴다고 생각된다. 전체주의는 '인민의 의지'라는 절대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전체주의가 위험한 건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가운데 독재자의 의지가 인민의 의지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p.340 '추천사' 중에서)

 

이 책 <비극의 탄생>을 쓴 손병관 기자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박 전 서울시장을 잘 아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생전에 일면식도 없었던, 남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비극의 탄생>을 주저 없이 구매하여 읽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어느 한쪽의 주장만 일관된 보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5대 5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10대 1, 혹은 100대 1이라도 되어야 옳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언론은 그런 면에서 모두 비겁했다. 비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기에 영합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겠다는 생각은 이를 보도했던 기자들 중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박 시장과 잔디(조사 편의를 위해 경찰이 피해자에게 부여한 별명)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안다. 그러나 당시 잔디가 시장이 자신에게 한 행동이 안희정의 그것과는 다르다, 손녀딸처럼 생각한다고 인식했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p.121)

 

나는 책을 받은 날부터 낱글자 하나까지 꼼꼼하게 읽었다. 다행히도 저자는 기사를 쓰는 기자답게 자신이 취재한 바를 육하원칙에 의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김재련 변호사를 비롯한 피해자 측의 주장 역시 가감 없이 싣고 있었다. 우리가 실체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박 전 시장의 입장을 대변할 만한 증거나 지인들의 인터뷰, 혹은 저자가 취재한 새로운 사실들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던 기울어진 세월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업 언론과 정치 모사꾼들에 의해 만들어진 여론 지형의 현주소는 가해자 박원순에 대한 마녀사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리인은 박 전 시장 핸드폰의 포렌식을 중단하도록 한 법원의 결정에 격렬히 항의했다. 상대의 핸드폰에 있는 성추행 증거라면 피해자의 핸드폰에도 있어야 한다. 신속한 진상규명을 원한다면 피해자의 핸드폰을 수사기관에서 포렌식해 증거를 찾도록 하면 된다. 지름길은 놔두고 법원 결정이나 비난하며 힘든 길을 가야 할 이유가 없다."  (p.226 '서울신문 곽병찬 논설고문의 칼럼' 중에서)

 

박 전 시장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도 벌써 해를 넘겨 아홉 달이 흘렀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박 전 시장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와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누군가의 앞에서 큰소리로 비난하는 자여야만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부여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박 전 시장과의 일면식도 없고, 그의 처신에 대해 항변하고자 <비극의 탄생>을 읽었던 게 아니다. 피해자를 매도하려는 의도 또한 눈곱만큼도 없다. 다만 어떤 사실에 대해 우리가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 자체가, 혹은 진실을 향한 우리의 자세가 무척이나 잘못되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그러했으리라.

 

기자를 멸칭하는 단어 '기레기'(기자+쓰레기)는 2009년~2010년경부터 스포츠 커뮤니티 등에서 운동선수에 대한 별칭 혹은 비하하는 표현 혹은 기자에 대한 멸칭으로 혼용돼 쓰이다가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기자에 대한 일반적인 멸칭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요즘에는 이보다 더한 멸칭인 '기더기'(기자+구더기)도 쓰인다고 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조중동으로 칭해지는 보수 언론은 수십 년 동안 편파보도 혹은 왜곡보도를 일삼았지만 지금까지도 시정되지 않은 채 꿋꿋이 유지되고 있다. 모든 사실을 해석함에 있어 개인의 이념이나 사상이 투영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기자라면 적어도 양측이 제시하는 증거나 주장을 듣고 판단함이 옳지 여론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해서 기자들마저 부화뇌동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기레기' 소리를 듣는 것이다. '기레기'의 탄생은 어쩌면 기자 스스로가 자초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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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부산의 지자체장을 뽑는 보궐선거가 1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보궐선거라고 하면 사람들의 관심에서 한참이나 멀어지게 마련, 가뜩이나 활동하기에 적당한 날씨에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치러지는 보궐선거는 누가 당선되든 관심조차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대통령 선거를 1년남짓 남긴 시점에서 치러진다는 특이성에 더하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 서울과 부산의 지자체장을 동시에 뽑는다는 점에서 지역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람들조차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수혜자는 누구이며,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일까? 다들 동의하겠지만 가장 큰 수혜자는 오세훈 후보일 테고, 가장 큰 피해자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아닐까 싶다. 오세훈 후보는 야권의 최종 후보가 되지 못했더라면 하마터면 잊혀진 계절, 아니 잊혀진 정치인이 될 뻔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건 물론 LH 부동산 투기와 맞물려 여권의 지지세가 주춤해지자 유력한 차기 서울시장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의 앞날은 정말 모를 일이다. 찌질하게만 보였던 그가 이렇게까지 급부상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다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어떠한가. 야당 단일후보 경선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지율 1위를 구가하던 그는 오세훈 후보에게 밀려 서울시장 후보직에서도 사퇴하고, 김종인 대표의 눈총과 냉대를 감수하면서 구차한 정치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표면상으로는 오세훈 후보를 돕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라도 국민들에게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완전히 잊힐 판인지라 오세훈 후보에게 견마지로를 다하는 듯 행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작지만 일개 정당의 대표가 다른 정당의 후보를 위해 할 짓은 아닌 듯 보이는데 말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이 1914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제목이 '너 참 불쌍타'라고 했던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안철수 대표를 만난다면 '레미제라블'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사에서 안철수 대표는 왜 유독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었을까? 나는 그 원인을 안철수 대표의 거짓말에서 찾고 싶다. 실제로 2013년에 출간된 '안철수의 거짓말'이라는 책도 존재한다.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일삼았으면 책으로까지 나왔을까 싶겠지만 저자인 김구현에 따르면 안철수의 거짓말은 너무나 쉬운 소재였던 까닭에 책을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도 1달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책이 출간된 후에 안철수 대표는 자신의 언행을 삼가고 조심했을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2016년 12월 6일 기사에 따르면 "새누리당과 연대는 없다. 저는 부패세력과 연대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었는데 그마저도 어긴 채 오세훈 후보의 조력자를 하고 있다.

 

정치인의 거짓말이야 자주 있는, 흔하디 흔한 일인지라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지만 안철수의 거짓말은 뭔가 특별하다. 그리고 짠하다. 그나저나 라이어(Liar) 안철수를 자신의 선거 조력자로 쓰고 있는 오세훈 후보는 과연 그것이 득일지, 실일지... 혹시나 선거 이후에 안철수 대표뿐만 아니라 오세훈 후보에게도 '레미제라블'을 외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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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1-03-27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절히 하고 싶은 말..

꼼쥐 2021-03-28 17:14   좋아요 0 | URL
저도 테레사 님이 그 말을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앞으로 올 사랑 -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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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혜윤 PD의 책을 읽을 때면 번번이 '어렵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얕은 탓이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혹시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건 그 이유를 남들에게 드러냄으로써 내 얄팍한 지식이 탄로날까 봐 몹시 저어하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나는 정혜윤 PD의 책이 새로 출간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읽는 것이다. 하나는 정혜윤 PD의 지적 소양이 깊은 것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정혜윤 PD의 문체에 익숙해진 데서 오는 편안함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후자의 이유 때문에 잘 이해도 하지 못하는 책을 꾸역꾸역 읽게 되는지도 모른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썼던 흑사병 시대를 포함해 어느 시대든 최고의 글에는 글 속의 누군가가 가치 있는 변화를 원한다.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사실은 나쁘기도 하지만 좋기도 하다. 상상해본 적 없는 거대한 단절의 시기인 지금, 이 균열 속에서 좋은 무엇인가가 나와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리석음은 꽃피고 나쁜 일은 벌어진다."  (p.23 '서문' 중에서)

 

그렇다. 코로나 정국이 길게 이어지면서 작가가 떠올렸던 건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이었고, 그 암울했던 시기에 쓰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었다. 작가는 서문에서 '나는 이 디스토피아 시대에 유토피아적 열정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고 쓰고 있다. 2020년의 우리는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서 국경은 폐쇄되어 자국을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빠졌으며, 작게는 각자의 집에 갇힌 채 고립된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57일간의 유례없는 긴 장마를 겪었고, 지구 곳곳에서 초대형 산불과 폭염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러한 '변화'에 앞서 작가는 우리가 잃은 것, 슬픔과 고통, 죽음 등에 대해 알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럴 때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 단절을 뚫고 창조적인 사랑의 단어들,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들이 나와야 한다. 슬픔에서 행복이 발효되도록 해야 한다. 비극을 겪은 후에는 비극적이지 않은 결말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토비와 젭의 사랑 이야기다."  (p.163)

 

책은 서문에 이어 첫째 날, '미래인지 감수성', 둘째 날, '무엇을 할 힘과 무엇을 하지 않을 힘', 셋째 날, '그녀는 그녀 삶의 예언자가 되었다', 넷째 날, '당신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해보라고 제안한다', 다섯째 날, '왜 상처의 말을 들어야 하나요?', 여섯째 날, '거울 깨기', 일곱째 날, '다른 누구도 더는 건드리지 말라', 여덟째 날, '이봐, 주위를 좀 보라니까!', 아홉째 날, '사랑하는 00과 함께 살기', 열째 날, '오늘의 가장 좋은 시도와 내일의 가장 좋은 시도 사이에서'로 끝을 맺는다. 작가는 이 많은 이야기들 속에 우리가 몰랐던 코로나 시대의 여러 모습들과 그럼에도 우리가 이 단절의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을 제시한다.

 

"종자를 지킨 바빌로프와 동료들은 굶어 죽었지만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 종자들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먹는 많은 음식이 나왔다. 이들의 이야기는 꼭 크리스마스 때 듣는 성인들의 이야기 같다. 성 바빌로프의 날. 자신의 생존 말고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나를 매료시킨다."  (p.277)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친 아담 3부작,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미셸 우엘벡의 <세로토닌>, 찰스 부코스키의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작은 우주들>, 슬라보예 지젝의 <팬데믹 패닉>, 게리 폴 나브한의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의 책을 관심도서 목록에 추가하면서 언제 읽을지도 모르는 내일을 허술하게 약속한다.

 

코로나로 인한 분열과 격리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는 한 뼘쯤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 자신과의 관계는 두 배, 아니 어쩌면 수십 배 더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늦은 밤 깊게 우려낸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빈 거리를 비추는 하릴없는 가로등 불빛을 응시하면서, 저 공간을 채웠던 수많은 발길과 식지 않는 체온들을 생각하며 부질없는 욕심들을 덜어냈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꾸역꾸역 욱여넣었던 마음속 허섭스레기들을 걷어내면 그 밑바닥에선 새살처럼 사랑이 돋아날까. 꼬마전구를 환하게 밝힌 듯 벚꽃이 만개한 계절. 나는 여전히 정혜윤 PD를 부러워하며 그녀가 쓴 책 한 권을 또 어렵게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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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풀리자 운동을 하겠다고 아침에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개중에는 겨우내 보이지 않던 낯익은 사람도 있고, 숫제 처음 보는 얼굴도 더러 보인다. 도시 근처에 산이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큰 복인가. 그러나 어느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산의 크기는 매년 쪼그라들어 급기야 산이라고 명명하기에도 민망한 작은 언덕으로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도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산은 거대한 콘크리트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섬처럼 변해버렸다. 이 또한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없겠지만 말이다.

 

주택가 근처에서 숲과 자연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잃었다. 비단 '아름다움'만 잃은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감정들, 예컨대 연민이나 공감, 배려, 여유, 기쁨 등을 함께 잃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콘크리트 인공 구조물로부터 새로운 감정들을 학습한다. 이기심, 욕심, 시기, 질투, 배척... 시나브로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고 '괴물'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최근 보도된 뉴스에서 나는 '괴물'의 전형을 목도했다. 검사장 출신의 국민의힘 국회의원인 유모 씨가 당사자였다. 그는 파주의 한 병원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범인에게 범죄 은닉을 교사하고 자신이 제시한 방법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며 자신했다. 살인을 저지른 자를 경찰서로 끌고 가야 마땅할 텐데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리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더구나 그는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던 검사 출신이 아니었던가. 돈과 빽이 있으면 살인도 감출 수 있다는 발상이 그가 내세우던 공정과 정의였던가. 의사 면허도 없는 무자격자 원장과 의료 기구를 파는 영업사원이 한 명도 아닌 두 명씩이나 잇따라 살해했는데... 가해자가 아닌 유가족의 입장에서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뉴스에서는 그것마저 살인이 아닌 수술이라고 했다. 그러나 의사면허도 없는 일반인인 내가 우리집이 아닌 병원에서 사람을 죽이면 수술이고, 집이나 야외에서 저지르면 살인이라는 논리는 과연 합당한가.

 

보도가 나간 후에도 국민의힘이나 해당 국회의원은 이렇다 할 의견 표명이나 사과 한마디 하는 걸 보지 못했다. 살인범에게 범죄 은닉을 교사하고 국회의원입네 폼을 잡는 그가 뻔뻔스럽기 그지없음에도 우리 사회는 크게 분노하지 않는다. 먼 나라에 사는 아시아인이 희생된 것에 크게 분노하였던 것처럼 돈과 권력으로 살인도 감출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들을 향해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힘없는 사람들의 목숨도 중요하다!"라고.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는 '아름다움'을 잃고 급기야 유모 의원과 같은 괴물만 길러내고 있다. 이것이 공정과 정의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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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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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쓰는 글의 문체에 스미게 하는 직업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인 신경숙을 사랑했던 게 아니라 신경숙이라는 문체를 사랑해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신경숙이라는 문체는 등단 이전부터, 내가 비로소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접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존재했지만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문체였는지도 모른다. 하여 나는 <겨울 우화>로부터 비롯된 신경숙 읽기에 빠져들었고, <외딴방>이나 <리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아름다운 그늘>, <자거라 네 슬픔아>, <모르는 여인들> 등 시간의 순서를 도외시한 채 신경숙이라는 문체에 탐닉했었다. 그리고 <엄마를 부탁해>로 이어지던 신경숙 읽기는 그해 불거진 표절 의혹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긴 휴지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없는 단 하나의 문체인 신경숙은 재생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신경숙 읽기를 멈추었던 수많은 독자 중 한 명인 나로서는 작가의 삶이 지속되는 한 이른 복귀를 고대할 수밖에 없었고, 2015년 세상으로부터 불현듯 사라졌던 작가는 6년이라는 긴 침묵을 깨고 2021년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통해 세상에 복귀했다. 신경숙 읽기에 목말랐던 나는 작가의 복귀가 무척이나 반가웠고 <아버지에게 갔었어> 역시 단숨에 읽어버렸다. 기꺼운 마음으로.

 

"어떤 사실들은 때로 믿기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이라 시간이 흘러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끝내 사실일까? 싶은 의문과 회의가 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싶어서 사실이 우연이나 조작에 의한 것처럼 보이고 어떤 형식에 맞추기 위해 도식을 끌어온 것처럼 여겨지며 상상에 의한 허구가 오히려 사실처럼 느껴진다."  (p.103)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여동생을 따라나서자 J시의 오래된 집에는 아버지 홀로 남게 되었다.'로 시작되는 길고 긴 서사는 신경숙이라는 문체로 인해 진한 슬픔을 동반한 채 아프게 이어진다. 몇 년 전 딸을 잃은 '나'는 엄마가 없는 고향집에 돌아온 후 비로소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대면한다. 전염병으로 두 명의 형을 잃고 얼떨결에 종손이자 장남이 된 아버지, 혹시나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마저 전염병으로 잃게 될까 노심초사했던 조부모의 걱정으로 인해 학교마저 다닐 수 없었던 아버지, 이른 나이에 부모를 잃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 그리고 온몸으로 겪어냈던 70년의 한국현대사가 주름살처럼 깊게 파여 수면장애로 드러나고 있는 안타까운 삶.

 

"아버지를 전혀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자 등을 기대고 있는 현관문이 차갑게 느껴지고 생각지도 못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나는 날이 밝자마자 어젯밤 아버지가 편지를 태우던 헛간으로 가보았다. 검은 재가 수북했다. 무슨 편지를 태운 것인지. 나는 발로 잿더미를 헤집어보다가 주저앉았다."  (p.238)

 

시조창처럼 유장한 가락의 신경숙이라는 문체는 소설 읽기가 못내 힘에 겨웠던 내게 와서 매 문장 마침표를 지나칠 때마다 툭툭 끊겨 뒤뚱거렸다. 한국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작품 속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나의 아버지에게 오버랩되어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희미해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아버지는 국군과 인민군의 혼재 속에 한국전쟁을 겪었고, 돈을 벌기 위해 갔던 서울에서 4·19 혁명의 현장을 목격했으며, 여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키웠던 소의 값이 폭락하자 소를 타고 소몰이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풀려나온 한 올 한 올의 한국 근현대사는 자식들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 혹은 편지를 통해 리얼리티를 더한다. 이에 더하여 중동 건설 노동자로 이주했던 '큰오빠'의 삶과 이를 기억하는 조카 등 아버지를 둘러싼 다른 가족들의 삶을 통해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이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아버지 말을 받아적다가 움찔했다. 내가 어떤 일에 마음이 옹졸해져서 쓰기를 주저했던 말들이 메마른 아버지 입에서 풍부하게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내게는 황송한 내 자식들, 이라고도 했으나 나는 차마 그말은 적지 못했다. 무릎 위의 노트북이 자꾸 미끄러지려고 해 나는 노트북을 아버지 침대에 올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자판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 더 하고 싶은지 방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p.415)

 

소설 속에서 '나'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글쓰기를 아버지를 통해 이어간다. 그것은 아버지를 통해 깨닫게 된 시간의 흐름과 나이 듦에 대한 통찰이며, 약하디 약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며, 뻗대고 저항한다고 해도 끝내 순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다. 아버지는 단지 자식들을 키우고 보듬어주던, 언제까지고 '나'의 보호자로만 살아가는 관계 속의 존재만은 아니고, 그 모든 관계 속에서도 고통과 슬픔을 감내하는 개별적인 한 인간이었음을 소설 속의 '나'는 말하고 있다. 아버지에게도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이, 삶을 지탱하는 절절한 위로가 순간순간 필요했음을 소설 속의 '나'를 통해 문득 깨닫게 된다. 끊김 없이 유장하게 이어지는 신경숙이라는 문체가 내게 와서 돌부리에 걸린 듯 휘청거리며 툭툭 끊겼던 까닭은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가슴 한켠에 옹색한 모습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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