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는 게 뭔지...


가뜩이나 살얼음판의 아슬아슬한 정치판인데 날씨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리더 멧돼지가 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시시각각 전해지는 국내외 뉴스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나처럼 게으르고 천하태평인 멧돼지도 리더라는 자리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어떤 일처리를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좋은 소식이 전해지는 바람에 지지율이 크게 오르기도 하고 반대로 크게 떨어지기도 하니 뉴스의 힘이 무섭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나에 대해 나쁜 소식을 전하는 언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를 죽여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한 언론사는 리더 전용 수레에 타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고, 또 다른 언론사는 회사를 통째로 나에게 우호적인 재벌 멧돼지들에게 팔아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사는 나를 찬양하는 뉴스만 매일 내보낼 테니 그렇게 되는 날 비로소 술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잠도 편히 잘 수 있을 게 아닌가.


한 해를 보내는 기념으로 전임 리더 멧돼지를 풀어주기로 했다. 사실 그는 리더로 재임하던 시절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만만한 자들 여럿으로부터 삥을 뜯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던 것인데, 마음 같아서는 한 10년쯤 더 가둬두고 싶지만 나를 보좌하는 똘마니 멧돼지들 중 상당수가 전임 리더 멧돼지의 심복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눈치를 전혀 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도 물론 아내 멧돼지와 장모 멧돼지가 나를 대신하여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 전임 리더 멧돼지를 딱히 비난할 입장은 못되지만 그를 풀어줌으로써 나라 전체의 일반 멧돼지들로부터 비난이란 비난은 내가 다 받아야 할 처지이니 그게 좀 번거롭다는 것이다. 전임 리더 멧돼지 역시 나의 선처에 감읍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똘마니 멧돼지들과의 회의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날리면' 멧돼지의 말을 몇 마디 섞어 썼다가 괜한 시비에 휘말렸다. 나는 사실 '날리면'이 쓰는 말을 뜻도 모르면서 그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했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 큰 뉴스거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션이다. 마켓에 대해서 정부는 어떻게 레귤레이션 할 거냐, 마켓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그 마켓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GDP(국내총생산)를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아주 효율적인 시장이 될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 체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부가 시장에 대해서 관여하고 개입해야 하는 기본적인 방향이다. (…) 금융기관의 거버넌스가 아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일이다. (…) 2023년에는 그야말로 다시 대한민국, 도약하는 그런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더 아주 어그레시브하게 뛰어봅시다." 나는 아직도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 거버넌스, 어그레시브 등 내가 했던 말들의 의미를 여전히 모르고 있다.


최근에 아내 멧돼지는 밖으로만 나돌고 있다. 물론 나와 아내 멧돼지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고, 필요에 의한 공생관계이긴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아내 멧돼지는 나의 권력이 필요하고, 나는 아내 멧돼지의 재력이 필요할 뿐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남들처럼 알콩달콩 사는 모습이 부러운 것이다. 더구나 내일은 인간들이 반기는 성탄절 아니가. 동장군의 기세만큼이나 가슴에는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아, 사는 게 뭔지...'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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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다녀왔습니다
신경숙 지음 / 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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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소설가라는 책무를 다하기 위함인지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 작품에 비해 산문집은 작품 권수가 현저히 적다. 소설가로 등단한 어떤 작가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치중하는 탓에 소설가인지 에세이스트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에 비하면 신경숙 작가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명확히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불미스러운 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등단한 지 40년 가까운 작가가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 하나 없이 홀로 깨끗한 것도 이상한 일, 작가를 아끼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전히 작가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다. 표절을 옹호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표절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얼굴 똑바로 들고 나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신경숙 작가는 꽤나 양심적인 게 아닌가.


"물론 나는 이보다 더 나빠져도 요가를 계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가는 이제 나에게 한끼 식사 같은 것이 되었으니까. 계속 숨을 쉬듯이, 내가 작가이니 계속해서 글을 쓰듯이 요가는 이제 조건 없이 나의 일상이 유지되는 한 계속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  (p.122)


내가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우울한 그늘>을 읽었던 건 딱 10년 전이다. 작가의 소설 작품만 읽어오던 내가 산문집을 읽었을 때의 감회는 새로운 것이었다.(신경숙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소설가라는 책무를 다하기 위함인지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 작품에 비해 산문집은 작품 권수가 현저히 적다. 소설가로 등단한 어떤 작가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치중하는 탓에 소설가인지 에세이스트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에 비하면 신경숙 작가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명확히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불미스러운 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등단한 지 40년 가까운 작가가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 하나 없이 홀로 깨끗한 것도 이상한 일, 작가를 아끼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전히 작가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다. 표절을 옹호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표절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얼굴 똑바로 들고 나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신경숙 작가는 꽤나 양심적인 게 아닌가.


"물론 나는 이보다 더 나빠져도 요가를 계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가는 이제 나에게 한끼 식사 같은 것이 되었으니까. 계속 숨을 쉬듯이, 내가 작가이니 계속해서 글을 쓰듯이 요가는 이제 조건 없이 나의 일상이 유지되는 한 계속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  (p.122)


내가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우울한 그늘>을 읽었던 건 딱 10년 전이다. 작가의 소설 작품만 읽어오던 내가 산문집을 읽었을 때의 감회는 새로운 것이었다.(https://blog.aladin.co.kr/760404134/5263012) 그렇게 나는 강산이 한 번 바뀐 후에 제목도 생소한 작가의 에세이집을 손에 들었던 것이다. 책의 제목인즉 <요가 다녀왔습니다>. 요가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택의 표지에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자가 없었더라면 결코 쳐다보지도 않았을 제목 아닌가.


"나는 체력을 잃고 난 뒤에 자주 심각해지고 좌절에 빠지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물건을 사납게 내려놓고 문을 쾅쾅 닫고 기다림에 인색해졌다. 마구 날뛰는 말 한 마리가 심장 부근에 살고 있다가 어딘가로 내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자책하곤 했는데 요가를 시작하고는 그게 사라졌다."  (p.37)


15년 넘게 요가를 하며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 일상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한 이 산문집은 달라질 것 없는 우리네 일상처럼 지극히 편안하고 단조롭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경숙의 산문집은 <우울한 그늘>이 거의 유일했던 까닭에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의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면서 읽게 되는데 <요가 다녀왔습니다>는 너무나 평이한 문체와 마치 집안에서 입는 일상복의 느낌이어서 독자이자 팬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신경숙 작가도 그렇고 시나브로 나이가 들고 있음이다. 다름을 통하여 남보다 앞서가려 했던 젊은 시절의 마음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다른 작가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평이하고 소탈한 문체를 통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하는 것이다. 작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1인일 뿐이라는 느낌이 글 전체에 배어 있는 것이다.


"소설은 결국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시작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벽돌처럼 쌓으며 나아가야 소설이 완성된다. 앞 문장에 의해서 뒤 문장이 이루어지듯 숨쉬기도 들이쉬기가 있어야 내쉬기로 이루어진다. 복식 호흡을 익혀나가는 일은 숨쉬기가 요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p.141)


아침에 내리던 눈은 낮이 되자 비로 바뀌었다. 우산을 쓰고 하교를 서두르는 아이들이 보이고, 종일 어두웠던 하늘은 다가올 추위를 예고라도 하려는 듯 내내 깊고 우울하다. 요가를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으려는 게 아니라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고 그에 비례하여 늙어가는 자신의 몸에 알맞게 적응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오늘처럼 흐리고 우울한 날엔 나로 하여금 더더욱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뒷산도 이따금 힘에 겨울 때가 있는 걸 보면 나의 몸도 조금씩 기울어가나 보다. 작가처럼 나도 아파트 인근의 요가원을 알아봐야 할까? 그럴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강산이 한 번 바뀐 후에 제목도 생소한 작가의 에세이집을 손에 들었던 것이다. 책의 제목인즉 <요가 다녀왔습니다>. 요가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택의 표지에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자가 없었더라면 결코 쳐다보지도 않았을 제목 아닌가.


"나는 체력을 잃고 난 뒤에 자주 심각해지고 좌절에 빠지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물건을 사납게 내려놓고 문을 쾅쾅 닫고 기다림에 인색해졌다. 마구 날뛰는 말 한 마리가 심장 부근에 살고 있다가 어딘가로 내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자책하곤 했는데 요가를 시작하고는 그게 사라졌다."  (p.37)


15년 넘게 요가를 하며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 일상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한 이 산문집은 달라질 것 없는 우리네 일상처럼 지극히 편안하고 단조롭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경숙의 산문집은 <우울한 그늘>이 거의 유일했던 까닭에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의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면서 읽게 되는데 <요가 다녀왔습니다>는 너무나 평이한 문체와 마치 집안에서 입는 일상복의 느낌이어서 독자이자 팬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신경숙 작가도 그렇고 시나브로 나이가 들고 있음이다. 다름을 통하여 남보다 앞서가려 했던 젊은 시절의 마음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다른 작가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평이하고 소탈한 문체를 통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하는 것이다. 작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1인일 뿐이라는 느낌이 글 전체에 배어 있는 것이다.


"소설은 결국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시작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벽돌처럼 쌓으며 나아가야 소설이 완성된다. 앞 문장에 의해서 뒤 문장이 이루어지듯 숨쉬기도 들이쉬기가 있어야 내쉬기로 이루어진다. 복식 호흡을 익혀나가는 일은 숨쉬기가 요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p.141)


아침에 내리던 눈은 낮이 되자 비로 바뀌었다. 우산을 쓰고 하교를 서두르는 아이들이 보이고, 종일 어두웠던 하늘은 다가올 추위를 예고라도 하려는 듯 내내 깊고 우울하다. 요가를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으려는 게 아니라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고 그에 비례하여 늙어가는 자신의 몸에 알맞게 적응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오늘처럼 흐리고 우울한 날엔 나로 하여금 더더욱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뒷산도 이따금 힘에 겨울 때가 있는 걸 보면 나의 몸도 조금씩 기울어가나 보다. 작가처럼 나도 아파트 인근의 요가원을 알아봐야 할까? 그럴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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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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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참사 시민 분향소에 다녀왔다. 스산한 날씨였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나이의 청년들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정 사진에 걸린 검은 띠만 제거하면 금방이라도 싱그러운 생명력이 되살아날 것만 같은 얼굴, 얼굴들. 제단에 국화꽃을 놓으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사람들과 그들 틈에 섞여 짧은 조문을 마쳤던 나는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의문만 가슴 한가득 품은 채 분향소를 벗어났다. 참사 후 달포가 지나는 동안 마치 비현실적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고 있는 듯한 유가족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의 이쪽 편에서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 시민들. 도로 건너편에는 '정치 선동꾼 물러나라'거나 '윤석열 잘한다'는 현수막을 걸고 유가족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타인의 슬픔을 마치 자신의 슬픔인 양 함께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들. 저들처럼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보인다. 타인의 아픔을 조롱하고 위로는커녕 막말과 욕설을 퍼붓는 인간 말종의 모습을 우리는 그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분향소에서의 감정이 되살아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황시운의 산문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자정이 넘어서야 다 읽었다. 어쩌면 나도 장애를 가진 누군가의 고통을 그저 머리로만 인식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인식의 저변에는 '나는 절대로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오만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책에는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2011년 '제4회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던 작가가 같은 해 봄 추락 사고를 당하여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갖게 되면서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사고가 일어나던 순간을 전후해서 벌어졌던 일들 중 일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수술 후 일정 기간 동안의 일은 선별적으로 기억하고 잇다. 그러나 허방을 딛던 순간 벼락처럼 덮쳐왔던 공포랄지 불안이랄지, 무언가가 쑥 꺼지는 듯한 상실감이랄지, 아무튼 그 순간의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끔찍한 감각은 그로부터 꽤나 오랫동안 눈만 감으면 나를 휘감았다 깜빡 잠이라도 들라치면 찾아오는 추락의 악몽뿐만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수시로 찾아오는 그 감각 때문에 몸서리쳐야 했다."  (p.193)


책은 사고 이후 하반신 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되면서 겼었던 여러 일들을 다룬 1부 '어쨌든 다시 봄', 조카들과 엄마 아빠 등 가족의 이야기를 쓴 2부 '그간에 밀린 이야기들', 사고 후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여러 에피소드를 다룬 3부 '움직여라, 발가락', 그럼에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가 실린 4부 '다시 시작할 산책'과 '작가의 말'로 끝을 맺는다. 작가는 어쩌면 이 한 권의 에세이를 완성하기까지 사고 후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죽음보다 더한 낙담과 고통의 순간들을 일상처럼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 명의 독자인 나는 그 고통의 강도를 1/10도 체감하지 못한다.


"다음날이 되어서도 그 남자가 한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제야 모멸감이 밀려왔다. 남자는 전날 밤의 일을 기억해냈을까. 만약 기억해냈다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했을까. 아니면 별일 아니었다고 생각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까. 나를 이토록 두려움과 모멸감에 빠트려놓고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병신이라니. 병신 같은 년이라니. 재수가 없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그런 끔직한 욕지거리를 한 남자는 물론 그 순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나에게까지 화가 치밀었다."  (p.276)


우리 사회의 약자들은 언제나 시간의 변방에서 살아간다. 현실에서 살아 있지만 그들은 살아 있다는 티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그들에게 되돌아가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조롱이나 욕설일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인 동시에 최고 권력층으로부터 학습된 무언의 명령일지도 모른다. 단식을 하는 참사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하거나 동지섣달의 한파 속에서 자식을 잃고 울먹이는 유가족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인들을 양산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겨울 한파보다 더 시리게 다가온다.


"친구의 말은 정말이지 큰 위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항상 나와 함께 턱을 넘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도 그들도 턱을 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안 되는 것일까."  (p.84)


타인에 대한 공감의 폭이 가면 갈수록 줄어드는 이유를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낮은 독서량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한 개인이 직접체험을 통하여 취득할 수 있는 공감의 폭은 무척이나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독서 혹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한 간접체험이 없다면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체험은 한낱 상상 속의 세상이자 그곳에 사는 외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계인과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뿐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는 경계심 가득한 적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반사회적 인격장애인만 양산하는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입니다.'라는 문구가 정언명령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회, 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그렇게 되는 날 황시운의 산문집 제목은 <당신들이 모두 아는 이야기>로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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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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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기만 하던 삶의 시간들이 썰물처럼 쓸려 가버렸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결국 오고야 마는 법이지요. 인생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말입니다. 켄트 하루프의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의 리뷰를 쓰기에 앞서 몇 년 전 내가 겪었던 경험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어쩌면 나의 경험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조금쯤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부인의 암 발병 소식에 모든 걸 정리한 후 단양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단행한 지인 한 분이 있었습니다. 정년 퇴임을 한 후 부부만의 호젓한 생활을 이어오던 지인 A 씨에게 있어 부인의 암 발병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던 듯합니다. 서둘러 살던 집을 내놓고, 가재도구를 정리하여 단양의 외딴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가버렸으니 말입니다. 지인 A 씨로부터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아왔던 나로서는 어떻게든 찾아뵙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내가 지인 A 씨를 만나기 위해 단양으로 향했던 것은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밤잠을 설치게 하던 늦은 여름이었습니다. A 씨가 이사한 집은 마을로부터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산중의 외딴집이었습니다. 단출한 가구와 필수 가재도구뿐인 집안에 복잡하게 놓인 병원 장비는 방문객의 마음을 몹시 심란하게 했습니다. 병원으로부터 암 4기 판정을 받았던 A 씨의 부인은 침대에 누워 나를 맞았고,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안부를 묻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뜨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남편분을 위해서라도 기운을 내시라는 인사와 함께 사람은 따뜻한 체온만으로도 위로를 느낄 때가 있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밤에 우리 영혼은> 역시 그런 소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남녀 두 노인이 서로의 체온으로 삶의 고독과 인생의 덧없음을 위로하고, 젊은 시절의 격정적인 사랑이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의 이어짐만으로도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갈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갖게 되는 듯한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아주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요. 좀 신기해요. 여기 깃든 우정이 좋아요. 함께하는 시간이 좋고요. 밤의 어둠 속에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잠이 깼을 때 당신이 내 옆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듣는 것."  (p.102)


소설의 구성과 스토리는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켄트 하루프가 자신의 작품에서 공간적 배경으로 즐겨 사용하는 콜로라도 주의 '홀트'에 70대의 독신 남녀인 루이스와 애디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배우자와 사별한 후 혼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애디가 루이스의 집을 찾아가 본인의 속마음을 전합니다. 자신의 집에서 섹스 없이 함께 잠을 자지 않겠냐는 게 그녀의 제안이었습니다. 오해받기 십상인 제안이었지만 루이스는 애디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남남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왔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습니다. 해가 지면 루이스는 애디의 집으로 가 '침대에 친구처럼 나란히 누워' 자신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들려줍니다. 애디의 어린 딸의 죽음, 루이스가 근무했던 학교의 여선생과의 불륜으로 가정이 파탄날 뻔했던 사건 등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우리 둘 다 인생이 제대로, 뜻대로 살아지지 않은 거네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순간은, 그냥 좋네요. 이렇게 좋을 자격이 내게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그가 말했다."  (p.109)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고 결국 덴버에 사는 애디의 아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가정불화를 겪던 애디의 아들 진은 자신의 아들이자 애디의 손자인 여섯 살 된 제이미를 애디에게 맡깁니다. 두 사람은 제이미를 함께 돌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진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 두 사람은 결국 관계를 정리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요, 아직은 아니죠. 애디가 말했다. 나는 이 물리적 세계가 좋아요. 당신과 함께하는 이 물리적 삶이요. 대기와 전원, 뒤뜰과 뒷골목의 자갈들, 잔디, 신선한 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당신과 함께 누워 있는 것도요."  (p.141)


이전의 관계를 정리한 후 어느 날 혼자 외출에 나섰던 애디가 길에서 넘어져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아들 진은 자신의 어머니를 덴버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킵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잇던 루이스는 동네 사람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덴버의 병원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여 애디가 입원한 병원을 알아냅니다. 갑자기 병문안을 온 루이스와 이에 당황한 애디는...


"오늘 밤에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는 칠흑이었다. 당신, 거기 지금 추워요?"  (p.194)


결혼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배우자와 한날한시에 죽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가능성은 기적에 가까우리만치 어렵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최후에는 결국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우리들 각자에게 지워진 셈이지요. 홀로 남아 살아야 할 날들이 길고 짧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깊은 상실감과 고독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건 곁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체온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칠흑과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딛고 조금이나마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호사는 곁에 있는 누군가의 체온과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시선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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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퇴근 무렵에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기 위해 타이어 전문점을 들렀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궂은 날씨 탓에 평일보다 손님들이 적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타이어 판매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림잡아 대기 차량만 족히 예닐곱 대는 되는 듯 보였다. '이걸 어쩐다. 되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서 교체를 하고 가야 하나?'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교체하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사무실에 눌러앉았다. 다들 나처럼 날씨만 믿고 어떻게든 대기 시간을 줄여보겠다는 심산으로 이 궂은 날씨를 뚫고 예까지 온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제 발등을 찍은 사람들의 면면이 참으로 딱하게 여겨졌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랄까, 아무튼.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끝도 알 수 없는 무한 대기의 긴 기다림만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휴대폰 액정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들과 별 내용도 없는 텔레비전 화면을 맥 놓고 바라보다 이유도 없이 채널만 돌리는 사람 등 기다림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 모두에게 몸이 배배 꼬일 정도의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나 역시 딱히 할 게 없었던 건 매일반. 답답함도 풀 겸 야외에 놓인 대기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고, 누가 피우다 불을 끄지도 않고 버린 담배꽁초에서는 가늘고 푸른 연기가 길게 피어올랐다. 허술한 차양막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바람이 불 때마다 시린 눈발이 안쪽까지 들이쳤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어느 순간 웬 노인 한 분이 의자를 끌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야당에 대한 욕을 쏟아내는 게 아닌가. 자신이 여당의 지구당 위원장이라면서.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도 불쾌했지만 지지율 16%(모닝컨설트 조사)의 대통령을 찬양하는 정신 나간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있는 것이지만 그가 나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해서 내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할 권리는 없지 않은가. 그는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인상을 쓰며 자리를 피하는 나를  쫓아오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중간중간 육두문자를 섞어가면서 말이다. 나보다 나이만 어리다면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하고 한마디 따끔하게 충고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뻘의 그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 중 16%에 해당하는 개, 돼지의 모습을 엊그제 직접 내 눈으로 목격하고 들었던 생각은 나는 앞으로 저렇게 늙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타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내 주장을 함부로 지껄여서도 안 되겠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본인이 싫다는 이유로 타인을 비방하고 16%의 국민이 마치 전체 국민인 양 포장하는 그런 미친 짓은 하지 말자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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