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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렸습니다.

첫눈입니다.  '처음'이 갖는 막연한 설레임으로 나는 그렇게 눈 내리는 풍경을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은 곧 '익숙함'으로 쉽게 변질될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눈이 시작되는 아득한 허공과 내 시선이 닿을 수 있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에 이르기까지, 마치 나는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목을 길게 늘인 채 한동안 하염없었습니다.  이편(현실)과 저편(과거)의 경계가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자'던 내 유년 시절의 막연한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허망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지켜질 수 없는 허망한 약속을 누군가에게 수도 없이 약속하며 빈 세월을 건너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떠오른 후회 한 모금을 쓴 커피와 함께 마셨습니다.  내가 지키지 못한 많은 약속들이 첫눈이 녹듯 누군가의 가슴으로부터 말끔히 지워지기를 간절히 바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월요일의 무게를 잠시 잊었던 듯합니다.

다들 말이 없었고, 침묵 속에서 각자의 추억들이 눈발처럼 나부꼈습니다.  세월은 결국 두려웠던 대상을, 달아나고 싶은 어떤 미래를 우리의 눈앞에 야멸차게 펼쳐놓곤 합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겨울이 성큼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말입니다.

 

첫눈이 내렸습니다. 

겨울을 맞이하는 통과의례처럼 2013년의 겨울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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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여린 마음을 위로하려는 듯 부드럽기 그지없는 비다.  나는 잠깐 산책을 했고, 속삭이는 빗소리를 들었고, 이따금씩 우산을 옆으로 젖힌 채 한두 방울의 비를 맞곤 했다.  겨울을 준비하는 모든 생명체의 바쁜 일상은 잿빛 어둠에 묻혀 가뭇하다.

 

아침에 처음으로 내복을 꺼내어 입었다.  사는 게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구나, 생각하며 맥없이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날씨이고, 기온인데 몸은 오슬오슬 추위를 탄다.  어렸을 때는 내복 입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었다.  요즘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몸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거나 유행을 좇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복을 입었을 때의 답답한 느낌이 싫었을 뿐이다.  예전에는 내복의 두께가 어찌나 두껍고 투박했던지...

 

수능 예비소집 때문인지 수업을 일찍 마친 아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저희들만의 언어로 조잘거린다.  이따금 들리는 웃음소리가 유난히 맑다.  은행나무 가로수의 노란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간다.  바람을 머금은 듯한 투명한 빛깔이다.  계절은 또 이렇게 말없이 지나가나 보다.

 

한 잔의 커피를 옆에 두고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대입 학력고사가 멀지 않았던, 딱 이맘 때쯤에 나는 이 책을 읽었었다.  나는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이나 <1984 >보다 르포 형식의 이 책을 더 좋아했었다.  나는 그때 생각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알았다.  나의 부모님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광산촌에서 살고 계셨다.

 

추억이란 때로 까닭도 없이 깊은 슬픔으로 빠져들게 한다.

내가 내복을 꺼내 입은 것도, 하루가 훌쩍 스러지는 것도, 피곤에 절은 후배의 얼굴도 괜스레 슬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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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여린 마음을 위로하려는 듯 부드럽기 그지없는 비다.  나는 잠깐 산책을 했고, 속삭이는 빗소리를 들었고, 이따금씩 우산을 옆으로 젖힌 채 한두 방울의 비를 맞곤 했다.  겨울을 준비하는 모든 생명체의 바쁜 일상은 잿빛 어둠에 묻혀 가뭇하다.

10월에 출간된 에세이를 둘러본다.  반가운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윤기, 이외수, 잭 캔필드, 안셀름 그륀 신부님...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책'이라는 단어가 있는 책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나도 모르게 스르르 끌리는 것이다.  저자의 이름에 '잭 캔필드'가 보인다.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다.  물론 다른 많은 작가들이 등장하지만, 나는 오직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의 저자인 잭 캔필드만 보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볼 수 있는 권리'가 내게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딱히 종교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안셀름 그륀 신부님을 사랑한다.  그의 따뜻함이 좋고, 밝고 투명한 그의 영혼이 좋다.  게다가 나는 한 때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던 그 순간에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책을 통하여 위로를 받았다.  <자기 자신 잘 대하기>를 비롯하여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머물지 말고 흘러라>, <삶을 배우는 작은 학교>, <노년의 기술> 등 신부님이 쓴 주옥같은 책들을 지금도 가끔 들춰보곤 한다.  나는 그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이윤기 작가를 다시 평가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의 산문집 <무지개와 프리즘>을 읽은 직후였다.  나는 이제껏 무릇 작가라고 통칭되는 사람들에게 가장 결여된 것은 '일관성'이라고 여겨왔었고, 내가 읽었던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것을 확인하곤 했었다.  작가에게 있어 '변신'이란 '문학적 재능', 또는 '창의성'으로 과대포장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작가들의 행태에 나는 얼마 간의 역겨움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나 이윤기 작가의 일관성과 뚜렷한 주관, 그리고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빼어난 글솜씨는 금세 나를 사로잡았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진면목을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나 노련한 작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세간에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작가를 평가한다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대담집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다.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던(때로는 드러내는 것을 꺼렸던) 자신의 생각들을 과감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이외수의 생각을 소설가 하창수와의 대담에서 얼마나 보여줄지 자못 궁금하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물의 가족>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의외성'이었다.  그것은 '독창성'과는 구별되는, 당돌함이나 특이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책을 읽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잊고 있었을 뿐이다.  에세이의 제목 또한 도발적이다.  삭발을 한 그의 얼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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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월드시리즈 1차전이 있었던 날입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익히 아시겠지만 보스턴 레드삭스가 세인트 루이스를 상대로 8대 1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제목에는 프리메라리가 소속의 유명 축구팀 써놓고 웬 야구 얘기냐구요?  아, 그렇군요. 제가 혹시 낚시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이 드신다면 읽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제가 여기에 쓰려는 얘기는 축구나 야구 얘기는 아니니까 말이죠.  다만 요즘의 제 관심사가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에 쏠려 있는 관계로 제목을 그렇게 정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뉴스는 보면 볼수록 짜증만 나는지라 뉴스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지낸 지가 반 년 이상은 되었고, 맘에 드는 드라마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히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도 없으니 관심은 주로 스프츠로 향하게 되더군요.  아무튼 따분한 시간이 지겹도록 오래 지속되는 듯하여 오늘은 낙서 삼아 소설 좀 써보려고 합니다.

 

#소설 1

 

프리메라리가 소속의 두 팀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결승에서 맞붙었습니다.  리오넬 메시를 필두로 네이마르, 이니에스타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한 바르셀로나는 위협적인 호날두와 카시야스, 사비, 벤제마 등이 포진된 레알 마드리드와 붙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하여, 바르셀로나의 감독은 불안한 마음에 심판을 매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매수된 심판은 경기를 바르셀로나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었고, 결국 바르셀로나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소설 2

이번에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이 불법적으로 심판을 매수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심판으로 내정된 사람들이 모두 바르셀로나 감독과 친분이 있거나 우호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심은 숫제 바로셀로나 팀과 한편이 되어 같이 뛰기까지 했습니다.  패스도 하고 태클도 하면서 말이죠.  바르셀로나 팀은 결국 열한 명이 아닌 열두 명이 뛴 셈이죠.  팽팽하게 진행되던 경기는 결국 바르셀로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경기를 지켜보았던 관중들은 당시에 뭔가 찜찜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질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약간의 의심도 희미해지는 듯하던 어느 날 바르셀로나 감독의 심판 매수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팀의 열성 팬들은 "심판을 매수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실력으로 이겼다."고 항변하는 감독을 적극 옹호했습니다.

 

소설 2에 대하여 바르셀로나의 감독은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실력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경기였다고만 주장하였죠.  그러므로 심판도 죄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박수를 칠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민주주의는 스포츠와 같이 룰이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지는 불안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의로운 법과 제도의 구축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죠.  그러나 완벽히 정의로운 제도는 아닐지라도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놓았던 룰이 지난 대선에서 깨졌다는 것을 스포츠 경기의 관중만도 못한 우리 국민들이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경기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법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실력으로 이겼다는 말만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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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는 일이 때로는 한심하고 역겨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컨대 오늘 같은 날이 그랬습니다.  잠깐 얼굴이나 보자는 전화에 '합석할 사람이 또 있느냐'고 묻지도 않은 채 '그러마'고 대답했던 것이 제 실수라면 실수였습니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30분쯤 운전을 하여 도착한 약속 장소는 무슨무슨 가든이라는 간판이 걸린, 그닥 마음이 내키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내게 전화를 했던 사람은 도착한 지 꽤 되었는지 고기를 굽는 불판은 검게 그을러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도 두어 개 놓여 있었습니다.  '이거 잘못 걸렸구나.'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를 두고 그냥 돌아설 수도 없어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마음은 영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대작을 하던 사람이 내게 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언젠가 지금과 같은 술좌석에서 몇 번 마주쳤는지 안면이 익은 듯도 하였습니다.  내가 술을 못한다는 것을 익히 아는 지인은 술을 권하지는 않았지만 앞에 앉았던 사람은 내게 한사코 술잔을 쥐어 주며 술을 따랐습니다.  받아만 놓으라면서.

 

삼겹살이 까맣게 타들어가도 두 사람은 도통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마지못해 나는 고기를 굽고 팔자에도 없는 술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습니다.  두 사람은 거나하게 술기운이 올랐는지 말도 되지 않는 주장으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지인의 고향이 경상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앞에서 대작하던 사람의 고향은 내 관심사도 아니었고 지역색으로 누군가를 경멸하거나 헐뜯는 사람을 인간 이하로 보는지라 그 사람이 전라도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술기운이 오른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침을 튀기며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다가 급기야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판에 박힌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사람들은 야비하기 이를 데 없다는 둥, 어디 사람은 뒤통수를 잘 친다는 둥, 어디 사람은 빨갱이라는 둥, 무식하다는 둥 그들의 주장은 하나같이 논리도, 근거도 없는 헛소리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과학적 근거나 논리를 들어 말하라고 몇 번이나 말하였지만, 그들의 뇌 어딘가에는 그들의 조상이나 어느 정치인 또는 일부 언론의 주장이 마이크로 칩으로 내장되어 있는지 앵무새처럼 같은 얘기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인조인간이나 로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결국 그들 둘만을 남겨둔 채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가겠다는 인사도 없이 말입니다.  어찌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허깨비에 불과한 놈들이었습니다.  그런 놈들을 만나기 위해 비싼 연료를 소모한 것도,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 같지도 않은 그런 놈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허깨비들이 비싼 밥을 먹고 있습디다.  아직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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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여름 2013-10-10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완전 싫죠...그런 상황이요 ㅠㅠ
휙 뒤로 던지고 잊어버리세요^^

꼼쥐 2013-10-11 14:0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돌아와서는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지우는 것으로 화풀이를 대신했죠. 그런 인간은 더 이상 만날 가치도 없는 그런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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