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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자본론 - 사람과 돈이 모이는 도시는 어떻게 디자인되는가
모종린 지음 / 다산3.0 / 2017년 11월
평점 :
골목길의 매력은 그 지역의 풍경과 무관치 않다. 골목길을 따라 꼬불꼬불 오르다 보면 마을의 끄트머리 언덕배기의 작은 공터가 나오거나 아카시아 몇 그루가 다인 작은 녹지가 나온다. 공터는 동네 조무래기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밤이면 동네 언니 오빠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했다. 골목과 골목이 갈리는 교차점에는 밤이 이슥하도록 불이 훤하게 밝았던 구멍가게가 있었고, 신 김치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 동네 아저씨들이 있었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골목길엔 집집마다 어른 어깨 높이의 작은 창들이 나 있었고, 창을 통과한 백열전구의 희끄무레한 불빛이 늦게 퇴근하는 어느 집 여식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먼 옛날도 아니다. 얼큰하게 취한 남자와 당장의 생활비가 궁한 여자의 날선 목소리가 부딪히고, 아이를 나무라는 어느 집 젊은 엄마의 새된 음성과 걸음아 나 살려라 내달리는 꼬마의 발자국 소리, 그 왁자했던 골목길의 소음이 당장이라도 들려올 듯하다. 8,90년대만 하더라도 이런 풍경은 서울의 변두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는 신기한 눈으로,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은 아득한 그리움으로 골목길을 대하고 있다.
"건축가 유현준은 소비자들이 골목 안의 상업시설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골목길의 밀도와 우연성으로 설명한다. 인위적이고 정형화된 쇼핑센터와 달리 골목의 구조는 여러 형태의 가게를 품을 수 있다. 저마다의 취향대로 가게를 꾸밀 수 있고, 1층뿐 아니라 지하까지도 다양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골목길 구조의 다양성과 밀도로 인해 우리는 우연한 볼거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골목과 새로운 가게들이 열린다. 층별 입점 브랜드 안내서 한 장이면 모든 것이 한눈에 파악되는 쇼핑몰이나 백화점과 달리, 미로처럼 얽혀 있는 골목의 구석구석은 우리를 예상치 못한 즐거움의 세계로 안내한다." (p.23~p.24)
모종린 교수의 <골목길 자본론>은 경제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골목길의 잠재가치를 논하는 좋은 책이다.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경제학 서적의 면모는 크게 보이지 않고 경제학 관련 수필집쯤으로 읽힌다. 최근에 핫플레이스로 부상한 부산 보수동 헌책방거리, 대구 방천시장 김광석 거리, 서울 문래동 철강문화거리, 서울 이화동 벽화마을 등에 주목하면서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의 소중한 골목문화를 지켜내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1장 왜 골목길에 사람이 모이는가, 2장 사랑받는 도시에 없어서는 안 될 것, 3장 골목상권 경쟁력 확보를 위한 물리적 조건, 4장 골목을 골목답게 만드는 정체성과 문화, 5장 장인 정신과 기업가 정신, 6장 젠트리피케이션의 신화와 대안, 7장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골목길 정책 등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C-READI 모델로 지칭되는 골목상권 활성화 정책이 그것이다. 문화자원(culture), 임대료(rent),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접근성(access), 도시 디자인(design), 정체성(identity)이 잘 갖추어져야만 골목상권이 성공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발전한 골목상권은 공통적으로 뛰어난 창업자(E)가 접근성(A)이 좋고 골목 자원(D)과 문화 자원(C)이 풍부하지만 임대료(R)가 싼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창업하고, 이를 본 다른 창업자가 주변에서 새로 가게를 열어 지역만의 정체성이 뚜렷한 하나의 상권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p.330)
내가 대학에 다니던 과거에 친하게 알고 지내던 외국인이 한 명 있었다. 그 당시 서울 중심부의 유명 외국어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그는 옥수동의 허름한 주택의 단칸방을 얻어 세 들어 살았다. 그의 한 달 수입을 생각할 때 무척이나 검소한 모습이었다. 어느 주말 저녁, 금호역 근처의 시장통에서 그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나는 그가 그곳에 사는 이유를 슬쩍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옥수동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면 건강에도 좋고 무엇보다도 서울 시내의 야경을 매일 밤 감상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사는 데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 그에 더하여 임대료까지 저렴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 그가 살던 옥수동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자 그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몹시 서운해 했었다. 가파른 계단과 올망졸망한 집들이 늘어선 정다운 풍경을 더는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가 자신이 태어난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까지 옥수동의 낡은 집들과 오래된 계단은 주민들만 떠난 채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서울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옥수동의 아름다운 풍경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한들 다시 살 수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모두 없애버리지 못해 안달을 하는지 한국인들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었다.
"이제 우리의 골목길은 미래 인재와 여행자를 두고 세계의 다른 골목길과 경쟁한다. 계속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골목문화의 생산자인 창조적인 문화예술인과 지역사업가를 불러 모아야 하고, 골목문화의 소비자인 여행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p.387)
산업화를 거치면서 서울로, 서울로만 몰려들었던 까닭에 수도 서울의 주택 정책은 그야말로 개발 일변도의 정책을 지속해 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 될 수도 있었던 역사의 흔적들이 대부분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난개발과 투기 광풍의 회오리가 이제는 좀 잠잠해졌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우리의 지난 날을 반성하면서 미래의 청사진을 새로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골목뿐만 아니라 옛것에 대한 가치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시간의 가치보다 편리의 가치만 강조했던 우리의 무지가 조금쯤 부끄러워지는 오늘, 모종린 교수의 <골목길 자본론>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