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 위태로운 정신과의사의 행복한 산티아고 피신기
김진세 지음 / 이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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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무작정 걷고보는 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나의 오래된 일상이다. 학창시절부터 지켜온 워낙 오래된 습관인지라 뇌가 명령하거나 의무적인 사명감으로 움직여지는 게 아니라 으레 그렇게 하는 것으로 몸은 기억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매년 연초의 신년 계획에 남들 다 하는 '운동하기'를 목록에서 뺄 수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진다. 사실 제 몸을 위하는 일인데 굳이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부러움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찬하는 '걷기'에 대하여 곰곰 생각해보는 경우는 더러 있다. 그렇다고 걷는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무의미한 열광 대열에 무작정 동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이따금 들춰보며 맘에 드는 구절을 소리 내 읽어보는 게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괴로움의 씨앗이 아니라 자기변신, 자기 버림의 요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길과 몸을 한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여기서 인간과 길은 행복하고도 까다로운 혼례를 올리며 하나가 된다.'('걷기 예찬' 중에서)

 

정신과의사 김진세의 산티아고 순례기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는 저자가 찍은 사진과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때 그때의 순간적인 감성과 스치는 생각들을 메모식으로 기록한 일반적인 산티아고 순례기와는 조금 다른 책이다. 사진도 없을 뿐만 아니라(아주 없는 건 아니고 책의 맨뒤에 부록처럼 묶였다) 생각의 편린들을 쥐어짜듯 그러모은 듯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그러했다.

 

"삶은 음미하는 것이다. 급하게 보내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리는 삶, 비록 지긋지긋한 삶이라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고 싶은 것이지, 실제로 인생이 빨리 흘러가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인생을 즐기려면, 마치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참맛을 느끼듯, 천천히 살아가야 한다." (p31)

 

정신과의사로서 저자는 서울에서 환자를 많이 보기로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평일 진료는 말할 것도 없고 주말이나 야간 진료도 마다하지 않는 저자가 수백 편의 정신의학 칼럼과 인간 심리에 대한 단행본만 여덟 권, 방송 출연과 강연까지. 그야말로 저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남들 두 배, 세 배 몫의 일을 하면서도 거뜬했던 그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일상이 무너지고 상담조차 귀찮은 일이 되더니 급기야 환자에게 짜증을 내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결국 그는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있던 '산티아고 길 순례'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단순히 버킷리스트로만 간직할 줄 알았던 일을 실행에 옮긴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을 터, 가뜩이나 정신과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에서는 더더욱.

 

"누구나 상실을 겪는다. 아버지를 잃은 야스퍼도, 동생을 잃은 라우라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살다보면 어느 날, 한 번 이상의 상실을 마주해야 한다.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이다.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상실은 역설적으로 축복이다. 우리는 상실을 통해서 커다란 아픔을 맛보지만, 그 아픔이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삶은 그렇게 상실을 통해 깊어진다." (p.232)

 

무작정 걷다 보면 생각이 없어지거나 반대로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 온다. '걷기'라는 단순한 반복운동이 주는 효과일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아주 먼 거리를 걷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하나의 생각에 몰두하여 아주 깊이 빠져드는 일도 더없이 즐겁다. 사는 게 걷는 것만큼이나 단조로웠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처음에는 낯선 길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다른 지구별의 낯선 지점에 서 있었다. 걷다보니 그 길이 친근해졌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렵다. 그 두려움 속에서 내게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는 나말고도, 커다란 나무를 꺾을 만큼 거친 바람도 있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은혜를 갚은 사울도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펼쳐지는 기적을 주관하는 '존재'가 있다. 사람과 자연, 그리고 '존재'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기적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좀더 신중하고 진지히게 인생을 살자.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 별똥별이 떨어진다." (p.333)

 

나이가 들수록 삶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기고 좀더 초연해질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비단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걸 경험이나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되기 때문이다. 상실의 고통도, 경제적 어려움도, 인간관계의 복잡한 얽힘도 언젠가는 다 지나가게 마련이고, 현실에서 바라보는 과거는 누구에게나 아릿한 그리움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된다. 우리가 순례길에 매료되는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인생에서 겪는 보편적인 경험들을 그 길에서 압축적으로 맛볼 수 있고, 그런 고통들을 나만 겪었던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 절망과 기쁨, 기대와 한탄 등이 지금 당장은 나로 하여금 울고 웃게 하지만 시간의 저편으로 밀려나는 순간, 흐릿한 기억으로 변질되어 내게서 점차 멀어진다는 걸 수많은 만남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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