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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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삼복더위가 한창인 요즘, 더위 얘기를 다시 또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더위를 즐기라고까지 한다면 시원하기는커녕 더 더워지려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사는 많은 날들 중에 더위라는 달갑지 않은 짐이 여름 내내 얹혀진다고 느끼는 것과 내가 사는 많은 날들 중에 단지 더운 하루하루를 체험하면서 여름이라는 계절을 보낸다고 느끼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새로운 하루를 체험하려고 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더운 날씨네, 라고 생각하면 더위는 한층 가볍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습하고 더운 하루일지언정 제법 소중한 시간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말이다.

 

하루의 날씨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드는 것처럼 소설을 읽을 때도 나는 작가의 성향을 살펴보곤 한다.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고 계획함으로써 이러이러한 인생을 살았다고 쓰는, 다소 관념에 치우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주인공이 하루하루를 이러이러하게 살았더니 이러이러한 인생이 되었다고 쓰는, 체험을 중시하는 작가가 있게 마련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체험을 중시하는 작가가 눈에 띄게 좋아진다. 인생은 결국 계획하여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남은 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의 문제만 남는다. 인생 전체가 어떤 모습으로 완결되는가 하는 문제는 관심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어떤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듯 보인다. 주인공의 일상을 작가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처럼 주인공의 하루하루를 꼼꼼히 기록하다 보니 결국 이런 소설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소설의 구성과 테마를 미리 계획하고 그에 따라서 주인공의 세부 일정을 기록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벌려 놓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체험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최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도 작가의 기존 성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자니 주인공인 '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냄새를 맡으며,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음식을 먹느냐의 문제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나'의 시선에 들어온 상대방의 표정이나 입고 있는 옷, 그(또는 그녀)가 타고 온 자동차, 신발 등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하나의 것들이 모두 중요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 이런 식으로 써나가다 보면 소설은 무한대로 길어질 수도 있지만 작가에 의해 적당한 선에서 멈춰진다. 그것은 곧 주인공의 체험인 동시에 작가의 체험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책을 읽는 독자의 경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독자 또한 주인공의 체험을 고스란히 전달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을 중시하는 독자나 비평가의 눈에 비친 하루키의 소설은 가볍거나 경박하고, 대중적이거나 상업적이며, 때로는 지루할 수도 있다. 매일매일 바뀌는 디테일한 일상에 주목하지 않으면 그날이 그날 같은 반복되는 일상으로 여겨질 테니까 말이다.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드러난다." (p.94~p.95)

 

당연한 일이지만 하루키 소설에서 주인공의 모든 감각은 생생히 살아 있다. 경험의 축적은 결국 감각으로 인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입었던 상대방의 옷은 밋밋한 면바지가 아니라 연녹색 치노 바지이거나 크림색 티셔츠여야 하고, 그가 마시는 술은 싱글몰트 위스키처럼 구체적이어야 하며, 그가 타는 차는 은색 재규어처럼 특정한 차여야 하고, 아침은 토스트 세 쪽과 계란 두 개를 먹어야 하며, 연인과의 정사 순간처럼 느낌 하나하나가 생생히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가가 쓰는 소설은 살아 있는 장면 하나하나의 결합일 뿐이다. 소설이 주는 메시지나 소설의 구성 등 소설 전체를 갖고 평한다는 게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저 순간순간의 경험으로 소설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에게 누군가의 1년 치 일기를 읽고 주제를 말해보라면 그처럼 난감한 일이 또 있을까.

 

"숲의 정적 속에는 시간이 지나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려올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가고 다른 사람이 온다. 한 생각이 가고 다른 생각이 온다. 한 형상이 가고 다른 형상이 온다. 나 자신조차 반복되는 나날 속에서 조금씩 무너졌다가 재생된다. 무엇 하나 같은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은 상실된다. 시간은 내 등뒤에서 조금씩 죽은 모래가 되어 무너지고 사라진다. 나는 그 구덩이 앞에 앉아 시간이 죽어가는 소리에 마냥 귀를 기울였다." (p.369)

 

<기사단장 죽이기> 또한 스토리는 별게 없다. 30대 중반의 초상화가인 '나'는 아내에게 갑자기 결별을 통보받는다. 어떤 이유나 사전 통고도 없이 벌어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아내의 결정이 부당하다면서 따지거나 화를 내거나 아내가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운 구체적인 이유를 캐묻지 않는다. '나'는 무언가를 납득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세상을 살기 위한 열원(熱源)이나 반짝이는 의지 같은 게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간단한 생활용품을 챙겨서 집을 나온다. 차를 몰고 정처 없이 떠돌던 '나'는 대학 동기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권유로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의 거처에 정착한다. 그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는 일본화로 명성이 자자한 유명화가였지만 나이가 들고 치매가 심해져 요양원에 입원중이다. 도모히코의 거처이자 작업실이었던 그 집에서 '나'는 우연한 기회로 고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고, 초상화의 의뢰인이었던 멘시키와 얽혀들게 되면서 다양한 경험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우리 인생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왕왕 있다는 말이죠. 그 경계선은 꼭 쉬지 않고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날 기분에 따라 멋대로 이동하는 국경선처럼요. 그 움직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신이 지금 어느 쪽에 있는지 알 수 없어지니까요. 아까 제가 더이상 구덩이에 머무르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건 그런 뜻입니다." (p.340)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관념을 오가며 진행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소설은 감각이나 체험을 위주로 쓴 소설이다. 그러므로 갑자기 혼자가 된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가장 관심있어 할 대상 또한 자신의 성적 욕망을 해결하기 위한 여성일 것이라고 작가는 단정한다. 자주 있었던 것은 아닐지라도 주인공인 '나'의 성적 체험이 자주 언급되는 것도 그 당시의 '나'에게 그때의 체험이 머릿속에 깊이 남아서일 테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가인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각이 중요하겠지만 보여지는 어떤 것들은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곤 하지만 흔한 풍경처럼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키 문학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는 음식이나 음악 또한 이 소설의 스토리 전개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생학하면서 읽는 것도 재미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내 길인 줄 알고 별생각 없이 걸어왔던 길이 갑자기 발밑에서 쑥 사라져버리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허허벌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런 느낌이야." (p.556)

 

이 소설은 1권과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의 리뷰에서 스토리나 인물을 다루지 않았던 까닭도 그런 이유이다. 소설의 인물이나 구성, 스토리 등을 논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2권까지 다 읽은 상황이지만 글의 분량도 나눌 필요가 있고, 내용도 구분할 필요가 있기에 1권의 리뷰에 있어서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구성, 글의 전개 등에 대해서는 가급적 쓰지 않을 작정이다. 2권의 리뷰를 위해 남겨두는 측면도 있다. 오늘도 꽤나 더운 하루였다. 작가가 1권에서 던진 한마디의 말을 화두 삼아 곰곰 생각해보는 저녁이 되길 바라는 의미에서 주인공이 했던 말을 인용해 본다. '진실이 때때로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고독을 가져오는지.' 무엇인가 깊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한참 동안 집중하다 보면 더위도 잊고 스르르 잠이 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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