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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노블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평점 :
이야기의 결말부터 시작하는 소설은 대체로 비장한 느낌이 든다. 죽음이나 이별 등 암울한 결말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스토리의 전개가 밝고 명랑하거나 로맨틱한 분위기로 펼쳐지더라도 부디 애잔한 느낌으로 읽어달라는 작가의 암묵적인 주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에서도 마음 놓고 웃을 수가 없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스미노 요루의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도 주인공의 여자친구인 사쿠라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소설의 세계에 파묻혀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과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인 사쿠라. 명랑 쾌활한 성격의 사쿠라는 자신의 삶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소견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의 소중한 경험들을 '공병문고'라는 제목의 일기장에 기록하고 있다. 나서기 싫어하고 방관자의 삶을 고수하는 주인공은 맹장수술 치료를 위해 갔던 병원의 대기실에서 '공병문고'를 발견하였고, 책인 줄 알고 펼쳐보았던 사쿠라의 일기에서 그녀가 췌장의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내용의 기록을 읽게 된다. 남겨진 삶을 평범한 일상으로 채우고 싶었던 사쿠라는 자신의 병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밝히지 않았었는데 같은 반의 친구인 주인공에게 우연찮게 들키고 만 셈이었다. 그 비밀을 매개로 주인공은 사쿠라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깨달았다. 모든 인간이 언젠가 죽을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나도, 범인에게 살해된 피해자도, 그녀도. 어제는 살아 있었다. 죽을 것 같은 모습 따위, 내보이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 아, 그렇구나. 그게 바로 어떤 사람이든 오늘 하루의 가치는 모두 다 똑같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p.80)
주인공인 '나'와 사쿠라는 도서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학생과 커플들만 우글거리는 '스위트 뷔페'에서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1박2일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것은 사쿠라의 버킷 리스트이기도 했다. '남자친구와 여행하기', 돈코츠 라면을 본고장에 찾아가서 먹기' 등의 버킷 리스트를 실행하며 사쿠라는 이따금 '공병문고'를 기록하곤 했다.
"만일 그녀가 일 년 뒤에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그녀와 식사할 일도 여행할 일도, 집에 가서 어색한 상황을 만들 일도 없었다. 그녀의 죽음이 우리를 이어주었다. 하지만 죽음 따위,누구에게라도 찾아올 운명이다. 그러니까 나와 그녀가 만난 것은 우연일 뿐이다. 우리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은 우연일 뿐이다. 의지나 감정에 따른 순수성이 나에게는 전혀 없었다." (p.191)
사쿠라와의 만남이 길어지면서 주인공인 '나'의 마음도 조금씩 바뀌어간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2주간의 보충수업이 끝나면 사쿠라의 절친인 교코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자고 약속을 한다. 교코는 사쿠라의 병을 알지 못했다. 교코는 사쿠라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병 때문에 서로의 행복한 일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사쿠라는 자신의 병을 일체 비밀로 유지했다. 그러나 보충수업이 시작되던 월요일,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쿠라가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이따금 병문안을 다녀오면서 사쿠라가 자신에게 무엇인가 숨기는 게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녀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응시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겁쟁이다. 알아버렸다. 나는, 아직 그녀가 죽는다는 것을 어디선가 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p.221)
자신의 병세를 체감한 탓인지 사쿠라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녀의 죽음이 1년쯤 남았으려니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했던 '나'는 꽁꽁 닫혀 있던 가슴을 조금씩 열어보인다. 내가 병문안을 갔던 어느 날, 그녀와 갔던 1박2일 여행에서 했던 '진실 혹은 도전' 게임을 다시 하게 된다. 나는 게임에서 이겼고 그녀에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 혼자서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누군가는 싫어하는 나, 누군가와 함께하면 즐거운데 누군가와 함께하면 짜증난다고 생각하는 나, 그런 사람들과 나의 관계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산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내 마음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있기 때문이고, 내 몸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잡아주기 때문이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는 지금 살아있어. 아직 이곳에 살아있어. 그래서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어. 나 스스로 선택해서 나도 지금 이곳에 살아있는 것처럼." (p.222)
2주 동안 입원하기로 했던 사쿠라는 그 기간이 다시 연장되었고 방학이 끝날 무렵쯤 퇴원했다. 퇴원 후 그녀를 만나기로 했던 약속 장소에 그녀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이 다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황순원의 <소나기>와도 비슷한 내용과 분위기인 이 소설은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장의 카드를 소설의 후반부에 배치해 두고 있다. 공감력이 떨어지는 나조차도 울컥했을 정도이니 내 말을 100%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 유명한 영화 '러브 스토리'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점점 감수성이 떨어지거나 심한 스트레스로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는 멜로물 만한 게 없다.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채 적당히 감동하고, 적당히 훌쩍거리다 보면 세상은 다시 장밋빛으로 보이게 된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건 만족한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일 테니까.
(오탈자)왁왁거리는 교코과는 달리 그녀는 태연히 하품을 하고 있었다. -->왁왁거리는 교코와는 달리 그녀는 태연히 하품을 하고 있었다.(p.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