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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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행복한 이 순간이 손을 벗어난 사기그릇처럼 어느 순간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는 경험을 두어 번 겪고 나면 현실을 너무 가까이서 바라본다는 게 상당히 위험한 일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내 의식과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는 언젠가 나의 현실이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염려를 잠재우는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이다. 마치 지금의 이 행복이 현실이 아닌 꿈 속에서의 벌어진 일인 양, 몽롱한 의식에서 비롯된 영상 속 이미지인 양 받아들이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을 오롯이 행복한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불행한 현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볼 수 있는 배짱 두둑한 사람의 용기와 그것에 대한 대가일 뿐이다.

 

흔히 '오늘을 즐기라'고 번역되는 라틴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할 때가 있다. 말은 더없이 쉽지만 말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요만치도 끌어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일지도 모른다.

 

"생이 나를 부르면 그것이 공평하든 그렇지 않든, 예, 하고 큰소리로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좋아하는 선생이 부르든 싫어하는 선생이 부르든, 출석 시간에 대답했던 학창 시절처럼 생이 부르거든 큰 소리로 예,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는 그렇게 겨울을 걸어가고 있다. 그것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의 부름에 대답하고 나서 혹시 오는 봄을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언젠가 기습하고야 마는 봄 앞에서 내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혹시라도 행, 복 같은 게 온다면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아아, 거기에는 도구가 필요할 것이었다." (p.41)

 

공지영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일부러 작정한 것도 아닌데 문장과 문장 사이의 뿌연 여백에서 작가 자신의 순탄치 않은 인생이 창틀의 먼지처럼 묻어나곤 한다. 삶의 한쪽 끝이 쩍쩍 갈라질 때마다 모가 난 자신의 삶을 뭇사람의 시선에도 무뎌져 원만해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뭔가 도구가 필요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은 모가 난 자신의 삶을 고운 사포를 이용하여 단단한 돌을 연마하는 것만큼이나 지난한 일이었을 것이다. 미처 무뎌지지 않은 삶의 조각들은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을 테니 말이다.

 

공지영의 소설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어떤 도구로서 쓰여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이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단편 '월춘 장구(越春裝具)'에서의 장구로서의 기능 말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자신의 삶을 견디기 위한 작가만의 장구, 일종의 '월생 장구(越生裝具)'인 셈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빗대어 쓴 어른들을 위한 동화쯤으로 읽힌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가진 게 돈밖에 없는' 할머니의 외손녀이다. 식도암에 걸린 할머니는 생과 사의 고비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목숨을 대가로 삶을 유지한다. 처음에는 막내 외삼촌이, 파출부 아줌마가, 큰외숙모가 줄줄이 죽어나간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새로운 생명을 얻고 보란 듯이 생명을 이어간다. 할머니로부터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나'에게로 뻗어왔을 때 '나'는 강하게 저항한다. 청각장애인인 '나'의 여동생을 앗아가려 했을 때도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한다. 그러자 진돗개가, 도둑고양이가, 까치가 줄줄이 죽어나간다. 할머니는 자신보다 약한 생명을 대가로 당신의 삶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다.

 

이 밖에도 책에는 출생의 비밀을 소설로 쓴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지방의 공장을 전전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도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 순례의 희망가를 그린 '부활 무렵', 개개인의 삶에 드러나는 고통을 통해 공감과 연대를 모색하한다는 내용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 등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소설가는 오히려 자신이 쓴 소설에서의 상황이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여겨질런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독자의 기억에 오래 남는 소설은 작가가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상황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재현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선뜻 나설 수 없는 길일지라도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는 담대하게 걷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설을 읽고 용기를 얻은 독자는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더욱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현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비겁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닐까 싶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과 현실 사이의 필터를 제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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