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에 하자
이광재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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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리'를 아시는지. 지금처럼 노래방이 성하기 전에는 흔히 쓰던 말입니다. 사회생활 경험이 많지 않았던 전업주부라면 그 시대를 살았다 할지라도 혹 모를 수 있습니다만 은밀한 로비나 흥청망청한 사내 회식이 빈번했던 그 당시의 술문화에서 '오부리'를 모른다는 건 간첩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공산이 컸습니다. '오부리'는 한마디로 악보 없이 즉석에서 하는 반주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탈리아어 '오블리가토(obbligato)가 일본어 '오부리'로, 이것이 다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고 하는데, 본디 이 말은 '꼭 해야 되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의 의미로 쓰인다고 합니다. 음악용어로 치자면 '피아노 또는 관현악 따위의 반주가 있는 독창곡에 독주적 성격을 가진 다른 악기를 곁들이는 연주법', '꼭 연주해야 하는 악기 선율'을 뜻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즉석 반주'의 의미로 전환되어 일반인들조차 '오부리, 오부리' 하게 되었는지 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8,90년대의 유흥주점이나 예식장, 또는 '가라오케'에서의 '오부리 밴드'는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취객의 흥을 돋구고 좌중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오부리 밴드'의 역할은 지대했습니다. 너무 취해서 박자와 리듬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부르는 취객의 노래에 반주를 적당히 맞춰주고 그들의 기분을 살려주는 일은 오직 '오부리 밴드'의 몫이엇던 것입니다. 연주자들은 그 대가로 팁을 받곤 했는데 그것이 그들의 주 수입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이어지던 시절, 내가 세들어 살던 집의 주인집 아들 중 한 명도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에서 밴드부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오부리 밴드'로 활동했습니다. 그들의 직업 득성상 낮에는 자고 주로 밤에만 활동하는지라 그의 얼굴에는 늘 피곤이 묻어 있었고,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못하는 탓에 아침에 귀가하는 그의 걸음은 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언제나 퇴근길에 동행하는 술집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여자친구가 어찌나 자주 바뀌던지 여자분의 성을 본인도 헷갈리곤 했지만 말입니다.

 

이광재의 <수요일에 하자>는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입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음악을 멀리 햇던 사람들, 그러나 음악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던 그들 여섯 명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입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인물들입니다. 세월호 사건을 노래로 만든 고등학생 아들을 둔 학구파 기타리스트 리콰자, 대장에 생긴 암세포를 제거하고 딸과 함께 '젓가락 행진곡'을 치는 맨발의 키보디스트 라피노, '누런 액체'를 지리는 치매 걸린 노모를 돌보는 철부지 아들 기타리스트 니키타, 3개월차 노가다 잡부 긴 머리 베이시스트 배이수, 빚쟁이에게 쫓겨 다니며 위장 이혼을 한 드러머 박태동, 더 잃을 게 없는 전직 텐프로 보컬 김미선, 이들이 7080 라이브클럽 '낙원'에서 다시 뭉쳤습니다.

 

"배베이스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라피노에게 옮겨갔다. "나는 수요일에 하자. 아무 이유 없어. 우리 연습 날이 수요일이잖아. 그리고 직장인들에겐 수요일이 일주일의 고비 같은 날이거든. 월화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하는데 주말까진 좀 버텨야 하는. 그러니까 수요일엔 뭐든 하자 이거야. 섹스든 술이든 음악이든……." 배베이스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네. 수요 밴드라고 줄여 부르기도 편하고." 그러자 니키타가 배베이스를 향해 고개를 세웠다." (p.121)

 

배이수가 세들어 살고 있는 '낙원'은 월세가 밀려 보증금마저 다 털어먹을 지경이었고, 전기 요금이 연체돼 단전 통보를 받은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라고 나을 리 없었습니다. 채권단을 피해다니는 도망자의 신세이거나, 휴대폰 요금을 내지 못해 전화가 끊겼거나, 박물관에나 가 있을 차를 여전히 끌고 다니는 등 그들에게 미래는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음악을 시작한 그들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했고 당장 죽을 만큼 고통스럽던 고민도 음악의 열기 속에서 깨끗이 녹여 버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율도 해수욕장의 무대를 향해 본격적인 연습에 매진하는 수요 밴드 멤버 여섯 명에게 더이상 두려움은 없는 듯했습니다.

 

"어제와 다를 게 없는 해가 내일 또 떠오른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러나 쉴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 없는 내일이 돌촐되는 건 아니잖은가. 니키타의 기타 소리가 달라지고, 배베이스의 어머니가 율도를 찾아 그들의 연주를 지켜보고, 라피노의 몸에 비늘이 돋던 어제가 그들에게는 존재햇던 것이다. 지금도 그날의 느낌이 몸에 소름을 일으키는데 어찌 오늘이 어제와 같단 말인가. 설령 오늘과 다를 게 없는 태양이 내일 다시 떠오를지라도 지금은 지금이었다." (p.270)

 

자신에게 떨어진 고민을 끌어 안고 끙끙 앓는다고 해서 그 고민이 쉽게 해결될 리도 없을 뿐더러 모른 척 눈을 감는다고 해서 조막만 하던 고민이 눈덩이처럼 부풀 리도 없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민을 뒤로 한 채 제 할 일을 즐겁게 찾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신을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람입니다. 가까이에서 나를 다독여줄 수 있는 사람, 내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면 언제든지 달려와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지금의 시름을 잊게 하는 강한 진통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라 없는 나라>를 써서 혼불문학상을 받았던 이광재 소설가가 이번에 내놓은 <수요일에 하자>는 미래가 없는 '수요 밴드' 멤버들의 찌질한 일상을 그렸다기보다 그런 상황을 이겨내는 '그럼에도의 일상'을 이 한 권의 책에 담았다고 말해야 할 듯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삶이 힘든 게 아니라 사라져가는 열정에 목말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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