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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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소한 추위는 꿔다가도 한다'거나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소한에는 어김없이 추위가 닥친다고 전해져 온다. 그러나 이번 겨울은 어찌된 노릇인지 소한 추위는 고사하고 한낮 기온이 영상 10도를 상회하는 봄날씨만 연일 계속되고 있다. 난방비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으니 지갑이 얇은 서민들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을 테지만 겨울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겨울 한 철 장사인 스키장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오늘도 한낮 기온이 영상 10도까지 오르고 화창한 날씨에 햇빛마저 따사로워서인지 주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를 읽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를 비롯하여 작가가 쓴 에세이 29편이 실려 있다. 생각해 보면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면서 살고 있다. 누군가는 기록의 목적으로, 다른 누군가는 치유의 목적으로, 또는 알림의 목적으로... 글을 쓰는 목적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이따금 시간을 때우기 위한 방편으로 글을 쓰기도 하고 그렇게 썼던 글이 운 좋게도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각각의 글은 한마디로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꼈다.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삶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주제,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과 간디 등에 대한 인물평을 통하여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로서의 조지 오웰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 문명화되어 명백한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종종 싸워야만 하고, 싸우자면 자신을 더럽혀야 한다." (p.137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본다' 중에서)

 

작가든 연극인이든 간에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남기 위해 종종 싸워야만 했나 보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계 종사자들 만여 명을 리스트로 작성하여 정부의 지원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았나.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보도되는 뉴스를 보면 점점 사실로 굳어지고 있는 듯하다.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대에도 차별과 불공정은 여전히 존재했었나 보다. '애국주의는 보수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은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들이 명심해야 하는 말이다.

 

"그날 밤 꿈을 통해 내가 알게 된 것은, 중산층에게 주입되어온 애국주의가 마침내 효과를 본다는 것이었으며, 영국이 심각한 궁지에 빠지면 나로서는 애국주의에 반기를 드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단, 여기서 오해는 없도록 하자. 애국주의는 보수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애국주의는 변하고 있되 신비롭게도 똑같이 느껴지는 무엇에 대한 헌신이다. 이를테면 백군 출신으로 볼셰비키가 된 사람의 러시아에 대한 헌신 같은 것이다. 체임벌린의 영국에 충성하는 동시에 내일의 영국에 충성한다는 건, 그것이 일상적인 현상임을 모른다면 불가능해 보일지 모른다." (p.85 '좌든 우든 나의 조국' 중에서)

 

오랜 세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생계를 꾸려간 조지 오웰이 서평자의 입장을 글로 쓴 부분은 인상 깊었다. 생계를 위해 서평을 써온 것은 아니지만 나도 이따금 책을 읽고 블로그에 서평을 남기는지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밀려드는 책을 다 읽지도 못하고 마감 기한에 맞춰 의례적인 서평을 쓸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고백하면서 과도하게 많은 서평을 쓰는 것이 '사기'라고 외치는 작가의 단호한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아무리 지겨워한다 해도 서평자는 책에 대한 관심이 각별한 사람이며, 매년 수천 권씩 쏟아지는 책 중에 쉰 권이나 백 권쯤에 대해서는 기꺼이 서평을 쓰고 싶어 한다. 업계 최고 수준인 사람이라면 열 권에서 스무 권 정도를 택할 것이며, 두세 권만 꼽을 수도 있다. 그 나머지 일은 아무리 양심적으로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본질적으로 사기다. 그는 자신의 불멸의 영혼을 하수구로, 그것도 한 번에 반 파인트씩 흘려보내는 셈이다." (p.286 '어느 서평자의 고백' 중에서)

 

저녁이 되었는데도 기온은 크게 떨어지지 않고 포근하다. 사는 게 이렇게 포근한 겨울날씨처럼 늘 안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가가 되기 위해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고 노숙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던 조지 오웰의 작가정신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의 안일하고 나약한 심성에 경종을 울리는 바가 크지만 삶을 꾸려가기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잘 쓴 글은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가 보다. 조지 오웰이 밝힌 글을 쓰는 이유는 덧붙이는 글로 남겨 둔다.

 

P.S

1.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2.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3.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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