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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의 탐닉 - 김혜리가 만난 크리에이티브 리더 22인 ㅣ 김혜리가 만난 사람 2
김혜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마음에 녹아 있던 짜증이나 분노가 고스란히 내비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두껍게 눌어붙은 누룽지처럼 그 모양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런 날이면 누구보다도 제가 먼저 실망하곤 합니다. 삶이란 제 느낌이나 감정을 분풀이 하듯 풀어놓으며 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참으면 될 일을 괜한 감정의 표출로 그 시간만큼 헛살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입니다. 제살깎기인 셈이지요. 게다가 제 짜증을 받아내는 사람은 언제나 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으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지요. 믿음이란 그럴 때 쓰라고 존재하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우연히 손에 잡은 책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던 하루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오전 내내 짜증을 냈던 것을 감안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무난한 하루였던 것입니다.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연재된 '김혜리가 만난 사람 시즌 2'에서 22명과의 인터뷰를 엮은『 진심의 탐닉』은 꽤나 읽을 게 많은 책이었습니다. 책에는 소설가 김연수를 비롯하여 김제동, 김태호, 정우성, 정성일, 김명민, 신형철, 유시민, 김헤자, 김동호, 류승범, 김경주, 신경민, 방은진, 정영목, 하정우, 고현정, 정두홍, 정재승, 최규석, 김미화, 장한나 등 22명의 인터뷰이가 등장합니다. 물론 이 책이 출판된 게 2010년이니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도 그만큼 나이를 먹고 그동안 작든 크든 많은 변화를 겪었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책이 때로는 읽는 시간을 아껴주기도 합니다. 그닥 관심이 없는 인터뷰이마저 꼼꼼히 다 읽어야 할 의무는 독자에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의 생명은 전적으로 인터뷰를 담당하는 인터뷰어에게 달려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좋은 인터뷰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간의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그와 더불어 인터뷰어의 시의 적절하고 날카로운 질문이 없다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인터뷰는 나오지 않겠지요.
"사람을 들여다볼 줄 안다고 생각하는 표가 나요. 상대를 신뢰할 수 잇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있나요?
어렸을 때는 상대를 믿을 수 있는지 여부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나 결혼하고 얼마 뒤부터는 필요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상대를 신뢰할 수 있느냐를 판단하려는 건, 사실 자기가 좀 편하고 싶어서 맘을 놓고 싶어서이거든요. 그래서 안될 건 없지만 더 중요한 건 내가 잘사는 거예요. 기준을 높여서 나를 엄히 관리하면 상대가 어떠하건 좌우되지 않으니까요." (p.364)
고현정과의 인터뷰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 것입니다. 저는 영화에 대해 그닥 아는 게 없는지라 다른 인터뷰에서는 광고가 많이 실린 월간잡지를 대하듯 건성건성 읽었습니다만 고현정 편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아, 이 여자 보통이 아닌걸' 싶었던 거죠. 자세를 고쳐 앉고서는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을 주의깊게 읽었던 분이라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아셨을 테지요. 책에 실린 건 채 20쪽이 되지 않는 짧은 인터뷰였지만 TV나 영화에서 보여지던 철없고 야리야리한, 남자들로부터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여자는 아니라는 걸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짧은 대화에서 한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밝혀내고 끄집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핵심을 찌르는 좋은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하여 자신의 속내를 꾸밈없이 털어놓는 답변이 이어진다면 몇 마디의 짧은 대화로도 그 사람의 깊이를, 됨됨이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인간성을 십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왠지 누군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진심을 담은 대화를 나누고픈 그런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