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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어떤 소설은 우리가 사는 메이저한 세상에서 메이저한 방법으로
읽어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아귀가 맞지 않는 맷돌처럼 한없이 겉돌기만 하다가 종국에는 '아몰랑' 내팽개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럴 땐 곰팡내 나는 마이너한 공간으로 내려가서 마이너한 방법으로 책을 읽어야만 한다. 눈의 초점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하지 않으면
'매직 아이'에 나타나는 입체 사진이나 그림 속에 숨겨진 특정 글씨가 3D로 나타나는 경이적인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박민규의 단편 소설집
<카스테라>도 어쩌면 그렇게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의식의 한 쪽 눈을 한 자리에 고정시킨 채 다른 쪽 눈을 몽롱한 꿈의 세계에
반쯤 걸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매직 아이'를 볼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읽지 않으면 현실과 꿈의 층위가 한 화면에서 3D로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아무리 애를 써도 2D로 밖에 볼 수 없는, 조금 덜 떨어진(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만.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여 작가에게 '적녹안경'을 요구한다거나 소설의 리콜을 요구하는 등의 덜떨어진 짓을 하는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말이다.
"이불을 펴고 나는 자리에 누웠다. 두
개의 창문 틈으로 시린 우풍이 새어들어왔다. 세기의 마지막 밤은 - 그런 식으로 우리의 세계를 냉장하고 있었다. 오늘밤만은 이 세계의 부패도
잠깐 그 진행을 멈추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p.32)
이 책은 표제작인 '카스테라'를
비롯하여 10편의 단편을 한 권에 엮은 단편 소설집이다. '카스테라'는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한 내가 소음이 심한 냉장고를 구입하여
2년여를 같이 지내는 동안 온갖 황당무계한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냉장고의 전생이 훌리건이었을 거라는 발상에서부터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는, 그러니까 책을 읽는 동안 전두엽에서 이탈한 나의 뇌세포가 변연계를 지나 해마로 숨어들었다가,
십삼 년 전 범죄를 저지른 어느 살인자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은신하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작가와 어렵사리
접선한 느낌이 들었다. '귀신 씨나락이라도 까먹는 듯한 음악이 울려퍼지는' 너구리 게임의 폐인과 친구가 된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읽고, 흔들리는 삶을 붙잡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고, '이 세계가 너무, 그렇고
그렇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지구 탈출기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를 다 읽을 즈음이면 그래, 점심을 먹어야지. 밥을 먹으러
가기 전에 딱 하나만 더, 일흔세 곳의 직장에서 퇴짜를 맞고 유원지 오리배를 관리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한 취준생의 이야기<아,
하세요 펠리컨>을 읽는 바람에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다.
"전문대라는 단어 역시, 늘 어딘가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느낌이었다. 퐁당퐁당 퐁당. 그래서 그곳의 가족들이, 혹은 커플들이 한 마리의 오리를 타고 앉은 광경을 지켜보노라면 묘한
연민의 정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뭐랄까, 저렴한 인생들 사이에 흐르는 심야전기와 같은 것이었다."
(p.130)
변비로 고생을 하는 한 남자의 일상을
다룬 <야쿠르트 아줌마>, 대학시절 학생 운동을 함께 했던 선배의 몰락을 지켜보는 한 직장인의 삶을 그린<코리언
스텐더즈>, 어린 시절에 구독하던 잡지 '소년 중앙'에서 보았던 대왕오징어의 추억이 '괴수대백과사전'으로, '주간경향'으로, '사상계'로
옮겨오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대왕오징어의 기습>, 미국 유학 시절 헤드락을 당한 경험과 자신이 행한 헤드락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이야기의<헤드락>, 대학 시절 학교 근처의 고시원에서 이년 육 개월을 살았던 어느 샐러리맨의 추억을 다룬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읽었다.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게 아니란 사실을 - 동시에,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즉, 어쩌면
인간은 -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 (p.286~p.287)
박민규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큭큭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하고, 찡한 감정의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이 울컥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한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읽어나가면 저렴한 인생을 사는 전세계 인간 군상들을 모두 만나볼 것도 같고, 그들 사이로 흐르는 심야전기가 찌리릿 느껴질 것도 같다. 찌릿 찌릿
찌리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