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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위로받지 않을 권리
최상진 지음 / 문학의숲 / 2015년 11월
평점 :
지금도 나는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시 한 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로 시작되는 조병화 시인의 시 "해마다 봄이 되면"입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봄처럼 부지런하라, 꿈을 지녀라, 새로워라, 당부합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시인의 당부가 싫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어느새 어른이 된 나는 지금의 '어린 벗들'에게 시인처럼 당부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한없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껏 이 시를 기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시인의
삶이 진실했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살지 않은 한 사람의 깊은 진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진실의 힘은 깊고 오래 가는
법이니까요.
"지난날을 개념 없이 살아온 비청춘들이여,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나간 세월이야 그렇다 치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청춘들은
어찌하랴. 세상은 그저 그렇고 그러니 그냥저냥 권력에 순치돼 살라고 청춘들에게 권할 것인가. 나는 강자 너는 약자, 나는 강남 너는 강북, 나는
부자 너는 빈자로 정해져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한국식 카스트를 평생 안고 살아가라고 말해줄 것인가. 이제 다시 정의다. 정의는 이겨야 한다.
정의 편에 섰으면 정의가 이길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청춘들이 정의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올곧은 사회를 만들어 줘야 한다."
(p.131)
경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최상진 교수의 <청춘, 위로받지 않을 권리>를 읽으며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때로는 심란한 기분을
가라앉히려 시작한 독서가 오히려 마음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다들 학부형이 된 친구들을 동창 모임에서 만날 때마다 참회의
말을 한 바가지씩 쏟아내고 돌아서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마저도 그만두었지만 말입니다. 내 자신이 떳떳해져서 그런 게 아닙니다. 뻔뻔스럽게
사는 것에 익숙해지면 마음에도 없는 참회의 말이 되려 부끄러워지는 까닭입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갖가지 비리 의혹에 휩싸였던 여당의 한 후보는 당의 대통령 후보를 뽑는 예비경선에서
이렇게 말했었지요."나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나를 왜 경선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까? 본선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그가 그렇게 원하던 대통령 자리에도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임 시절에도, 퇴임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그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결코 다정하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살았다고 역설하는 그의 강변은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작은
손바닥도 되지 못하는 듯합니다.
저자는 책에서 청춘을 향한 무한 응원을 보내고는 있지만 날카로운 질타와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이라는 '반려기계'를 끼고
사는 '조로(早老)의 청춘'에 대한 우려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오늘을 허깨비처럼 살아가는 허수아비 청춘을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청춘을
올바로 자라게 하지 못한 기성세대의 참회와 반성의 글도 함께 말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청춘을 청춘답게 하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청춘이 속한 사회적 기반과 문화적 토양이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빈약한 토양과 거친 날씨에서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청춘을 나무라고 잘못을 지적하여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하기에는 이제 대한민국의 문화적 토양이나 제도의 기반이 턱없이 부족해졌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웃을 돌보고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 정의는 사라지고 오직 돈과 권력의 먹이사슬만 존재하는 신자유주의 문화가, 부모의 권력을
대대로 승계하려는 '한국식 카스트' 제도가 수십 년 지속되어 온 까닭에 희망에 찬 청춘이 발 붙이고 살기에는 부적합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따금 개념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고치면 되지 않느냐구요. 그러나 그것은 한 나라의 문화와 제도는 쌓이고 축적되는 것이지
손바닥 뒤집 듯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몰라서 하는 말일 뿐입니다.
기성세대가 자신의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 놓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청춘은 그 무엇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덩어리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들을 가능성의 덩어리로 만드는 것도 그 사회의
기성세대가 할 몫이고, 바람처럼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것도 기성세대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청춘은 한 사회의 미래인 동시에 암울한 현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을 나무라기에는 대한민국은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되어집니다.
" '조용히 해'로 길들여진 청춘은 패배주의와 보신주의에 익숙해지고 청춘답지 못한 청춘으로 성장한다. 창의력이 있을 리 만무다. 다만
권력의, 권력에 의한, 권력을 위한 창의력을 발휘할 뿐이다. 눈치만 늘어나고 심하면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 권력의 그늘에서 기생하고 그
권력을 계승하고 훗날 더 큰 소리로 '조용히 해'를 외치는 사람이 된다." (p.184)
저자는 청춘들에게 '신경질을 내라고', '왜 당신들에게 위로를 받아야 하느냐고, 너나 잘하시라고' 말하라 합니다. 위로가 넘쳐나는 대한민국
사회에 거짓 위로인들 생겨나지 않을 것이며, 거짓 애국자가 넘쳐나는 대한민국에 거짓 선동가인들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청춘은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는 입체의 홀로그램이어야 합니다. 세상 어는 곳에도 없는 독자적인 색이어야 합니다. 저는 비록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한심한 넋두리를 늘어놓는
비청춘의 한 사람이지만 내 말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그냥 흘려버리는 바람인 듯 여겨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기성세대가
하는 모든 말들을 거부할 권리가 청춘 모두에게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